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12화 (26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2화

55. 화룡점정(17)

2030년 6월 16일.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미술 시장) 스위스 아트바젤이 개최된다.

VIP 입장일은 두 번째 날부터라 느긋하게 스위스로 갈 채비를 했다.

“작가님도 함께 가시죠.”

방태호가 마은찬에게 권했다.

“저는 괜찮아요. 하항.”

항상 밝게 웃던 그의 웃음이 조금 안쓰러워 보인다.

“작품 판매가 가장 원활히 이뤄지는 행사이니 활동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조각 프로젝트 보는 게 좋아서요. 아핳하. 감사합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구경할 작품이 많긴 하나 5일간 충분히 즐겼다.

더군다나 뮌스터에 살고 있는 마은찬은 추후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굳이 고집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다가 문득 너무 무심했단 생각이 들었다.

“쇼콜라티에 앞으로 초청권이 왔거든요. 비행기 티켓이랑 호텔까지. 그렇죠? 아저씨.”

방태호에게 눈치를 주었다.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 바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작가가 많은 줄 알고 여유롭게 보냈더라고요.”

“그냥 버리면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마르소 씨도 참여 안 하시니 어쩌지.”

방태호가 장단을 잘 맞춰준다.

“저, 저! 사실 엄청 가고 싶어요! 버리지 마세요!”

다행이다.

마은찬도 합류하기로 정하고 세탁 맡겼던 옷을 정리하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악.”

“녀석.”

“왜요?”

“왜긴.”

한 번 더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니 할아버지가 크게 웃으며 떼어 놓으려 하셨다.

지친다.

나이를 먹어 20~30대가 되어도 할아버지를 힘으로 이기긴 힘들 것 같다.

“하아. 하아.”

침대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기를 얼마간 할아버지가 다정히 부르셨다.

“훈아.”

“네.”

“할애비는 훈이가 자랑스러워.”

“저도요.”

“너도 네가 자랑스러워?”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요!”

할아버지의 농담이 황당해서 결국 웃고 말았다.

이틀 후.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트바젤에 관련한 책자를 읽었다.

바젤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는데, 할아버지는 벌써 잠드셨다.

“훈아.”

마은찬이 다가와 속삭였다.

“네.”

“이거 엄청 신기해. 의자 뒤로 안 넘겨도 누울 수 있다?”

마은찬이 좌석 조절하는 버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먹어요.”

애피타이저와 샐러드, 돼지고기 요리를 줬는데 입에 맞지 않아서 애피타이저로 나온 치즈 케이크만 먹고 있었다.

“이건 뭐야?”

“배고프다고 하니까 줬어요.”

“배고프다고?”

“형도 말해봐요.”

마은찬이 눈치를 보다가 승무원에게 치즈 케이크만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승무원이 미소로 대답하자 입을 벌리고 좋아한다.

“아무 때나 말씀드려도 되는 거야?”

“네.”

“나 여기서 살고 싶어.”

“저도요.”

서로 작게 웃었다.

“뭐 보고 있어?”

“아트바젤 소개하는 글이에요.”

“나 하나도 몰라. 비엔날레랑 달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같은 전시회랑 아트바젤 같은 아트페어가 어떻게 다른지 모른단다.

사실 나도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른지 잘 몰라서 소개하는 글을 읽고 있었다.

작품이 거래되는 일과 찾는 사람들의 단위가 다른 걸 제외하면 다른 전시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

쉽게 설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비엔날레가 패션쇼라면 아트페어는 백화점? 그런 느낌 같아요.”

“아!”

“알겠어요?”

“완전 알겠어. 아, 감사합니다. 잘먹겠습니다.”

마은찬이 치즈 케이크를 받으며 말했다.

“전 아트페어 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왜? 실험적인 건 비엔날레가 많잖아.”

“스위스 아트바젤엔 행사가 많대요.”

미식과 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기획 행사를 소개하는 부분을 가리키자 마은찬이 씩 웃었다.

“여기부터 갈 거예요.”

“네 작품 걸린 곳부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태호 아저씨가 잘 팔아줄 거예요.”

쇼콜라티에 이름으로 부스를 내서 내 그림 세 점과 앙리의 소품 두 점을 팔기로 했다.

전부 다 팔리면 좋겠지만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다.

뷰그레넬리 쇼핑몰과의 계약 때문에 참여하긴 했는데, 이후에 굳이 그림을 팔지 않아도 돈 벌 수단을 마련했기에 문제없다.

“산다는 사람이 생기면 인사만 하려고요. 그 전에는 어떤 작품이 있는지 구경하고 싶어요.”

“부자들 엄청 많이 오겠다.”

미술 작품이 보통 고가에 거래되니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많이 찾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호 아저씨는 마냥 그렇지도 않대요.”

“그래?”

“네. 진짜 부자가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대요. 대리인 보내고.”

“아. 그렇겠다.”

“방문하는 경우에도 얼굴을 보긴 어려울 거예요.”

방태호가 나섰다.

“그런 사람들은 엄청 주목받지 않아요?”

“그러니 더 조심하죠. 시끄러운 걸 싫어할 수도 있고. 보통은 따로 마련한 장소에서 작품 시안을 보고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럼 굳이 직접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시안으로 작품을 선택하면 실물을 프라이빗룸으로 옮겨서 보여주니까요.”

