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18화 (27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8화

55. 화룡점정(23)

파리에서 잠시 쉬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이한나 작가와 방예은이 1년 정도의 유학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파리에 정착했다.

최근에 <꽃>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린 덕에 방태호에게도 제법 큰 돈이 가긴 했지만 파리 시내 아파트를 구입하기엔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한나 작가의 소설 <피의 낙인>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프랑스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번역된 소설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단다.

밤을 새워 읽을 정도로 흥미로운 치정물이긴 한데 이성 관계를 자유롭게 가지는 이가 비교적 많은 프랑스에서 인기라고 하니 조금 의아했다.

연인을 두고 바람 피는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도리어 소설 주인공들의 비정상적인 독점욕과 소유욕이 매력적으로 보인 듯하다.

정작 나는 앙리 때문에 집착하는 사람은 질색하게 되었거늘 세상 참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일로 마은찬을 객식구로 맞이했다.

처음 왔을 때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와서 물었더니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캔버스째 보관하는 건 엄두도 못 냈단다.

작품은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저장하고 캔버스화는 천만 뜯어내서 남에게 선물하거나 버렸고, 마음에 드는 몇몇만 보관해 왔다고 하여 마음이 아팠다.1)

갤러리가 완공되면 작품 보관실을 충분히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앙리 마르소가 몇 번 연락했다.

스위스 바젤에서의 일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뜬금없이 베를린에 가자고 하기에 가도 혼자 간다고 못박았다.

싫은 건 아니지만 그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함께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주변을 넓혀나가고 고민도 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7월 28일.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3일 앞두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시상식 날이 찾아왔다.

뮌스터에 사는 시민들이 고맙다며 주는 상이니 아르누보 공모전이나 SNBA 살롱전 같은 곳에서 받는 상보다 훨씬 값지다.

“한산하네요.”

“그럴 만도 하지. 개막하고 벌써 6주가 넘었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단 많이 있는데?”

방태호가 <변치 않는 가치>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개막하고 6주가 흘렀는데도 감상하고자 대기하는 사람이 있다.

“재밌었어?”

“응! 놀이공원 온 것 같아!”

감상을 마치고 나선 가족들의 대화를 얼핏 들을 수 있었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전시관처럼 작용해 관객이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한 의도가 잘 통한 듯하다.

조각은 생소하고 사실 <변치 않는 가치>가 조각인지도 모호하다.

아마 앙리가 없었더라면 이런 작품을 만들 순 없었을 거다.

시상식장에서 만나게 될 텐데 오늘은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낯익은 남자가 일행과 함께 <변치 않는 가치>에서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다.

“또 와주셨네요.”

깊은 주름에서 전해지는 고집스러운 얼굴. 작은 키. 턱수염을 잘 정리한 남자는 안경을 들어 올리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다나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너는…….”

“어땠어요?”

간단한 회화 정도는 통할 텐데 뜻이 전달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대답하기 싫은 건지 알 수 없다.

조금 민망해져서 웃어 보이니 등을 보였다.

그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운 마음에 서둘러 불러 세웠다.

“다나카 씨.”

남자가 깜짝 놀라 돌아섰다.

“이거. 받으세요.”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손을 끌어다가 가지고 있던 사탕 두 알을 쥐여 주었다.

“맛있어요.”

다시 한번 웃어 보이곤 돌아서니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다나카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훈아. 뭐 하러 그랬어. 저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 했는지 알잖아.”

할아버지가 얼굴을 쓸며 타일렀다.

예전에 첫 개인전에서 내 그림을 유치하다고 말했던 걸 마음에 두고 계신 거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그가 무슨 뜻으로 쇼콜라티에를 언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또 제 작품 보러 와줬으니까요.”

“아이고.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안다.

아마 이번에도 날 깎아내리려고 왔을 텐데, 그도 사람인 이상 진심은 언젠가 통하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게 미워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 * *

한편 다나카는 고훈이 전해준 사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녀석 분명 선생님을 놀리는 겁니다. 영악한 놈.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럴 수 있습니까?”

주변 사람이 모두 고훈을 비난했지만 다나카는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 순수한 미소에 그런 의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너무나 태연히 다가와 인사를 걸기에 차마 대꾸할 생각을 못 했을 뿐이었다.

“마스다.”

“네, 선생님.”

곤도 마스다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이번에 쓴 평론이 언제 실리는지 기억하나?”

“오늘 시상식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평론집이 시민상 수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배본 시기를 조절해 두고 있었다.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다나카 히로부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변치 않는 가치>를 통해 고훈이 추구하는 바를 비로소 깨달아, 과거 몇 차례의 잘못을 바로잡은 글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수상자라고 해서 그것을 먼저 넘기지는 않았을 터.

고훈에게 자신은 아직 트집 잡는 사람일 뿐이었다.

협회로부터 한국의 어린 천재가 주목받지 못하게 누르라고 지시받아, 억지를 부렸던 자신을 그토록 반갑게 대해준 것이었다.

“그랬던가.”

다나카 히로부미는 더 이상 펜을 들 자신이 없어졌다.

* * *

2030년 7월 28일 오후 2시.

