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04화 (25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4화

55. 화룡점정(9)

영화 <칼리오스트로 백작> 콘셉트 아트 팀은 2주 만에 등장인물과 주요 장소에 관련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작업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덕에 소품과 세트장, CG 담당 직원들은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매일 새로운 일을 경험한 마은찬은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20세기 초 흑백 사진 몇 장을 토대로 소설 속 세계를 구체화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료는 한정되어 있지만 그들이 그리는 세계는 공기 하나, 빛 한 줄기마저 완전해야 했기에 마은찬을 포함한 콘셉트 아트 디자이너들은 소설의 열렬한 팬이자 역사학자, 과학자가 되어 작업에 임해야 했다.

마은찬이 추격전이 벌어지는 마을 전경을 완성해 고훈에게 보여줬다.

“매니저님! 이건 어때?”

“좋아요. 이거 위에서도 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응!”

벌써 다섯 번째였다.

고훈은 한 번에 수락하는 일이 없었다.

상상력을 총동원하고 고증 작업을 거쳐 그럴싸한 그림을 가져가도 꼭 몇 차례 다른 그림을 원했다.

그런 고훈의 일 처리 방식에 몇몇 디자이너가 불만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완성한 설정화는 노먼 감독에게 단 한 번도 반려되지 않았다.

덕분에 디자이너들도 고훈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팀은 이례적인 속도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마, 점심시간이야. 밥 먹으러 가자고.”

마은찬의 사수 역할을 하던 오스튼 브라운이 색연필로 작업하던 마은찬에게 다가갔다.

“벌써요?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마은찬이 고훈을 부르고자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자리에 없었다.

“매니저는 노먼 감독하고 회의 있다고 먼저 나갔어.”

점심시간마저 활용할 정도로 바삐 움직이니 마은찬은 어린 고훈이 걱정되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길에 오스튼 브라운이 마은찬에게 충고했다.

“이 바닥에서 컴퓨터 작업 못 하면 살아남기 힘들어. 매니저는 특별한 경우야.”

“맞아요. 포스트잇으로 수정하는 것도 지치더라고요.”

마은찬은 오스튼의 말에 백번 공감했다.

직접 그린 그림은 수정하기 힘드니 원본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 그 위에 덧그리곤 했는데, 컴퓨터로 레이어를 분리해 작업하는 사람에 비해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주 내내 포토샵 공부하고 있어요.”

오스튼이 잔뜩 인상을 썼다.

“어쩔 수 없으면 쓰기야 하겠지만 별로 추천하지 않아.”

“왜요?”

“용량이 커지면 제멋대로 꺼지거든.”

“자동 저장 기능 있잖아요.”

“저장할 때도 오류가 나는 게 문제지. 컴퓨터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최적화가 안 되어 있으니 쓸 게 못 돼. 모니터 부수고 싶지 않으면 호환성 좋은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찾는 게 좋아. 난 인피니티를 추천하지.”

“인피니티.”

마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에 음식을 담아냈다.

마주 앉아 식사하던 중 오스튼이 입에 음식을 쑤셔 넣는 마은찬을 말렸다.

“천천히 먹어.”

“시간이 없어요. 빨리 먹고 수정해야 해요.”

“점심시간은 1시간이야. 아무도 네게 밥 먹는 시간까지 일하라고 하지 않아.”

오스튼은 동양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매니저 고훈도, 신입인 마은찬도 자발해서 추가로 근무했다.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책임감은 좋지만 왜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일하려는 알 수 없었다.

“못 참겠어요.”

“못 참다니?”

“재밌잖아요. 그리는 거.”

마은찬이 고개를 들고 방실방실 웃었다.

홀로 작업하는 것도 좋지만, 여럿이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일이 퍽 마음에 들었다.

팀원들의 작업물을 한데 놓고 바라보면 정말 20세기 초 프랑스에 그런 곳이 있을 것만 같았다.

뤼팽과 칼리오스트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적으로 그려서가 아니었다.

버릇, 손동작, 억양, 취향 등 설정이 너무나 세세하여 어디에선가 살아가는 사람을 묘사한 것만 같았다.

“빨리 그리고 싶지 않아요? 완성된 거 보고 싶잖아요.”

오스튼은 자신이 지금까지 고훈과 마은찬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에 미쳐 사는 줄 알았거늘.

작업 자체를 즐긴다면 더 할 말이 없었다.

“체하면 그 재밌는 것도 못 하잖아. 점심시간만이라도 조금 여유를 가져 봐.”

“괜찮아요. 저 튼튼한 편이거든요.”

한편.

앙리 마르소, 노먼과 식사하며 의견을 나누던 고훈은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녁 때 봐요.”

“벌써?”

“다 먹었어요.”

노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서려는 고훈이 걱정되었다.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진행해 주나 너무 어린 나이에 무리하는 건 아닌지,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었다.

“거기 서.”

노먼이 고훈을 불러세우기 전에 앙리 마르소가 먼저 나섰다.

“할 말 있어요?”

“마저 먹고 가.”

“바빠요.”

