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6화
55. 화룡점정(21)
아담 글래드스톤과 에드워드 제너가 내심 쾌재를 질렀다.
아무래도 오늘 크리스티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경매가 이뤄질 것만 같았다.
<꽃>은 쇼콜라티에를 상징하는 작품이었다.
전쟁과 사상, 이념 아래 개인이 짓밟힌 뒤.
예술인들은 개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개인이 자신을 돌아보고 소중히 한 다원화 과정에서 사람들은 소통의 부재라는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고자 스스로 벽을 친 현대인들 사이에 허물 수 없는 벽이 생겼고.
미디어를 통해 고독과 증오를 키워오며 인간적 가치는 점차 옅어졌다.
그런 시대에서 쇼콜라티에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이 소설과 드라마, 영화 속 이야기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고훈은 사랑하자고 더욱더 사랑하자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점차 사람들에게 닿아 막 꽃을 피운 계기가 달리다 광장 거리 그림이었다.
그 소중한 의미를 두고 프랑스 대부호 앙리 마르소와 전 세계 시가총액 3위의 거대 그룹사 WH의 상속인이 경쟁하니.
40년 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 달러에 거래된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만큼이나 화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재가 1,200만 달러입니다. 입찰 의향 여쭙습니다.”
경매사 아담 글래드스톤이 경매를 재개하였다.
“1,300만.”
-1,400만.
배도빈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앙리 마르소가 가격을 높여 불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눈을 치켜떴다.
고집스럽기로는 베를린에서 제일가는 남자는 심기가 불편했다.
고령의 외조부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참여한 경매장에서 뜻하지 않은 작품을 접했거늘 방해가 들어왔다.
모친을 통해 여러 미술품을 접했고 경매사로부터 <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충분히 듣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인류애를 외치던 그에게 <꽃>은 특히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배도빈은 외조부가 그의 성 ‘배’와 미술관(Museum)의 ‘움(um)’을 합성해 지은 배움 미술관에 <꽃>을 전시하리라 마음먹었다.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앙리 마르소 씨께서 1,400만 달러에 입찰하셨습니다.”
“1,500만.”
배도빈이 경매사가 의사를 물어보기도 전에 입찰했고.
-1,600만.
앙리 마르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매사는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1,700만.”
배도빈이 또 한 번 가격을 높이자 앙리 마르소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껏 입찰을 곧장 받아치며 의지를 보였음에도, 상대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에 사람들은 눈치만 보았다.
경매사 아담 글래드스톤만이 이 경매를 더욱 과열시키고자 나섰다.
“현재가 1,700만 달러입니다. 앙리 마르소 씨.”
-닥쳐.
그러나 앙리 마르소도, 배도빈도 경매사의 술수에 놀아날 인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몹시 불쾌했지만, 서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은 익히 알고 있었다.
“흠.”
상황을 지켜보던 방태호가 신음했다.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두 사람은 공개된 재산만으로도 수십조 원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장 1,700만 달러의 입찰액이 문제는 아니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할 리 없으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다.
고훈에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선생님.”
방태호가 고수열을 불렀다.
고수열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미 상황이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낙찰되어도 고훈의 다음 작품들은 유찰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1,400만 달러에 낙찰된 <서리 밀밭>으로 시장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상황에서.
<꽃>마저 수천만 달러에 팔린다면 앞으로 고훈의 작품을 사려고 나서는 이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술품에 그만한 돈을 투자할 만큼 재력을 지닌 사람은 극소수고, 고훈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이는 그들 중에서도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고훈이 우려하던 대로 ‘앙리 마르소만이 사 주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이천.
앙리 마르소가 2,000만 달러를 부르려던 차.
앳된 목소리가 그를 막아섰다.
“그만!”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탓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앙리 마르소가 되물었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저걸 경매에 내놨어? 저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알아! 아니까 말리는 거잖아!”
전 세계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실은 두 사람에게 중요치 않았다.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앙리 마르소가 눈을 부라렸다.
그에게 <꽃>은 고훈과의 유대를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달리다 광장에 수많은 해바라기가 피어난 날 앙리 마르소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전쟁터나 다름없던 그의 세계에서 미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즐겁거나 행복한 감정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적은 너무나 많고 강했고 앙리 마르소는 철저히 홀로 싸워야 했다.
다음 세대는 조금 나아지길 바라며 고독하게, 처절하게, 간절히, 용감히 싸워나갔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지칠 때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달리다 광장은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는 희망과 다시 한번 일어설 용기를 준 계기가 되었다.
고훈이 쇼콜라티에를 창설할 때 기꺼이 힘을 보태준 이유였다.
-생각이 있었으면 쇼콜라티에 갤러리에 걸어놓았어야지. 저걸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넘기려 해? 너야말로 생각이 있어, 없어!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탓했다.
-네 이해 따위 바라지도 않아. 방해하지 말고 입 닫고 있어. 천만 달러에 팔리든 2천만 달러에 팔리든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안 해.
감정 표현에 서툴고 고집이 센 탓에 평생 오해를 달고 살아온 앙리 마르소는 아주 어렸을 적에 남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했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에겐 그럴 힘이 있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해낼 뿐이었다.
고훈은 그런 앙리 마르소가 안타깝고 답답했다.
“내가 당신 그 삐뚤어진 성질머리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성격 개떡 같은 거 진즉에 알았어! 당신 싫었으면 처음부터 말도 안 걸었을 거라고!”
-뭐?