뮌스터 시청사에서 조각 프로젝트 역사상 최초로 시민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유럽 내 14개국에서 취재를 나왔으며 뮌스터 시민 3,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온 쾨니히 예술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55년 전에 우리 뮌스터는 추상조각의 선구자 헨리 무어로부터 조각상 하나를 기증받았습니다.”

레온 쾨니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시 뮌스터의 반응은 무척 차가웠죠. 도대체 뭘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수천만 파운드에 거래되는 작품을요.”

고훈이 레온 쾨니히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살짝 미소 지었으나 좌중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훈은 어리둥절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때 클라우드 부스만 씨가 나섰죠. 시민들에게 공공 예술을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며 미술관 안에만 박혀 있는 미술작품을 우리 일상으로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1977년부터 개최된 조각 프로젝트가 드디어 결실을 본 듯합니다.”

레온 쾨니히 예술감독이 돌아서서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앙리 마르소, 고훈 작가를 모시겠습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민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미리 약속한 대로 앙리 마르소가 먼저 단상 앞에 섰다.

“하나 짚고 시작하지.”

앙리 마르소가 레온 쾨니히에게 물었다.

“비싼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허허. 글쎄요.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요.”

앙리 마르소가 레온 쾨니히를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시민들을 앞에 두었다.

“헨리 무어의 작품이 수천만 파운드라고 해도 그 가치는 그것을 산 사람이나 인정하는 거다. 그 가치를 당신들이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어. 배울 이유는 더더욱.”

“저, 저.”

레온 쾨니히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운영회가 당황했지만 앙리 마르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도 선민의식에 빠진 주최 측과 달리 당신들은 무엇이 옳은지 잘 아는 것 같군. 이 상은 고맙게 받지.”

앙리 마르소가 시민들이 만들어 준 유리 감사패를 들어 보이고 자리로 돌아섰다.

시민들은 환호하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측은 몹시 불쾌해하는 사이 고훈이 나섰다.

단상이 너무 높아 얼굴이 보이지 않자 행사 보조 직원이 다급히 단상을 치우고 마이크를 내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고훈이 직원에게 인사하자 시민들이 작게 웃었다.

“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두서없이 시작해 볼게요.”

소년은 숨을 한번 고르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작년에 소중한 친구랑 다퉜어요. 서로 생각이 너무 다른데 고집도 세서 아직도 화해하지 못했어요.”

앙리 마르소가 뒤에서 고훈을 노려보았다.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 친구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겠죠. 싸우고 할퀴고 꼬집고 이것저것 해봤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아마 평생 그럴 것 같아요.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시민들이 고훈과 그 뒤에서 인상을 쓰는 앙리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굳이 서로를 이해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요. 저도 저를 잘 모르니까요.”

고훈은 앙리 마르소,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스위스 아트 바젤을 겪으며 정리해 온 생각을 풀어냈다.

“그런데 그 친구도 저를 이해시키려고 했고. 저도 모르게 앙리, 아니, 그 친구한테 제 생각을 강요했는지도 몰라요. 저 인간 두고 하는 말 아니에요.”

고훈이 다급히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짜증 나고 정말 보기 싫을 때도 있는데 오늘 같이 만든 작품을 다시 보니까. 그래도 그때는 재밌었는데, 싶더라고요. 그새 미운 정이 들었나 봐요. 진짜 저 사람 아니에요.”

“너, 이!”

앙리 마르소가 일어나려고 하자 아르센이 그를 붙잡았다.

“저 인간이 방금 비슷한 말을 했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정말 좋은 행사예요. 여러분과 저를 만나게 해주었잖아요. 여러분과 미술이 정들게 해주었잖아요. 서로 이해하진 못해도요.”

고훈이 레온 쾨니히 예술감독을 보며 말했다.

“교육이라는 말이 조금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나 함께하는 일 정도면 좋지 않을까요?”

앙리 마르소가 표현을 격하게 했지만 소년 역시 현대 미술에 무지한 대중을 교육한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여러분 덕에 뮌스터가 존재하고. 조각 프로젝트도 60년 가까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이 감사패를 쥐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시민들 사이에서 천천히 박수가 번져나갔다.

* * *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시상식에서 일침을 가한 앙리 마르소, “선민의식에서 벗어나라.”]

[고훈, “여러분 덕이에요.”]

[고훈과 앙리 마르소 시상식 끝나자마자 뒤엉켜 다투다]

[이 시대의 두 천재 화가가 울린 경종]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시민상을 수여 받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운영위원회에 일침을 가했다.

앙리 마르소는 “시민들을 교육한다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했고 고훈은 앙리 마르소와의 일화를 비유로 들어 “굳이 서로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두 예술가는 미술이 예술가가 제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대중과 쌍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날 고훈과 앙리 마르소는 또 한 번 싸워 변치 않은 우정을 과시했다.

* * *

1)미대생 대다수가 겪는 고충.

따로 작업실이나 보관실을 가지기 힘든 미대생들은 캔버스의 천을 제거하고 틀은 재활용한다.

설치 작품이나 조형물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아 영상이나 사진 등 디지털 파일로 저장해 포트폴리오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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