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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317화 (27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7화

55. 화룡점정(22)

“훈이 할아버지 봐. 할아버지 눈 보고 말해.”

“정말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할아버지가 벌써 몇 번째 다그쳐 묻고 있다.

경매장에서 뱉은 말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날 학대한 건 아닌지 의심하시는 모양이다.

학대는커녕 너무 잘 먹고 행복해서 확대당했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답답해서 홧김에 한 말이에요.”

“아니다. 할애비가 듣기엔 그냥 한 말이 아니었어.”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장미래가 선물로 준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게임.”

“응?”

“게임 이야기였어요. 그……. 게임 안에서 돈 없으면 이것저것 불편하거든요.”

뭐가 불편한지 모른다.

인터넷 방송할 때 시청자들이 말하는 걸 조금 주워들었을 뿐이다.

할아버지도 제대로 모르실 게 분명하니 어떻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이야?”

“네. 아마도?”

“아마도?”

할아버지가 또 한 번 의구심을 가지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게임도 사람들끼리 하는 거니까 사회가 있어요. 돈 같은 거 없으면 못 하는 것도 많고. 앙리가 답답하게 굴잖아요. 그냥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낸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할아버지를 안아 드리고 서둘러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경매도 그렇고 이후 인터뷰 요청에 할아버지의 오해까지 참으로 정신없는 하루다.

모든 게 다 앙리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니 분이 안 풀리나.

나와 <꽃> 사이에서 결국 답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조금 불쌍해지기도 한다.

잠을 청할 겸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켰다.

예상했던 대로 오늘 경매에 관련한 기사가 셀 수 없이 올라와 있다.

다들 올해 미술품 경매 중 최대 낙찰액이라며 야단스럽게 말한다.

“…….”

한때는 인정받지 못해 매일 밤 통탄했거늘 지금은 친구들과의 추억을 담았을 뿐인데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다.

세상 참 두 번 살고 볼 일이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켰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싶음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이성을 옭아매고 감성을 뒤흔들던 병에서 벗어났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를 통해 수없이 많은 작품을 만남으로써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그림에만 몰두했다.

하나 그 덕분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

빈센트로서나 고훈으로서나 내가 사랑받는 데에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사람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살아서는 테오 덕분에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죽어서는 내 그림과 편지를 모아둔 제수씨 덕분에 비로소 알려질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부모님과 할아버지 덕에 건강히 살 수 있었고, 할아버지와 장미래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깊이 사고할 수 있었다.

첫 개인전부터 도와준 방태호 덕에 여러 일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으며.

앙리 마르소를 만나면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혼자 이뤄낸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메일함을 열어보니 편지가 꽤 많이 도착해 있다.

하나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운영위원회에서 보내온 시민상 수상 소식과 시상식 안내문과 여러 언론사에서 보낸 인터뷰 요청문은 그대로 방태호에게 전달했다.

뷰그레넬리 쇼핑몰 측에서 보내온 축하 편지에는 500유로짜리 상품권이 동봉되어 있다.

차시현이 정기적으로 보내는 그림 파일도 있어 열어보니 이제는 제법 멋을 낼 줄 안다.

파란 잎이 돋아난 나뭇가지가 호숫가에 드리웠다.

내일 연락해 봐야겠다.

“……?”

가장 최근에 도착한 편지의 발신인이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이라고 되어 있다.

제목: 베를린 필하모닉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발신인: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

안녕하십니까,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에서 연락드립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자선 연주회 개최 및 음악 교실, 음악원을 운영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민과 공생하는 단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여 작가님께서 달리다 광장에서 보여주신 활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 자선 연주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대권을 보내드리오니 찾아와 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 대외협력팀 죠엘 웨인 대리

베를린 필하모닉이 자선 활동도 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따뜻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남을 돕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

<꽃>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해 주기도 했으니 인사라도 해야 도리일 터.

초대권을 스마트폰에 내려받고 잠을 청했다.

* * *

“초대권?”

할아버지, 방태호, 마은찬과 식사를 하며 베를린 필하모닉으로부터 초대받은 사실을 알렸다.

“네. 자선 연주회 티켓을 보내주더라고요.”

“언제?”

“올해는 다 쓸 수 있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일 끝내면 가보는 게 좋겠구나. 훈이도 좋아하고.”

“네.”

“운이 좋네. 표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다던데.”

“그럼 다 같이 가요. 형도요.”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마은찬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요. 10장이나 보내줬어요.”

허겁지겁 삼키고는 물을 마신다.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정말?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말도 안 돼. 난 평생 못 들어볼 줄 알았는데.”

“표가 비싸요?”

