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5화
55. 화룡점정(10)
콘셉트 아트 작업물을 확인한 크리스틴 노먼과 네이선 에반스 미술 감독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암성> 때와 같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고훈이 기틀을 마련해 준 덕에 앞으로의 작업이 수월할 듯했다.
고훈이 20세기 초 근대 프랑스의 단면을 평면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았으니, 네이선 에반스 미술 감독 및 스태프들은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낼 차례였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생명과 이야기를 불어넣을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다.
“수고했어. 너무 멋진데?”
“기암성 작업하면서 모아둔 자료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감독도 나도 널 부르지 않았을 거야. 고맙다.”
네이선 에반스 미술 감독이 고훈을 거듭 추켜세웠다.
“이참에 아예 이쪽에서 계속하는 건 어때?”
네이선 에반스는 <세이버즈>를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리즈로 견인했던 고해성, 이수진 부부를 떠올리며, 고훈이라면 부모와 같이 활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크리스틴 노먼도 내심 바라던 바라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중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영화도 즐겁지만 쇼콜라티에를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고마워요.”
네이선 에반스의 제안은 고맙지만 고훈은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영화 <기암성>, <칼르오스트로 백작>, 다큐멘터리 <빈센트> 등 정해진 이야기를 옮기는 일도 즐거웠다.
그러나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와 감정, 메시지를 전할 수는 없었다.
동료 작가들, 아이들과 함께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꿔 나가는 일도 포기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전시회를 찾은 이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아쉽네.”
설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네이선 에반스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도빈이도 그렇고. 이 아이도 그렇고 어디에 소속될 그릇은 아니지.’
크리스틴 노먼 감독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품 안에 두기엔 너무나 큰 재능과 뜻을 가졌으니, 설사 스튜디오에 들어온다 해도 금방 떠날 터였다.
“그럼 내일 바로 가는 거야?”
노먼이 물었다.
“네. 11일이었죠?”
“응.”
고훈이 방태호에게 물어 일정을 확인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카셀 도큐멘타 모두 6월 11일에 개막하여 100일간 진행되었다.
개막식에 참여해야 하니 곧장 파리로 돌아가 이틀 쉬고 독일로 향할 계획이었다.
“참. 시간이 좀 남아서 하나 더 그렸는데 쓰진 못할 것 같아요.”
고훈의 말에 노먼과 에반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해진 작업을 수행하기에도 빡빡했을 텐데 무엇을 더 준비했다고 하니 의아했다.
“시간이 남을 리가.”
“자기 전에 틈틈이 그렸어요.”
고훈이 방태호에게 시선을 보냈다.
방태호는 자랑스럽게 캔버스를 꺼내 들어 노먼, 에반스, 앙리 마르소 앞에 고훈의 작품을 내보였다.
캔버스를 눈앞에 둔 순간 그들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아르센 뤼팽과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마주하고 있었다.
사브르를 경계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은 당장에라도 서로를 죽일 듯했다.1)
그 모습이 칼날 아래 맞닿은 두 사람의 입술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잔뜩 찡그린 이마와 미간을 지나.
칼날을 경계로 뤼팽의 앳된 하관이 드러나고.
잔혹한 눈동자로 뤼팽을 노려보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입술에 애정이 묻어나왔다.
칼날에 반사된 달빛이 너무나도 창백하여 두 사람이 다시는 함께할 수 없음을 암시하였다.
눈과 코까지는 섬세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여 거친 붓터치로 표현하였다.
명도가 낮은 색을 사용한 덕에 뤼팽과 칼리오스트로의 각오와 적의가 그대로 전해진 데 반해.
입술을 맞춘 하관은 온화하고 따뜻한 노란색 계열로 피부결마저 섬세히 묘사되었다.
서로를 모른 채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평생의 숙적으로 살아가게 된 비극적인 서사.
고훈은 소설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단 한 장면에 담아내고 말았다.
“이건.”
네이선 에반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장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려봤는데 영상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더라고요.”
고훈이 난색을 표했다.
사실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평소 그가 사물을 표현하듯이 감정과 이야기를 담아낸 일종의 추상이었다.
현실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노먼이 고훈과 그림을 번갈아 보다가 씩 웃었다.
“그릴 수 있는 건 뭐든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괜찮겠어요?”
고훈이 반갑게 되물었다.
일전에 노먼 감독이 그릴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촬영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색도 형태도 의도적으로 왜곡한 <정열>을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럼. 다만.”
노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훈의 <정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랑했던 날을 추억하던 뤼팽이 칼리오스트로의 칼을 막아낸 순간 칼날 뒤로 변한 칼리오스트로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변형은 좀 있을 거야.”
“노먼은 멋지게 활용해 줄 거라 믿어요.”
노먼이 작게 미소 짓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거 포스터로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네이선 에반스 미술 감독이 두 손바닥을 보이며 어떤 이견도 없다는 뜻을 보였다.
노먼이 그럴 줄 알았다며 고훈에게 제안했다.
“다른 선택을 해도 이걸 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포스터는 이 그림이야.”
“정열이에요.”
“정열. 좋네.”
제목을 곱씹은 노먼이 방태호를 보았다. 고훈의 매니저이기도 한 그가 나설 차례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방태호가 나섰다.
“계약은 콘셉트 아트에 해당하니 새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감독님도 훈이도 합의가 되었으니 문제는 금액뿐인데.”
복제, 배포를 포함한 사용권 일부를 허용하는 일이었다.
그림 원본 거래가 아니라 적당한 금액을 책정하기 힘들었다.
‘어쩌지.’
