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5화
55. 화룡점정(20)
명확한 의도였다.
입찰 경쟁에 참여하지 않고 굳이 마지막에 가격을 높였으니 반드시 <꽃>을 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충격받은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미 입찰자 대부분이 경매를 포기한 시점에서 조만장자로 유명한 배도빈이 직접 나섰으니 경쟁자가 생길 리 없었다.
아르센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는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천만 달러를 지불 못 할 앙리 마르소가 아니었다.
본인이 현장에 있었더라면 천만 달러가 아니라 억만금을 주더라도 <꽃>을 샀을 터였다.
앙리 마르소가 본인의 발자국을 그려 넣은 자리에 도도하게 피어난 붓꽃.
그 옆에 싱그럽게 미소 짓는 해바라기.
경매사가 설명한 여러 이유 말고도 <꽃>은 앙리 마르소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배도빈이 <꽃>을 얼마나 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격 경쟁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입찰은 반복될 테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구칠 터.
아르센은 무엇이 앙리 마르소를 위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천만 달러 나왔습니다.”
노련한 경매사 아담 글래드스톤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크리스티의 전통적 경매 방식을 잠시 포기해서라도 <꽃>을 최대한 높은 가격에 팔고자 호가 권한을 노신사에게 넘겼다.
“상위 입찰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답을 찾지 못한 아르센은 고집스러운 고용주를 떠올리며 하는 수 없이 승부수를 던졌다.
배도빈에게 <꽃>이 그렇게까지 큰 가치가 없길 바라며 번호표를 들었다.
“1,200만 달러.”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혼란에 빠졌던 경매장이 다시 한번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배도빈이 고훈의 <꽃>을 천만 달러에 낙찰받았단 기사를 준비하던 언론인들은 새 문서를 열어야만 했다.
크리스티 최고의 경매사조차 놀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르센은 긴장한 채 <꽃>을 응시했고, 시장이 형성한 금액에 <꽃>을 구매하려던 배도빈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의아해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담 글래드스톤이 경매 상황을 멈추었다.
휴식 시간이라고 말하긴 했으나 신원이 확실치 않은 노신사가 정말 1,200만 달러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르센도 경매사의 뜻을 이해하고 기꺼이 일어섰다.
* * *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앙리 마르소는 어디에 있죠? 이번 경매에는 참여하지 않습니까?”
“마에스트로 배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따로 친분이 있습니까?”
“고수열 경! 손자분의 작품이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셨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미팅을 끝내고 경매장을 찾으니 기자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방태호가 나서서 기자들을 제지했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해도 시야가 가려져 알 수 없다.
“서리 밀밭 이후 최고 경매가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1,400만 달러를 넘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현재 1,200만 달러까지 입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앙리, 아이들 그리고 뱅크스와의 추억을 담았을 뿐인데 1,200만 달러라니 믿기 힘들다.
“너무 많아요.”
솔직하게 답하자 앞다투어 질문하던 기자들이 잠시 멈추었다.
덕분에 좀 살 것 같다.
“작가님도 예상 밖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경매사나 평단에서는 달리다 광장에서 보였던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수작으로 평가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그리긴 했죠.”
“미술과 대중을 연결한 상징적 작품으로도 소개되었습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시민상도 수상하셨는데 오늘 경매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나도 모르는 일을 대체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시민상은 들은 게 없어요. 주신다면 감사하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정리해 주었으면 싶다.
“고훈 작가의 꽃이 정당한 평가를 받은 건 미술 시장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크리스티의 고객 관리 최고 책임자 에드워드 제너가 나섰다.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크리스티는 고훈 작가의 요청에 응하여 오늘 경매 수익의 1할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바라는 고훈 작가의 뜻을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에드워드 제너의 말에 겨우 진정했던 기자들이 또 야단을 떨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몇몇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냈고 오늘 오후에 성명문도 발표할 예정입니다. 정말 뜻깊은 일이죠.”
이번 경매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더니 화제를 모으고자 작정한 듯 말한다.
“역사적인 자리입니다. 주인공이 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에드워드 제너가 기자들에게 길을 터 달라고 부탁했고 덕분에 한쪽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허허. 정신이 하나도 없지?”
할아버지가 무릎을 툭툭 다독이며 물으셨다.
“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제너 씨가 알아보러 갔으니 곧 알 거야.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린 것 같은데? 축하해.”
방태호가 미리 축하해 주었다.
경매장을 둘러보니 익히 아는 얼굴이 간간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친구 리처드 필립스도 있고 몇 번 인터뷰했던 기자들도 보인다.
배도빈과 최지훈도 있다.
“누구 찾아?”
“아니요.”
앙리는 정말 약속대로 오지 않은 모양.
“일이 재밌게 되었네요.”