“헤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돈 많은 인간들의 머릿속은 이해하기 힘들다.

* * *

“짐은 호텔로 보낼게요. 저분께 드리면 됩니다.”

스위스 바젤에 도착하자마자 행사장으로 향했다.

상어 지느러미 색상의 거대한 건축물에 하얀 글씨로 Art Basel이라고 적혀 있다.

VIP 입장일이라고 해서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인파로 북적인다.

“부스부터 가보죠.”

“그래야지.”

방태호와 나는 판매자 신분으로 입장했고 할아버지와 마은찬은 VIP 티켓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마은찬과 다를 바 없이 놀라고 말았다.

밖에서는 그렇게 커 보였던 건물이 사람과 기둥,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도 움직이는 것, 천장에 걸어둔 것 등 너무나 다양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런 느낌은 휘트니 비엔날레 이후 처음이다.

“어! 줄리안 피오!”1)

마은찬이 오른쪽 기둥에 전시된 작품을 보고 소리쳤다.

여러 사람이 걷는 영상이다.

“알아요?”

“그럼. 엄청 유명하잖아.”

고개를 저었다.

미술계든 뉴튜브 세계든 유명하다고 소개받는 이는 정말 많은데, 정작 내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은찬이 작품에 다가가서는 귀를 기울였다.

뭔가 싶어서 따라 해보니 도시의 소음이 들려온다.

자동차 경적, 횡단보도 안내음,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 등.

인제 보니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도시의 한 장면을 단순화한 작품 같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한동안 줄리안 피오란 사람의 작품 앞에 서 있었다.

“정제된 그림이네요.”

“응!”

소감을 꺼내자 마은찬이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줄리안 피오 작품을 단순하다고만 하는데, 누구보다도 근원을 고민하는 사람이야. 생략하고 단순화해서 마지막에 뭐가 남는지 보여주잖아.”

같은 생각이다.

이 작품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섬세하게 묘사하진 않았다.

그러나 저 단순한 표현으로도 누가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이목구비조차 없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

“구경은 이따 하고 부스부터 가보자꾸나.”

할아버지 말씀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스로 향했다.

“대표님. 선생님, 훈아.”

쇼콜라티에 정일호 팀장이 반갑게 인사했다.

“좀 어때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어제부터 난리였습니다.”

부스를 준비하고 관리한 쇼콜라티에 직원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바빠서 안부를 물어볼 여유도 없이 고객을 대응한다.

“괜찮구나.”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부스를 둘러보셨다.

“너무 멋져요.”

황금색 해바라기와 붓꽃으로 꾸민 부스가 제법 인상적이다.

모던하다고 해야 하나,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하고 정돈된 다른 부스와 달리 아주 강렬하고 화려하다.

나나 앙리나 작업하느라 부스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꾸며주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고 구경할 수 있겠다.

“할아버지, 저 여기 가고 싶어요.”

“응?”

지도를 꺼내 미술과 미식 행사장을 가리키니 껄껄 웃으신다.

“이 녀석. 밥도 안 먹고 간식만 먹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꼭 가야 해요.”

요리는 미술 작품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해주는 예술이다.

미술과 미식의 결합이라니 가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별문제 없어 보이니 가보자. 마 작가도 어때요?”

“저는 작품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안 될 것 있나. 그럼 여기서 모이기로 하고 이따 만납시다.”

“네! 훈이 맛있게 먹어.”

마은찬과 잠시 떨어지고 방태호에게도 주변 구경한다고 알리곤 발을 옮겼다.

행사장으로 가면서 자세히 둘러보니 가격을 표시한 작품이 거의 없다.

“경매로 많이들 파나 봐요.”

“보통은 경매지.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 전부 달려든단다.”

세계 3대 경매회사가 모두 참가한 행사라니 스위스 아트바젤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정찰로는 안 팔아요?”

“그런 경우도 있기야 하지.”

한 작품만 경매, 두 작품은 정찰로 팔기로 했는데 조금 특이한 경운가 보다.

그러고 보니 앙리도 모두 경매로 내놓았다.

아무래도 경매장에 올리는 게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할 수 있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아.”

“허허.”

Art & eat(미술식) 행사장 입구에 거대한 초콜릿 분수대가 놓여 있다.

꿀렁대며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단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니,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훈아.”

할아버지가 부르셔서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가 초콜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바닥에 초콜릿을 잔뜩 묻혀 그린다.

역동적이다.

“너무 멋져요.”

“껄껄껄. 본 전시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구나.”

이곳 미술식장이야말로 내게는 본 전시다.

“피자도 있구나.”

황급히 시선을 옮기자 세상에나.

여러 종류의 파프리카와 치즈, 고기로 팝아트 작품 형상화한 피자가 여럿 놓여 있다.

심지어 뒤에서는 피자를 굽고 있다.

“한 조각 드릴까요?”

“네!”

직원이 피자 한 조각을 접시에 올려주었다.

잔뜩 기대하고 먹었더니 파프리카가 너무 많아서 맛은 별로다.

보기엔 좋지만 미식으로서는 좋지 못하다.

“왜? 맛이 없어?”

“독특해요.”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피자를 만드는 사람 앞에서 맛없다고 말할 순 없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어때?”

“3점.”

옆 부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훤칠한 남자가 잔뜩 인상을 쓰고 카레를 먹고 있었다.

* * *

1)줄리안 오피(Julian 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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