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13화 (26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3화

55. 화룡점정(18)

순간 눈을 의심했다.

칠흑 같은 눈빛으로 관객을 압도하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 배도빈이다.

고루한 음악.

지겨운 음악.

심심한 음악.

클래식 음악을 향한 대중의 편견을 찢어발겨 기어이 가슴 깊숙이 전율케 하는 세기의 천재.

나 또한 그의 실황 영상을 본 후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즐겨 들었다.

크리스틴 노먼은 그와 작업한 경험을 최고로 쳤고, 그 까탈스러운 앙리마저 공연장을 찾아가 들으라고 추천했었다.

“그래? 난 괜찮은데.”

“묽어. 닭고기하고 따로 놀고.”

그런 배도빈이 카레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다.

대체 왜?

기이한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

배도빈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인상이 날카롭고 표정도 좋지 않아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긴다.

인사라도 건네고 싶지만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 당황한 경험이 있어서 보고만 있으니 함께 있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피아니스트 최지훈이다.

“누구야?”

“고훈.”

배도빈이 내 이름을 언급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니 시선을 옮겨 할아버지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배도빈입니다.”

할아버지가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으셨다.

“허허. 반가워요. 고수열이에요.”

서로 소개하는 걸 보면 구면은 아닌 듯한데 갑자기 인사를 걸어와 놀랐다.

할아버지도 의아한 눈치다.

“어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 그랬군요. 모친께서도 와 계시고?”

“아닙니다. 어머니께선 외부 활동을 하지 않으셔서.”

“그랬었죠. 아쉽게 되었습니다.”

“안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배도빈과 최지훈이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벌써 저렇게 컸구나.”

너무 당황스러워 멍하니 있으니 할아버지가 껄껄 하고 웃으셨다.

“어떻게 된 거예요?”

“유진희라고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 아들이란다.”

이름은 들어봤다.

어떤 외부 활동도 하지 않고 베를린에서 개인 갤러리만 운영하지만 그럼에도 대가로 손꼽히는 화가다.

“친하세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전시회 할 때 잠깐 만나긴 했는데 아주 예전 일이야. 예의로 해 준 말 같구나.”

황당해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볼 뿐이었다.

“훈아, 여기 사탕도 있다.”

사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음악가로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대한민국 최대 재벌가의 상속자이기도 한 그가 평범하게 다니는 게 신기하다.

“그냥 구경하러 온 걸까요?”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니? 모친도 화가니 미술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

“껄껄. 그렇게 신기해?”

“네.”

“그러고 보니 훈이가 베를린 필 음악을 즐겨 들었지. 말이라도 붙여보지 그랬어.”

“그러게요.”

* * *

배도빈과 최지훈이 식당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대단한 애였구나.”

고훈을 검색해 본 최지훈이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개인전을 연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휘트니 비엔날레 초청, 아르누보 공모전 준우승 등 이력이 화려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

“뭐라고?”

“그림 좋다고. 이번에 여기 참가한다고 해서 왔더니 만났네.”

배도빈이 조부 유장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고훈의 개인전을 관람한 조부가 <서리 밀밭>이라는 작품을 크게 칭찬한 적 있었다.

“그럼 그 애 보러 온 거야? 얘기라도 하지.”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생신 선물 사러 온 거야. 서로 불편하게 할 거 뭐 있어. 인사했으면 됐지.”

“히힛.”

최지훈이 배시시 웃었다.

“뭐야.”

“기특해서. 예전 말씀 기억하고 선물 드리면 기쁘시겠다.”

배도빈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럼 경매 참가하려고?”

“어.”

“엄청 비싼데? 서리 밀밭이란 작품은 1,400만 달러에 낙찰됐었대.”

최지훈이 스마트폰을 펼쳐 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

두 사람 사이에 주문한 음식이 놓였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생신 선물로는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경합이 세게 붙어서 그래. 일반적으로 그렇게까지 올라가진 않아.”

배도빈이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앙리 마르소가 경쟁하다가 가격이 치솟은 정황을 알려주었다.

두 사람 모두 최소 수십억 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력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악만 아는 줄 알았는데 미술 쪽 일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할아버지랑 어머니 덕에 관심 없어도 듣게 돼.”

배도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애는 좀 특별한 것 같고.”

“고훈?”

“어.”

조부를 통해 고훈의 그림을 찾아본 배도빈은 신선한 경험을 했었다.

마르소 갤러리에 전시된 <손님>은 특히나 그의 가슴을 울렸다.

반 고흐의 입장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손님>을 통해.

200여 년 전에 썼던 D단조 교향곡(합창)을 처음 들었을 때의 기분을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다.

“노먼도 마음에 들었나 봐.”

“아!”

최지훈이 크게 소리 냈다.

“왜 이래?”

“기암성 원화 그렸었지? 왜 지금 알았지?”

최지훈이 작년에 봤던 영화 <기암성>을 떠올렸다.

재밌게 봐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고훈이란 아이가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었다.

원화집까지 사놓고 깜빡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차기작도 참여했어.”

“칼리오스트로 백작?”

