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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306화 (26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6화

55. 화룡점정(11)

“아항하핳핰학.”

“뭐가 웃겨.”

“아하하하항.”

사랑스러운 멍청이가 고훈과 다퉈서 따로 돌아온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미셸 플라티니가 잔뜩 성이 난 앙리를 붙잡고 물었다.

“그래서. 흐흥? 훈이가 이젠 그림 안 준대? 그래서 이러고 있었어?”

테니스 코트 반대쪽에 테니스공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시끄러워.”

“코피는 안 났어? 이번엔 괜찮아?”

“입 다물라고 했어!”

“서러워서 어떡해? 흐흐흫흥?”

앙리가 미셸의 손을 떼어냈다.

작품을 사고파는 일과 친분 있는 화가끼리 작품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집안에 처박아 두고 홀로 간직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파리에서 제일가는 미술관에 전시해 줄 터인데 고훈이 왜 이리도 완강히 나오는지 앙리 마르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밤새워 싸운 끝에 결국 두 사람은 따로 파리로 돌아와 버렸다.

“나 정말 미치겠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미셸이 거듭 재촉했다.

고훈이 내건 조건을 앙리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정 그림을 사고 싶으면 개벽 프로젝트와 쇼콜라티에 활동을 중단하고 개인적인 친분도 다시 생각하자니.

두 천재가 싸우는 모양새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뭘 뭐라고 해. 헛소리 치우라고 했지.”

“훈이는?”

“계속 억지 부리고 있어. 빌어먹을 자식.”

앙리 마르소가 테니스공을 높이 던져 코트 반대편으로 강하게 내리꽂았다.

“억지는 네가 부리는 게 아니고?”

“뭐?”

미셸이 슬며시 웃으며 라켓을 챙겼다. 반대편으로 돌아가 코트에서 공을 밀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 훈이가 싫다는데 굳이 그래야 해?”

미셸이 자세를 취하자 앙리가 다시 한번 공을 위로 던졌다.

살짝 구부린 무릎을 펴면서 몸을 비틀어 라켓 스윙에 속도를 더했다.

높은 위치에서 회전이 걸린 서브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미셸이 바깥쪽으로 높이 튀어 오르려는 공을 백스윙 슬라이스로 강하게 밀었다.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공방이 오가다가 11구째에 마침내 앙리가 점수를 내주었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상대가 싫으면 강요야. 계속 그렇게 하다간 미움받을걸?”

앙리 마르소가 공을 높이 던져 서브를 넣었다.

한층 더 빠르게 회전한 공은 지면에 닿자마자 코트 바깥쪽으로 튀고 말았다.

“미셸.”

에이스를 따낸 앙리 마르소가 처음으로 본심을 꺼냈다.

“난 네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조차 싫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미셸이 다소 당황했다.

“누군가 말을 섞는 것도. 웃으며 말할 때는 더더욱. 다른 놈 그림을 오래 보는 것마저 싫다.”

“……그만해. 좀 무서워진다?”

“내가 잘못됐다고?”

앙리 마르소가 라켓을 내던지고 미셸 플라티니에게 다가갔다.

놀란 그녀와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물었다.

“넌 내가 다른 여자랑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정도가 다르잖아. 어떻게.”

“그 정도를 누가 정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외딴 저택에서 홀로 자라온 그는 누구의 간섭도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며, 하기 싫은 일은 누구도 강요하지 못했다.

어린 앙리 마르소는 빈 캔버스처럼 공허했다.

아들 부부의 죽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었던 조부는 손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앙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자신이 누구고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소년은 텅 빈 마음에 녹색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홀로 더 아름다운 녹색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조부가 죽고.

소년을 돌보기 위해 유모였던 셰리 가도가 저택에 들어온 뒤로 빈 캔버스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유모는 조부나 다른 사용인들과 달랐다.

앙리가 무엇인가를 해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칭찬했다.

평소와 같이 행동했을 뿐인데 몹시 혼냈고 그 뒤에는 꼭 안아주었다.

오직 녹색으로 가득했던 캔버스를 파랗게 물들였다.

앙리 마르소는 셰리 가도를 따르며 그나마 최소한의 인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채운 들판과 셰리 가도의 사랑으로 열린 하늘만이 소년의 전부였다.

그러던 차 셰리에게 진짜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앙리는 크게 충격받았다.

오랜 시간 녹색과 파란색으로만 가득했던 캔버스에 검붉은 물감이 쏟아진 것이었다.

셰리도, 그 딸도 미웠다.

본인에게는 오직 셰리 한 사람뿐인데 셰리에게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미셸을 적으로 여겼다.

미셸 플라티니도 앙리를 좋게 보지 않았다.

충분히 사랑받고 싶었던 소녀에게 앙리는 어머니를 빼앗아 간 재수 없는 놈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앙숙으로 여기는 건 당연했다.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싸워댔고 스포츠 경기로는 승부가 나질 않아 복싱 스파링을 빙자한 주먹 다툼까지 하게 되었다.

파리시가 주최한 고등부 복싱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었던 미셸 플라티니는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재수 없는 멍청이의 콧대를 박살 내 줄 기회라고 여겼다.