쇼콜라티에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자 여러 방면에서 정보를 취득하던 방태호는 노먼 스튜디오의 포스터 제작비도 알아본 적 있었다.
4만 달러에서 5만 달러 사이였는데, 고훈의 입지와 노먼 감독의 반응을 고려하면 그 이상을 불러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했다.
“40만 달러 어떻습니까.”
방태호가 평균 가격의 10배를 높여 불렀다.
노먼 스튜디오 측에서도 적당한 합의점을 찾으려 할 테니 우선 협상 시작가를 최대한 높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고훈과 네이선 에반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작품 원본을 거래할 때도 40만 달러라면 화제가 될 만한 큰 금액이었다.
고훈이 <서리 밀밭>을 기록적인 금액에 판매한 이력이 있다고는 해도 사용권을 넘기는 가격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액수였다.
“좋네요.”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훈과 네이선 에반스, 처음 제안했던 방태호조차 노먼의 대답에 놀라고 말았다.
“포스터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이에요. 이만한 포스터를 쓸 수 있다면 그 정도 비용이야 지불해야죠.”
“하. 하하.”
방태호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통이 큰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이 만든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
“기다려.”
방태호가 계약을 진행하려던 찰나 앙리 마르소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뭔가 문제라도?”
노먼과 방태호가 앙리 마르소를 의아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정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초간 분위기를 잡은 마르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사지.”
노먼의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 모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또!”
침묵 끝에 고훈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안 팔 거라고 했잖아요! 또 자기가 다 가지려고!”
“내가 사도 사용권만 팔면 되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젠 그림 안 판다고요. 전시할 거라고.”
“내가 전시해 줄게.”
“내 갤러리 두고 왜 당신 갤러리에 걸어요?”
“오지랖 부려서 공간도 얼마 없잖아. 나한테 넘겨.”
앙리 마르소가 고훈이 한국 예술인 조합과 쇼콜라티에 회원들에게 갤러리의 일정 부분을 할애해 준 일을 꺼냈다.
“돌아가면서 걸면 되니까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계약서 준비해 줘요, 노먼.”
“사용권 말고 작품을 사도록 하지.”
앙리 마르소가 제작자로서 요청하니 노먼과 에반스가 난감해졌다.
제작자의 요구를 무작정 거절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사용권 일부를 양도받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작품을 사들여 제작비를 늘릴 이유는 없었다.
“훈이도 팔 생각이 없고 굳이 제작 비용을 늘릴 이유가 있나요?”
앙리 마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정열>을 갖고 싶을 뿐이었기에 사회적 위치와 자금을 내밀었을 뿐 그가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인 근거는 없었다.
“……없던 일로 하지.”
* * *
또 똥고집을 부리나 했더니 웬일인지 순순히 물러났다.
노먼과 포스터 계약을 체결하고 행복하게 저녁을 먹는데 아니나 다를까.
잔뜩 삐진 티를 내고 있다.
식탁에 앉고 나서 줄곧 날 노려본다.
방태호와 마은찬이 눈치 보는 상황도 싫고 이대로 먹으면 체할 것 같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할 말 있으면 해요.”
말이 없다.
“그래도 안 파니까 빨리 먹어요.”
“왜.”
“말했잖아요. 전시할 거라고. 그만큼 가졌으면 됐지 얼마나 더 사려고 그래요?”
“착각하지 마. 네 거라고 다 사는 거 아니야.”
“파는 건 대부분 샀잖아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모르겠어요? 당신이 자꾸 내 그림 사면 당신한테 의지하게 된다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그리겠죠.”
“안 그럴 거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내가 돈 궁해지면 안 그럴 거 같아요? 나도 사람인데?”
앙리가 눈매를 좁혔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분명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저만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답답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와중에 한 번 더 마음을 가라앉혔다.
말과 행동은 짜증 나도 그가 내게 호의를 가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도 마찬가지고.
“내 그림 좋아해 주는 건 너무 기쁘고 고마워요. 그렇다고 독차지하는 건 아니죠.”
“남들 손에 들어갈 바에야 내가 가지는 게 나아.”
“다른 사람한테도 안 간다니까요?”
“그럼 내가 가져도 되잖아.”
“저…….”
마은찬이 끼어들었다.
“둘이 작품 이야기하는 거 맞죠? 그러니까 내 말은.”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앙리도 무시하자 방태호가 마은찬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밥 먹는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어 미안하던 차에 차라리 잘 되었다.
“전시할 거라고요.”
“도난당하면 어쩌게.”
“네?”
“작품 훼손되는 일 네 생각보다 훨씬 잦아. 미친놈은 더 많고. 내 미술관에서 관리해 줄 테니 넘겨.”
“하아. 그러니까 앙리 말은 밖에다 내놓기 불안하다는 거죠?”
“그래.”
이제야 이 인간이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아.
사랑받은 적이 없던 탓에 사랑하는 법을 몰라 집착하고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걸 보고 과보호라고 하는 거예요. 앙리가 고용한 사람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들은 일 못 할 것 같아요?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어요.”
“안 일어나.”
“그렇게 따지면 미셸은 어떻고. 밖에 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서 마르소 갤러리에 뒀잖아.”
“…….”
잠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정말 그 이유 때문에 미셸에게 마르소 갤러리를 맡겼다면, 이한나 작가의 소설에서나 나오던 미친 집착남이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거다.
“그럼 난요. 다른 사람한테 작품 팔기 그렇게 싫으면 어떻게 지냈어요?”
“그래서 쇼콜라티에 만들었잖아.”
갑자기 닭살이 돋고 말았다.
이 미친놈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 * *
1)Sabre. 펜싱용 칼. 찌르기와 베기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