최지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이 <기암성>을 뤼팽 시리즈의 첫 번째로 소개하고, 두 편의 영화가 더 남았다고 말한 바 있었다.

얼마 전에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촬영에 들어섰다는 기사도 났었다.

눈앞의 둘도 없는 친구가 그 영화와 관련이 있기에 더욱 놀라웠다.

“OST 작업하기로 했잖아. 다시 만나겠네?”

“촬영 끝나고 들어가서 볼 일 없어.”

“아쉽다.”

“뭐가 아쉬워.”

“귀엽잖아. 그림도 잘 그리고. 포스터 의뢰도 받아주나?”

“글쎄.”

“초청해 볼까?”

“그러든지.”

무심한 답이었지만 그로서는 최선의 긍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최지훈은 어린 화가에게 공연 티켓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 * *

“네. 도착했습니다. 훈이 경매 곧 시작합니다. 네. ……전부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아르센이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위스 바젤로 출장 나온 그는 고용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세계 미술 포럼에 참석하는 앙리 마르소를 대신해 고훈이 내놓은 작품을 사들이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가만 안 있을 텐데.’

최근 만날 때마다 싸운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겨우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었거늘 고집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진 않을까 우려되었다.

‘별수 없지.’

노신사로 변장한 그는 차분히 경매장을 둘러보았다.

미술계의 큰손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무리도 아니지.’

오늘은 세계 최대의 미술 시장이라는 스위스 아트 바젤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날이었다.

묘사를 단순화하여 인물의 특징을 강조한 화풍으로 유명한 줄리안 피오.

과감한 붓 터치와 진정성이 느껴지는 색채감으로 사랑받는 고훈.

거기에 클림트마저 질투를 느꼈다고 알려진 에곤 실레의 작품도 경매에 오르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재력을 자랑하는 수집가도 있었고, 규모 있는 미술관에서도 찾아왔기에 경쟁이 치열할 듯했다.

아르센이 안내원 앞으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내원은 아르센이 내민 신분증을 명단과 대조하곤 번호표를 지급했다.

‘누가 사려고 하는지 파악해야 해. 어느 정도 재력을 갖췄는지도.’

숱한 경매장을 경험한 아르센은 참가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며 경매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작품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군.’

다만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매장답게 어떤 작품에 관심 있는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포기하고 자리에 앉으려던 차, 장내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배도빈이잖아.”

“여긴 어쩐 일이지?”

“마에스트로, 만나서 영광입니다.”

여러 사람이 웅성거렸고 몇몇은 입장한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기도 했다.

‘B?’

아르센의 시야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단주가 들어왔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손꼽히며 시가총액 약 1,700조 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그룹사 WH의 상속자인 터라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왜…….’

아르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배도빈을 관찰했다.

워낙 유명인이고 앙리 마르소가 좋아하는 음악가라 그에 대해서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만약 배도빈이 고훈의 작품에 입찰이라도 한다면 힘든 싸움이 될 터였다.

‘설마.’

아르센이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나이가 지긋한 경매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전통 방식의 경매를 추구하는 크리스티답게 경매사는 두 계단 위에 설치된 단상에 올랐다.1)

“미술 애호가 여러분, 반갑습니다. 경매사 아담 글래드스톤입니다.”

크리스티의 경매사가 나서서 시작을 알리자 참가자들이 박수를 보냈다.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을 표현하시는 분이죠. 줄리안 피오 작가의 아침에 걷기입니다.”

“오오.”

줄리안 피오 작가의 <아침에 걷기>가 공개되자 사람들이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정장을 입고 어깨를 축 늘인 채 걷는 중년.

전화 통화를 하며 뛰듯이 걷는 이.

커피를 들고 느긋하게 걷는 사람 등 도시의 아침에 볼 수 있는 장면이 동화(움직이는 그림)로 구현되어 있었다.

“걷는 행위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동시에 가장 개성적인 행동이기도 하죠. 작가는 도심 속 사람들의 특징을 걷는 행위로 잡아냅니다. 각자의 길을 걷는 이들을 담아낸 이 작품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군상이 아닐까 합니다.”

경매사 아담은 참가자들이 <아침에 걷기>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작가의 이름뿐만 아니라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느껴야만 경매가 건강히 진행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다만 그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참가자들을 관찰하며 누가 눈을 빛내는지 파악했다.

“이 감각적인 팝아트 작품의 시작가는 1만 달러입니다.”

아담이 말을 마치자 300여 명의 참가자 중 100명이 번호표를 들었다.

아담은 내심 쾌재를 불렀고.

아르센은 배도빈이 번호표를 들지 않음을 확인하곤 침을 삼켰다.

* * *

1)크리스티는 영국 전통 방식의 경매를 추구한다.

경매사는 권위를 갖추고자 높은 곳에서 주도적으로 경매를 진행한다.

경매사에게 호가 권한이 있기에 경매사의 재량과 감각, 카리스마가 중요시된다.

크리스티는 1978년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미술사학, 감정법, 미술행정 등을 가르쳐 경매사를 육성했고, 주도적으로 경매를 진행시켜 수많은 작품을 판매해 왔다.

크리스티의 가장 성공적인 경매 사례는 바로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 달러에 낙찰된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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