고훈이 문을 열자 앙리 마르소가 소년의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빨리 그리고 싶어 안달이 난 고훈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노려보았지만 조금도 소용없었다.

앙리는 고훈을 의자에 앉히고는 직원에게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바쁘다니까요?”

“시간 충분해.”

“성도 남았고. 대치 상황도 그려야 해요.”

“마저 먹고 해도 안 늦어. 신경 쓰지 않으면 왜 항상 이 모양이야?”

“자기는.”

“그래서 고생하잖아.”

앙리의 말에 고훈이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평소에는 잘 지켜도 일을 시작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지 않고는 손이 근질근질해 배길 수 없으니 생활도 점차 망가지는데, 앙리 마르소도 그 탓에 간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앙리가 그것을 상기시켜주니 작업에 미쳐 있던 고훈도 과거를 떠올리곤 마음을 일단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시간 아직 남았는데. 그랜드 아트 투어 때문에 그래?”

노먼이 물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준비는 다 해놨으니까.”

“그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으니까요. 노먼도 마찬가지잖아요?”

노먼이 빙그레 웃었다.

그 마음만큼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 * *

밤 9시가 되니 어김없이 졸음이 밀려들었다.

뤼팽과 칼리오스트로의 키스 신 구도를 잡아야 하는데,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걸 어찌 표현할지 정하지 못했다.

고민이 깊어지고 무심코 정신을 차리니 방태호와 앙리 마르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잠들었던 모양이다.

“전시회나 판매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기 힘듭니다. 모두 훈이랑 마르소 씨와 같진 않으니까요.”

“계속해 봐.”

“해서 쇼콜라티에가 가교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이번에 마은찬 씨 일처럼요.”

“……외주를 받자는 말인가?”

“비슷하죠. 지금도 훈이 덕에 뷰그레넬리 쇼핑몰과 장기계약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브랜드 디자인이든 포스터든 일감을 가져와 자생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그렇게 생계가 유지되면 작가들도 본인 작업하기에 수월할 테고요.”

“쇼콜라티에 유지에도 도움이 되겠지.”

“맞습니다. 내일 훈이하고도 이야기 나누고요.”

방태호가 쇼콜라티에 운영으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특별한 소득 없이 나와 앙리가 투자한 돈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방태호 말대로 언젠가는 소득이 발생해야 한다.

전시회와 작품 판매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게 힘드니, 소속 작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거다.

마은찬에게 했듯이 말이다.

“갤러리 공간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훈아.”

거실로 나가자 방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안 잤어? 얼른 씻고 자.”

“졸다가 일어났어요. 이야기 조금 들었는데 전 아저씨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영화에 참여하는 것도 그리 좋게 보지 않던 앙리는 아마 부정적일 것이다.

“그편이 낫겠지.”

앙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외다.

“왜.”

“싫어할 줄 알았어요.”

“기업이야. 이상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있어. 그리고 네가 하는 걸 보면 영 이상한 일도 아니고.”

<총탄>을 떠올리며 말하는 것 같다.

영화 작업을 하며 완성한 그림도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표는 당신이야. 방향을 정했으면 휘둘리지 말고 제대로 해.”

마르소가 평소대로 건방지게 요구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일이면 누가 뭐라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사람이나, 일단 방태호를 쇼콜라티에의 대표로 인정하고 있다.

“하하. 알아본 곳이 있죠. 일단 SNBA랑 파리 오케스트라가 사람을 구하고 있더군요.”

“SNBA?”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라면 앙리하고도 연이 깊은 곳이다.

“새 공모전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넉넉한데, 홍보 수단을 찾고 있다고요.”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공모전인데요?”

“아르누보 공모전처럼 인기 작품을 선정하는 거야. 방송도 겸해서 축제처럼 꾸밀 생각인가 봐.”

“벌써 외부로 알릴 단계는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조직위가 생겼으니까요. 관심 있게 찾다 보니 알게 됐죠.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로 보도되지도 않은 일을 내부자도 아닌데 알고 있다니.

관심 있는 정도로 알 수 있는 일인가 싶다.

“4년마다 한 번씩 열 거야. 아직 준비단계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 오케스트라 대전처럼 운영할 계획이라더군.”

앙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4년에 한 번 전 세계 미술가가 모인다면 정말 미술 올림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은요?”

“콰드리엔날레 오브.”

“그게 이름이에요?”

“그래.”

4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술전(Quadriennale: 콰드리엔날레)의 이름이 새벽(오브: aube)이라.

개벽과 유사하게 지은 걸 보니 앙리의 노림수 같다.

“앙리가 지었어요?”

“셰바송 영감 생각이야.”

“개벽으로 참가하기 좋겠네요. 앙리도 할 거죠?”

“당연하지.”

앙리가 날 빤히 보다가 경고했다.

“아직 한참 남았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지금 일이나 신경 써. 11시야. 빨리 자.”

“그러지 않아도 자려고 했어요.”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앙리가 또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한두 번 하더니 이젠 아주 버릇이 되었다.

“무슨 짓이에요.”

“씻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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