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3화
55. 화룡점정(8)
“후.”
오랜만에 소설에 몰입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처럼 졸음이 밀려들었다.
소설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여물지 않았던 뤼팽이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끝내 그녀를 몰락시키며 마무리된다.
뤼팽에게 패배한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뤼팽에게 복수를 다짐하는데, 이것이 2편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복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읽고 싶지만 눈꺼풀이 무겁다.
일단 자고 생각하기로 하자.
“훈아, 훈아.”
얼마나 잤을까.
“밥 먹어야지.”
비몽사몽한 가운데 방태호의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밥.”
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방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제대로 못 잤어? 이 시간까지 못 일어나고.”
“소설 읽느라 늦게 잤어요. 몇 시예요?”
“1시. 방에서 먹을래?”
“네.”
눈을 감았더니 금방 또 잠들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고는 세면대로 향했다.
“앙리랑 은찬이 형은요?”
“마르소 씨는 아침에 어디 가셨고 은찬 씨는 같이 먹는다고 기다리고 있었어. 불렀으니 올 거야.”
“은찬이 형 밥은 저랑 같이 부탁드릴게요.”
“오케이.”
아예 샤워를 할까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세수하고 이만 닦았다.
시간을 아낄 겸 밥이 올 때까지 준비해 온 자료를 들추고 있으니 마은찬이 문을 두드렸다.
“잘 잤어?”
“네. 형은요?”
“나도. 침대 진짜 푹신하더라.”
“다행이네요.”
“나 어디서든 잘 자는 편인데 이렇게 좋은 호텔이면 못 자는 게 이상하지.”
시차에도 적응해야 하고 달라진 환경, 처음 하는 일 등 예민해질 만한데 크게 영향이 없는 모양이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그런데 이게 다 뭐야?”
마은찬이 근대 프랑스 복식 자료와 <기암성>에서 다뤘던 설정화, 프랑스 옛 고성 사진첩에 관심을 가졌다.
“참고할 거요. 어제 소설 읽었는데 필요할 만한 거 미리 분류해 두려고요.”
“히이. 그걸 하루 만에 다 봤다고? 못 잤겠는데? 정말 잘 잔 거 맞아?”
“괜찮아요.”
파릇파릇한 몸이라 금방 회복한다.
“자꾸 그러면 안 돼. 내가 선생님께 혼나.”
“한 달 만에 바짝 해야 하니까요. 그 뒤엔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요.”
“그렇긴 해도.”
미술 행사를 돌아다녀야 해서 시간이 촉박하나 그렇다고 못 할 정도로 부담스럽진 않다.
주요 장면을 대부분 담당했던 <기암성> 때와는 다르게 디자이너들이 참고할 기준점만 마련하면 된다.
“이걸 다 확인하는 거야?”
“이걸로는 부족해요. 아마 일주일은 자료 찾고 정리해야 할 거예요.”
마은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직원이 테이블에 음식을 차례로 놓아주었다.
“뉴욕 스테이크, 피칸 페스토 파스타입니다. 이쪽 샐러드는 토마토 양파 드레싱이나 발사믹 소스 중 취향에 맞는 것과 곁들어 드시죠.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고마워요.”
방태호가 팁을 주며 호텔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스테이크가 세 접시, 파스타가 세 접시, 샐러드가 큰 바구니에 가득 있고 친절하게도 과일까지 가져다주었다.
“누구 또 와요?”
마은찬이 식탁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뇨?”
“그럼 이걸 누가 다 먹어?”
“저랑 아저씨랑 형이요.”
스테이크 두 개를 챙기고 파스타도 챙기자 마은찬이 눈으로 음식을 좇는다.
미어캣 같다.
방태호도 자기 몫으로 파스타 하나를 챙기면서 마은찬에게 식사를 권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아뇨. 저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마은찬이 본인 몫으로 내몰린 스테이크와 파스타 한 접시를 보며 난감해한다.
“남겨도 괜찮으니까. 훈이가 은찬 씨 잘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샐러드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
올리브, 아보카도, 양상치, 파프리카 같은 것들이 입 안에 한데 어우러져 아주 재밌는 식감을 내는데.
토마토와 양파로 달짝지근하게 만든 소스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마치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보는 듯한 색채감이 느껴진다.
입에 음식이 있는데도 계속 먹고 만다.
“잘 먹겠습니다.”