“비싸다기보단 자리가 없으니까. 보통 정기 연주회는 시즌 시작할 때 구해야지. 안 그러면 못 구해.”

방태호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한 시즌 표를 한 번에 판매하는데 그마저도 완판이라니 베를린 필하모닉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것 같다.

“근데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하면 안 되는데.”

마은찬이 포크를 든 채 시무룩해졌다.

“뭘 받기만 해요.”

“VIP 초대권 없는 거 알아. 어제 돌아다니면서 들었거든.”

부담 주지 않으려고 했던 거짓말이 들통나고 말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지켜보고 있으니 마은찬이 허리와 어깨를 펴며 웃었다.

“빨리 돈 벌어서 갚을게. 꼭.”

돌려받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언젠가는 꼭 갚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 또한 언젠가는 테오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고, 다짐하듯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신경 쓰지 말라던 테오의 미소에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 기억할 거예요.”

“응! 믿어도 돼! 나 약속은 지키는 편이니까.”

작게 웃고는 식사를 이어가던 중 방태호가 일정 이야기를 꺼냈다.

“시상식이 7월 28일이니까 우선 파리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뮌스터에 들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 밖으로 돌아다니기엔 애매하니. 훈이 어디 더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니요. 좀 쉬고 싶어요.”

“껄껄. 그래. 벌써 2주째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마 작가는 뮌스터 생활도 정리하셔야 할 텐데.”

쇼콜라티에로 영입하면서 파리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 있었다.

마은찬도 학교보다는 경험을 쌓고 싶다며 흔쾌히 수락했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10일까지 월세 냈거든요. 파리에서도 알아봐야 하는데 하항. 구경 다니느라 깜빡했어요.”

“음. 그러면 안 되지. 집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넌지시 물으셨다.

“그러면 아예 같이 사는 게 어때요.”

“네?”

“부담 갖지 말고. 쓸데없이 크게 지어서 빈방도 많아요. 지금 방 대표나 김 작가님도 머물고 있으니까.”

“어…….”

마은찬이 망설인다.

타인의 호의를 무작정 받을 만큼 뻔뻔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많이 있으면 불편하실 텐데.”

“껄껄. 외로운 것보단 북적거리는 게 낫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전 곧 가족들하고 따로 나가 살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마은찬이 손을 꼼지락대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염치없어서 죄송합니다. 거절할 주제가 아닌 것 같아요. 청소든 빨래든 뭐든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없이 살다 보면 누군가의 호의가 온전히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날 무시하나 싶기도 하고.

내가 적선이나 받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나 싶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당장 다음 달, 다음 주, 내일이 무서워지게 되면 그러한 마음도 없어진다.

당장 처한 상황을 벗어나야 하니 자존심은 잠시 내려두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 또한 그렇게 뻔뻔하게 테오에게 매번 돈을 빌렸었다.

가슴에 얼마를 빌렸는지 새겨넣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갚으리라 다짐했다.

* * *

“작가님. 아르센입니다.”

“뭐야.”

문밖에서 비서가 인기척을 내자 앙리 마르소가 짜증을 냈다.

모든 것을 소유해 왔던 남자는 소중한 두 사람이 제시한 양자택일을 두고 며칠째 고민에 빠져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르센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작가님을 초대했습니다.”

“뭐?”

아르센이 앙리에게 편지를 건넸다.

고훈이 받았던 이메일과 내용은 같으나 악단주 배도빈이 따로 추신을 덧붙여 적었다.

추신.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꽃>은 다음 달 서울로 보내질 예정이니, 미련이 남았다면 친구와 함께 찾아오시오.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뭐가 어쩌고 저째?”

앙리 마르소가 편지를 구겨 던져버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하거늘 조롱당하니 참을 수 없었다.

아르센이 편지를 펼쳐 읽어보곤 입을 열었다.

“나쁜 제안은 아닌 듯싶습니다.”

앙리가 아르센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작가님도 B도 자존심 때문에 경합이 붙지 않았습니까. 작가님께선 훈이가 만류해서, B는 꽃을 사서 양쪽 모두 상처 없이 끝났죠.”

“그래서.”

“찾아오라는 걸 보면 뭔가 제안할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B도 작가님께 꽃이 어떤 의미인지 대강 짐작하는 듯합니다.”

“…….”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받고 싶단 말 같아?”

경매가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 같냐는 질문이었다.

“B가 그런 치졸한 행동을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으며 그랬다면 초대하진 않았겠죠.”

아르센이 앙리를 진정시켰다.

최근 너무나 예민해진 탓에 사고의 흐름이 안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평소라면 배도빈의 음악을 오랫동안 들어온 앙리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하여 이성을 찾았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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