에드워드 제너가 돌아왔다.
“1,200만 달러까지 입찰이 진행되다가 신원 확인을 위해 경매사가 잠시 경매를 중단했습니다.”
정말 1,200만 달러라니.
당시에도 말이 안 되는 금액이라고 떠들썩했던 <서리 밀밭>과 비슷한 가격이다.
“누가 누구와 경쟁이 붙었습니까?”
방태호가 나서서 물었다.
“마에스트로 배와 노신사인데.”
깜짝 놀라 시선을 옮겼다.
배도빈은 이 시끄러운 상황에 짜증이라도 난 듯 인상을 쓰고 있다.
“노신사?”
“방금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그쪽에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지만 작가님께는 괜찮겠죠.”
에드워드 제너가 주변 눈치를 보곤 귀에다가 속삭였다.
“앙리 마르소가 보낸 사람입니다.”
“…….”
“제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연락하셔서 신분을 드러내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와 B가 입찰 경쟁에 들어섰으니 이보다 좋은 이슈도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바닥으로 턱을 닫아준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인간이 진짜.”
“훈아, 잠깐만. 제너 씨,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스마트폰을 꺼내자 방태호가 말렸다.
“물론이죠. 이쪽으로.”
에드워드 제너를 따라 경매장 뒤쪽으로 향하자 앙리가 보냈다는 노신사가 나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앙리가 보냈어요?”
노인이 제너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군말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경매 자체가 화제가 되길 바라기에 노인의 부탁을 무시하고 내게 정체를 알렸으니 눈치껏 행동하는 것이리라.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처음 뵙는데. 앙리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아트 바젤에 오지 않겠다는 말이 진짜 몸만 오지 않는다는 말장난인지, 아니면 새빨간 거짓말인지 확인할 생각으로 물었다.
노인이 자책하듯 얼굴을 부여잡았다.
앙리가 무슨 짓을 했든 일단 그에게 고용되었으니 문책을 걱정하는 것 같아서 달려주려던 차.
노인의 얼굴이 뭉개져서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너무 놀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자 할아버지가 날 끌어다 앞을 가로막았고 방태호는 노인을 경계했다.
“하하. 놀라지 마세요.”
“아르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락없는 노신사였던 사람이 젊은 비서로 변했다.
꼭 뤼팽을 보는 것 같다.
“놀랐잖은가.”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안 온다더니 아르센을 보낸 거예요?”
상황이 이렇게 분명한데도 굳이 대답하지 않으니 참 충직한 직원이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은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방태호가 거듭 묻자 아르센도 더는 회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곧 앙리 목소리를 작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됐어.
“경매는 진행 중입니다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입찰 경쟁자가 배도빈입니다.”
-뭐?
“또 하나는 금액이 오른 탓에 크리스티 측에서 신분 증명을 요구하여 불가피하게 작가님 이름을 댔습니다.”
-어쩔 수 없지. 가격 때문에 연락한 거면 무조건 사.
“무조건 사긴 뭘 사!”
아르센의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방금 누구야?
“나다!”
아르센이 스피커폰을 켜 테이블에 놓아 편히 대화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이래요! 그렇게나 말했잖아요!”
-내가 네 그림을 사든 말든 뭔 상관이야.
“몇 번을 말했어요. 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빚 아니야.
“난 그렇게 느낀다고!”
-아르센.
“네, 작가님.”
-크리스티 쪽에 내가 네 명의로 참가한다고 전해. 전화로든 뭐든.
“알겠습니다.”
“참가하긴 뭘 해요!”
-이런 일로 너랑 왈가왈부하는 것도 지쳤어. 넌 시장에 그림을 내놓았고 난 정당한 과정으로 그걸 살 뿐이야. 끊어.
통화가 끊어졌다.
* * *
“뭐야?”
“왜 앙리 마르소가 저기 있어?”
경매장이 또 한 번 술렁였다.
단상 위에 마련된 스크린에 앙리 마르소가 나타난 탓이었다.
경매사 아담 글래드스톤이 상황을 정리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매를 진행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입찰을 진행하신 라울 씨께서 화가 앙리 마르소 씨께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고훈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으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를 찾았던 언론과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라울 씨가 입찰한 1,200만 달러부터 경매를 재개하겠습니다. 배도빈 씨께 의향을 여쭙.”
-잠깐.
앙리 마르소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었다.
-한마디 하지.
배도빈이 눈을 치켜떴다.
-그대가 저 그림의 가치를 모르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 어떤 사람도 나보다 저것을 소중히 여기진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포기해.
앙리 마르소를 아는 사람은 놀랄 정도로 정중한 태도였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꽃>을 포기할 생각 없으니 그만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배도빈에게 집중되었고 그는 관심 없다는 듯 경매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경매를 재개하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