자신만만하기로는 앙리 마르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유산을 노린 이들에게 납치되어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스스로 몸을 보호하고자 여러 격투기를 익혔었다.

미셸은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빠른 몸놀림 사이로 틈이 보였고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한데 주먹을 내뻗을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누구보다도 미워할진대 그녀를 때리면 셰리가 슬퍼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링 위에 올랐지만 차마 결정적인 순간에 주먹을 뻗지 못해 매번 지고 말았다.

그 어떤 패배도 용납하지 못했거늘 그녀에게 지는 건 이상하게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때부터 앙리의 캔버스 위에 쏟아진 검붉은 물감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검붉은 물감은 파란색과 녹색 물감 그리고 채도 높은 빨간색으로 덧칠되었다.

“말해 봐. 그 정도를 누가 정하는데!”

앙리 마르소가 미셸 플라티니의 두 팔을 붙잡았다.

“앙리.”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어? 나 때문에 셰리가 집에 있지 못해서 싫었던 거 아니야?”

억센 손에 붙잡힌 두 팔보다 마음이 아팠다.

사랑스러운 멍청이가 이토록 솔직하게 감정을 내비친 건 처음이었다.

“내가. 이 내가 네 전부이고 싶은 게 잘못이야? 내가 널 가지고 싶은 게 잘못됐냐고!”

앙리 마르소는 진심으로 답을 구하고 싶었다.

하찮은 것들이 뭐라 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그가 미셸과 고훈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슴속 진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미셸이 뒤꿈치를 들어 입을 맞추자 그녀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야.”

미셸이 사랑스러운 멍청이를 안고 등을 쓸었다.

“잘못 아니야.”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사랑할 줄 모르는 그에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려줄 방법은 더욱더 사랑해 주는 일뿐이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미셸은 그를 힘껏 끌어안을 뿐이었다.

초원과 하늘.

심장이 요동치는 그의 캔버스에 따뜻한 햇볕이 찾아왔으니 밤이 드리운 것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멍청이라면 언젠가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처음 햇살을 느끼고 해바라기가 된 그의 시간이 흘러가길 바랐다.

* * *

“하하핫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한편 손자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고수열 또한 즐겁게 웃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제 그림 좋아해 주는 거 고맙고 기쁜데 이건 지나치잖아요.”

“하하핳.”

“할아버지.”

고훈이 지친 듯 하소연했다.

앙리 마르소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하지 않았던 터라 그 속도 모르고 웃는 할아버지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렇지. 마르소가 지나쳤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우리 훈이 마음도 모르겠구나.”

고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애초에 할아버지처럼 그림을 안 파는 이유가 개인보단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서가 아니냐.”

“네.”

“마르소가 작품을 가져가서 꽁꽁 싸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마르소 갤러리에 잘 전시되고 있으니 문제없잖으냐.”

“그거랑 다른 문제예요.”

“글쎄.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구나. 꼭 네 갤러리에 전시할 필요는 없잖니? 지금도 테이트 모던이나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고.”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돌렸다.

“앙리가 자꾸 제 그림 사들이면 그 사람한테 의존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싫어서 그래요.”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이미 너나 마르소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잖니.”

고수열이 손자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 영향을 받았단 건 <그림자>와 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고훈도 <총탄>에서 앙리 마르소의 구도적 감각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였고 <137년>은 아예 그와의 만남을 의식하고 이름 붙인 작품이었다.

“…….”

고훈이 말문이 막혀 가만있자 고수열이 상냥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화가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잖니. 할아버지는 훈이가 그런 쪽으로는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마르소는 왜 다를까?”

고수열은 타인을 선입견 없이 대하려고 노력하는 손자가 자랑스러웠다.

고훈은 따뜻하고 정겨운 말과 행동으로 항상 주변을 감화했고 망나니 앙리 마르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이가 더없이 좋아진 지금에 와서 거리를 두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쑥스러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손자가 말하는 여러 이유도 평소 하던 말과 조금씩 달랐다.

“그거야.”

대답하려던 고훈이 말을 멈췄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신 안에 모순된 마음을 인지한 탓이었다.

과거.

그는 몇몇 동료와 마음을 나누었지만 끝내 누구도 곁에 남지 않았었다.

다시 태어나서 부모님과 할아버지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고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모든 저주에서 벗어난 뒤에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고훈은 괜한 고집을 부려 동료 화가의 화풍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강요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선을 지키지 못했던 본인을 탓했다.

너무나 가까워서, 소중해서 진심으로 조언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1)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파탄되었던 여러 경험 탓에 그는 조심스러웠다.

누구나 사랑하지만.

소중해질수록 본능적으로 선을 그어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선을 놓지 않았던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앙리 마르소만이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

고수열은 고민에 빠진 손자를 그대로 지켜보았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그저 곁에서 바라봐 줄 뿐이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그것이 설령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도 믿고 응원해 줄 생각이었다.

* * *

1)빈센트 반 고흐는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라파드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했다.

라파드가 누드화를 그리면 옷을 입히라고 했으며, 수채화를 그리면 흑백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러다 라파드가 <감자 먹는 사람들>을 조롱했고 둘도 없던 사이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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