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7화
55. 화룡점정(12)
2030년 6월 11일.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개막했다.
양쪽 개막식에 모두 참여하기로 했기에 고훈은 어젯밤 카셀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아침을 먹었다.
“사람들이 많이 왔나 봐요.”
고훈이 이른 시간에도 북적이는 호텔 식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뮌스터까지 생각하면 훨씬 많이 왔을 겁니다.”
고수열이 동조했고 방태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그랜드 아트 투어의 해이기도 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개막이 8월로 연기되어 그랜드 아트 투어의 시작이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로 옮겨간 덕도 보았다.
“뮌스터가 가까워요?”
고훈이 물었다.
“응. 차로 2시간 정도 가면 돼. 오전 행사 참여하고 오후에 넘어갈 거야.”
방태호가 일정을 알려주었다.
양쪽 개막식 행사에 모두 참여하고자 일정을 오전과 오후로 나눴었다.
“여기도 구경하고 싶은데. 내일부턴 다른 일 없죠?”
“특별한 일은 없어. 뮌스터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면 돼.”
“이런 점이 좋은 것 같아요. 거리도 멀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볼 수 있으니까.”
두 미술제를 직접 취재하게 되어 들뜬 김지우가 빵을 뜯으며 말했다.
두 행사 모두 같은 날에 개막하여 100일간 진행되니 관광객이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레 양쪽 모두 찾을 수 있었다.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한쪽만 찾는 경우는 적으니 덕을 많이 봤죠. 카셀하고 뮌스터도 그걸 의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는 130만 명이 찾았다고 하던데.”
“그러니까요.”
하나의 미술 축제에 100만 명 이상 찾기는 쉽지 않았다.
미술 팬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기도 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미술 축제 휘트니 비엔날레조차 최근 행사에서 370만 명을 기록한 것이 최대치였다.
그러니 인구 30만 정도 되는 작은 도시를 100일간 130만 명이 방문한 것은 충분히 놀라운 수치였다.1)
“작가 이름에 기대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러니까요.”
“같은 생각이에요.”
고수열의 말에 김지우와 고훈이 맞장구쳤다.
참여 작가 명단을 공개하지 않다가 당일에서야 알게 되는 카셀 도큐멘타의 운영방식 때문이었다.
인기 작가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도 카셀 도큐멘타가 꾸준히 사랑받고, 방문객이 늘어남은 미술 자체가 시민들과 함께하게 되어감을 뜻했다.
고훈이 바라는 바와 같았다.
“그럼 좀 아쉽겠는데.”
“뭐가요?”
“벌써 기사가 떴어.”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펼쳐 테이블 가운데에 두었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했단 기사였다.
기사는 제목만 올라와 있어 급하게 작성한 듯했다.
[세기의 두 천재가 또다시 만나다]
[베네치아 공동관의 앙리와 훈, 카셀과 뮌스터에서도]
[또 한 번 우정 과시]
“빠르긴 빠르다.”
김지우가 감탄했다.
오늘 개막한 탓에 전시된 작품을 다 둘러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곧장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발견해 기사를 게시하니 기자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잡지사 기자 생활을 했지만 일간지 기자들의 시간 싸움은 좀처럼 따라가기 힘들었다.
김지우가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훈이 무관심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훈아, 이것 좀 봐봐.”
“봤어요.”
“안 기뻐? 개막식도 안 했는데 올라왔잖아. 대단한 거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단 건 시민들도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다만 모든 기사가 며칠 전 크게 싸우고 연락하지 않던 앙리 마르소와 자신을 엮고 있어 불쾌했다.
“하핫. 아직 화해 안 했어?”
“제가 잘못한 거 없어요. 하려면 그쪽이 먼저 해야죠.”
영문을 모르는 김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개막식이 끝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전시관을 둘러보거나 도시 곳곳에 자리한 작품을 찾아볼 여유는 없었다.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어쩔 수 없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개막식에도 참여하기로 했으니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그럼 전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김지우는 여기서 취재를 계속할 모양이다.
“어차피 뮌스터에 갔다가 돌아올 텐데 같이 가시지.”
“아하항. 약속이 있어서요. 천천히 둘러보고 싶기도 하고요.”
김지우가 쭈그려 앉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훈이 작품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고요. 이번에도 기대할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우가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인사했다.
예전처럼 기획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칼럼 작가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게 되었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창작자로서 충분히 공감하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김지우의 뒷모습이 씩씩하고 듬직하다.
“어? 이 기자님.”
“대표님? 아니. 선생님하고 훈이도.”
고개를 돌리니 이인호 기자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뒤로 젖혔다. 당황한 듯하다.
방태호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대한예술협회 일로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오래 알고 지낸 이인호를 낯선 땅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 취재 나오셨구나.”
“어. 그렇죠! 취재. 취재하려고 왔죠. 하하하!”
“껄껄. 요새는 신문사에서 직접 와서 취재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열정이 대단해요.”
할아버지도 이인호를 칭찬했다.
내 생각에도 성실한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대강 알아듣는다.
적당히 다른 사람의 기사를 문장만 바꿔 내는 게 아니라, 행사가 있을 때마다 취재 나오니 그 열정이 대단하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또 봅시다.”
뜻하지 않게 반가운 사람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여기서 이 기자를 다 보는구나.”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은 행사니까요. 유명한 작가들도 쉽게 접할 수 있고 기자님한테는 좋은…….”
“왜 그러나?”
방태호가 말끝을 흐리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훈이 작품을 아직 못 보셔서 그러나 싶어서요. 아니면 훈이도 참여한 걸 아직 모르시나?”
“음?”
“출품한 걸 아셨으면 인터뷰 요청을 하셨을 텐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항상 가지고 다니시던 카메라도 안 보이고.”