“남 눈치 보느라. 민망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돈 좋아해! 돈 없어서, 못 먹어서 별의별 꼬라지 다 봤으니까!”
경매장의 모든 시선이 고수열을 향했다.
미술계의 거목으로 존경받고, 손자 사랑하기로 유명한 고수열이 당황하고 말았다.
“왜 내놨냐고? 쇼콜라티에 운영해야 하니까! 애들 간식 나눠주려면 돈 있어야 하니까. 놀 곳 없는 애들한테 크레용 하나라도 더 쥐여 주고 싶으니까! 은찬이 형처럼 재능 있고 노력도 하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돕고 싶으니까!”
좌중이 술렁였다.
고작 만 12세인 어린 화가가 아이들과 가난한 화가를 위해 작품 활동을 한다는 데 충격받은 이도 있었고.
고훈이 언급한 은찬이 누군지 찾는 이도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갖다 쓰면 될 거 아니야.
“당신이!”
고훈이 여태 간직해 온 말을 꺼냈다.
“외부 사람이야? 당신은 저기 안 있었어? 대문짝만하게 그려놨잖아! 그 잘난 눈은 장식이야? 왜 자꾸 남 일처럼 굴어! 우리가 남이야?”
누구보다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늘.
함께 행복한 세상을 그려나갈 사람으로 여겼거늘 앙리 마르소는 항상 남처럼 굴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에 나설 때도.
마르소 미술관을 자랑할 때도 앙리 마르소는 고훈을 다음 세대의 주역으로 여겼을 뿐,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쇼콜라티에를 함께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돈을 들일 뿐이었다.
그와 동등한 입장이고 싶고.
그에게만은 빚을 지지 않으려는 마음은 함께하고 싶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너…….
“시끄러워! 내 말 들어!”
한 번 물꼬를 틀자 여태껏 참아왔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주기 싫대? 당신이 내 그림 가져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것 같아? 나도 좋아! 나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 당신이니까!”
-…….
“근데 우리가 그린 걸 우리가 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 빡대가리야!”
-빠, 빡대가리? 너 이 자식 말 다 했어?
“다 했다! 사기만 해봐. 다신 안 볼 줄 알아!”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했기에 차마 어떻게 나서야 할지 몰랐다.
그저 화를 내는 것으로 숨길 뿐이었다.
-건방지게 누구한테 명령이야!
“잡소리 집어치우고 말해. 나야 저거야.”
-뭐?
“나야 저 그림이냐고.”
앙리 마르소는 대답할 수 없었다.
* * *
[고훈 꽃 스위스 아트 바젤서 1,700만 달러에 낙찰]
[올해 미술 경매 최고가 갱신! 꽃이 의미하는 바는?]
[고훈, “나야 저거야.”]
[말없이 영상 통화를 끊은 앙리 마르소. 세계 미술 포럼 강연 중 마이크 집어 던져.]
[배도빈, “만족한다. 할아버지 생신 선물로 샀다. 두 화가의 사랑은 응원한다.”]
배도빈의 인터뷰 기사를 접한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생일 선물? 생일 선물?”
두 사람의 유대를 상징하는 <꽃>을 고작 생일 선물로 샀다는 데 분통이 터질 듯했다.
당장에 베를린으로 달려가 배도빈의 멱살을 붙잡을 심정으로 일어섰다.
“어디 가?”
함께 있던 미셸이 무심히 물었다.
“베를린.”
“뭐 하러?”
“돌려받아야겠어.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소장할 물건이 아니야.”
“그래?”
아르센을 부르려던 앙리 마르소가 손톱을 손질하는 미셸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 없거늘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뭐야.”
“뭐가?”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무슨 일인지 미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뭐 해? 나간다며.”
“…….”
앙리가 의심하며 문고리를 잡자 미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 하는데. 아주 드라마 찍고 난리네. 베를린에 가선 또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앙리가 돌아섰다.
“뭐야.”
“뭘?”
“왜 그러냐고 묻잖아.”
“내가 뭘.”
대화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미셸이 평소와 달리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빨리 말해. 내 성격 몰라?”
“그러니까 뭘 말하라고.”
“불만이 있으니까 이러고 있을 거 아니야.”
미셸이 앙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화 없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미셸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해봐.”
“뭐?”
앙리가 인상을 썼다.
“빨리.”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넌. 이게 헛소리 같니?”
미셸의 목소리가 떨렸다.
“훈이한테는 잘만 하면서 왜 나한테는 못 해? 세상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고래고래 잘만 외치더만. 왜 나한테는 안 해?”
앙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날 가지고 싶으면. 나도 너 가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너만 다 가져? 훈이랑 그러고 놀 때 내 기분 생각해 봤어?”
“무슨 말을. 억지 부리지 마. 너랑 그 녀석이랑 어떻게 같아.”
“왜? 남들이 볼 땐 난 그냥 네 사업 파트너인데? 고훈은 영혼의 단짝이라더라.”
앙리 마르소가 당황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로 트집을 잡고 있었다.
“선택해.”
“뭘?”
“나야 훈이야.”
앙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제도 비슷한 질문을 받아 대답하지 못했었다.
“하. 됐다.”
미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앙리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이거 놔.”
“안 놔.”
“놓으라고!”
“안 놔.”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훈이랑 떨어져.”
“싫어.”
“그럼 이 손 놔.”
“안 놔.”
“나랑도 만나고. 훈이랑도 놀고 싶다?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미셸이 사랑스러운 멍청이를 쏘아붙였다.
이번 기회에 타인을 독점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마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