확실히 평소랑 달리 머리에 뭔가 바르고 있었다.
차림도 항상 입고 다니던 후줄근한 정장이 아니라 청바지에 흰색 면티로 가벼웠다.
반가웠던 우리랑 달리 당황한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아무튼 출발하세.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예.”
늦을 수도 있단 할아버지 말씀에 점심이 걱정되었다.
도착하자마자 개막식에 참가해야 한다면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는 뜻이다.
“개막식 1시였죠?”
“음. 가는 길에 샌드위치 같은 거라도 사야 하나.”
아침이라면 몰라도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울 순 없다.
점심은 풍요롭고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아저씨, 오래 안 걸리겠죠?”
“응. 금방 끝날 거야. 식순 보면 2시 30분까지로 되어 있던데.”
“그럼 끝나고 먹어요.”
“괜찮겠어?”
“네.”
* * *
“안녕하세요, 알렉스입니다.”
미술 관련 뉴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알렉스 우드가 뮌스터를 찾았다.
그는 방송용 카메라에 뮌스터 시내와 사람들을 담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여길 왜 왔냐?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열리기 때문인데, 와. 이게 뭐야?”
알렉스 우드가 한 조각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작은 정원에 기이한 형태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작품은 책을 펴서 앞으로 내보이고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색칠되어 있었다.
고풍스러운 주변 환경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어…… 솔직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네요. 이분은 여기 왜 있을까요? 이건 하트인가? 이건 왕관이고. 이건 돈인 거 같은데. 이 책에는 수학 공식이랑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얀 대리석 위에 색칠된 것이 너무나 난잡했다.
└현대인을 형상화한 거 아님?
└너무 복잡해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정보가 너무 많다. 아예 의도한 것 같은데.
너무 많은 정보를 얻어 기괴하기까지 한 현대인을 표현한 거 아니냐는 채팅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고개를 구독구독하게 됩니다.”2)
└뭐라는 거얔ㅋㅋㅋㅋㅋㅋ
└구독 유도하는 거?
└진짜 어이없넼ㅋㅋ 요즘 뭐만 하면 구독 아니면 좋아요 이야기야
“나 좀 먹고 살자. 제발 좀 눌러주면 안 돼? 요새 구독자가 줄고 있어! 늘진 않아도 줄진 말아야지!”
한 시청자가 요새 더 재밌는 방송이 많다고 하자 알렉스 우드가 폭발했다.
“뭐! 누구! 누가 나보다 더 재밌는데!”
미술 관련 채널을 오랫동안 운영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알렉스 우드가 버럭 소리쳤다.
└핑구 채널
└뱅크스
└장 프랑수아 미래
└고훈하고 장미래, 뱅크스는 ㅇㅈ이지.
└고훈 방송이 보기 편함.
└맞지. 훈이 방송이 자기도 배우는 입장에서 접근하니까 진짜 이해하기 쉬움. 자막 달리고 나서 꽤 많이 보던데.
└얼마 전에 구독자 50만 넘었음 ㅋㅋ 이제 알렉스랑 별 차이 안 남.
└장미래 채널도 진짜 재밌던데. 미술사 강의랑 자기 작업 과정 올리는데 영어로도 방송해 줌.
└뱅크스가 최고지. SNS에서 넘어와서 자기 작품 인증하고 시사 관련 문제도 얘기하는데 변조 목소리 개멋있음.
└앙리는 방송 안 하나?
└역시 우리 형이야! 질문 한 번에 3연패!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는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이래?”
└[조는 고양이 님께서 1달러를 후원하셨습니다]: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형 퇴물이잖아.
“이 자식 쳐 내! 강퇴해! 이게 날 뭘로 보고! 야, 나 여기 초대받아서 온 거야. 개막식 초청받았다고! 너희만 무시하지 나 어디 가서 이런 대접 안 받아! 알아?”
└[조는 고양이 님께서 100달러를 후원하셨습니다]: 이래도?
“맞죠. 퇴물이죠. 솔직히 저도 그런 생각에 베개 적시고 그랬어요. 감사합니다, 형님.”
평소처럼 열심히 방송하며 개막식장을 찾은 알렉스 우드가 감탄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미술계에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중계하러 나온 방송국도 여럿이니 감회가 남달랐다.
“와. 진짜 행사가 커지긴 했다. 제가 10년 전에 왔을 때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거든요? 아, 저기 앙리 마르소도 보이네요. 이번에 고훈이랑 같이 참가한다고 알려졌죠. 근데 오늘도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요.”
“실례합니다.”
행사 진행 요원이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행사 진행 중에는 카메라를.”
“아, 저 초청받고 왔어요. 촬영 허가받았는데. 저 모르시겠어요?”
알렉스가 크게 미소 지으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도 홍보가 필요하니 자신 같은 인플루언서를 초청했다고 판단했다.
직원이 알렉스를 빤히 보다가 따라 웃었다.
“죄송합니다. 귀하가 누구시든 사전에 약속한 언론사가 아니면 촬영은 힘듭니다.”
└ㅋㅋㅋㅋㅋ굴욕이닼ㅋㅋㅋ
└어디 겨우 60만 뉴튜버 주제에 방송을 해?
└빨리 죄송하다고 햌ㅋㅋㅋㅋㅋ
└아 창피해
└미치겠닼ㅋㅋㅋ 자기 못 알아보겠냐곸ㅋㅋㅋㅋㅋ 연예인병ㅋㅋㅋㅋ
└방송 망했죸ㅋㅋㅋ 개막식 중계 못 하죸ㅋㅋㅋㅋ
알렉스 팩토리 채널을 시청하던 구독자들이 즐겁게 웃는 사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 * *
1)2002년에는 65만 명. 2012년에는 90만 명을 기록했다.
2)오늘 이 드립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심히 고민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