마은찬이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기뻐할 줄 알았거늘 표정이 굳은 채 턱만 천천히 움직인다.
“입에 안 맞아요?”
“아니?”
마은찬이 한 입 더 먹곤 마침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환희에 찬 저 눈빛을 보아하니 맛이 괜찮은 것 같다.
“이, 이거 대체 뭐야? 뭐예요? 고기가 어떻게 이래요?”
“채끝 부위일 거예요.”
나도 한우를 시작으로 현대 소고기의 매력에 푹 빠졌었는데, 마은찬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나. 나 이런 거 처음 먹어 봐. 진짜 너무 맛있어.”
“많이 먹어요.”
“응! 왁! 음. 음~ 너무 맛있어! 너무 맛있어요, 대표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마은찬이 방태호에게도 스테이크를 권했다. 웃으며 거절해도 기어이 한 절음 썰어 넘겨준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쁨을 옆 사람과 함께 나누려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괜찮겠지.’
가난하다고 해서 꼭 불행한 건 아니다.
돈이 궁한 사람이 비참해질 때는 자신이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일을 보거나 경험했을 때다.
알지 못했을 땐 욕심 나지 않던 게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이상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나 또한 그랬고 어쩌면 마은찬도 오늘 밤에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의 따뜻하고 맑은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저런 사람이라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가고 싶은 쇼콜라티에로 들이고 싶다.
“쇼콜라티에에 들어오면 매일 먹을 수 있어요.”
“어?”
마은찬이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굳어버렸다.
방태호가 싱긋 웃고는 거들었다.
“훈이랑 마르소 씨가 함께 만든 회사예요. 에이전시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그보단 화가 공동체에 가깝습니다.”
“어……. 지금 저 스카웃하시는 거예요?”
“훈이가 은찬 씨 작품을 좋게 보더라고요.”
좋지 않았으면 이번 일에 초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조금 비겁하지만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미국에 함께 온 다음 날, 맛있는 걸 먹이며 이야기하고 있다.
“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요. 짜장면은 좀 힘들지만 포테이토 피자는 얼마든지 제공할게요.”
“피자?”
“음식이야 원하는 걸로 대체할 수 있죠.”
방태호가 내 앞에 샐러드를 덜어주었다.
포테이토 피자 말고도 초콜릿이나 타르트 같은 간식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말하려던 차였는데, 일단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한 식감과 달짝지근한 소스가 또 한 번 팔레트처럼 펼쳐졌다.
“작품을 판매하거나 전시회 등으로 수입을 올리기 전까지는 재료비 명목으로 매달 일정액을 드립니다. 물론 수익이 나면 10퍼센트를 나눠야 하지만요. 은찬 씨가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맞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방태호가 대신해 주기에 맞장구만 쳤다.
“어.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하. 그럼요. 저도 당장 대답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이번 일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대학은 졸업할 생각이시잖아요? 이후 일이 될 겁니다.”
“대학…….”
마은찬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입에 꾸역꾸역 고기를 넣었다.
저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이 샐러드를 도저히 그만 먹을 수 없다.
“합.”
“대표님, 대학 졸업해야 할 수 있나요? 쇼콜라티에.”
“꼭 그렇진 않죠. 그렇게 따지면 훈이는 아직 입학도 못 했잖습니까.”
입에 음식이 가득 차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 그럼 저 하고 싶어요! 어차피 대학 다니면서 돈 벌고 그러는 거보다 큰형님이랑 훈이 곁에 있는 게 훨씬 공부가 될 것 같아요.”
맞는 말이다.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있기도 하지만 현장보다 나을 순 없는 법.
이미 기본이 다져진 마은찬에게 필요한 건 경험뿐이다.
“하하. 너무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갤러리 완공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부모님이 기회가 올 때 잡으라고 했어요. 기회인 줄도 모르고 어버버대지 말고 찾아왔을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붙잡으라고 하셨어요.”
훌륭한 분이시다.
“하핳핫. 알겠습니다. 일단 식사 마저 하고 계속 얘기해 보죠.”
* * *
대학도 중요하지만 마은찬은 한시라도 빨리 미술계에 몸을 담고 싶었다.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탓에 대학은 그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는 매달 1,500유로를 지급해 드립니다. 다만 말씀드렸다시피 판매 대금이나 전시회 등 수익이 나면 그중 10퍼센트를 나누게 되고요.”
수수료가 겨우 10퍼센트라니.
업계 계약 관계를 상세히 모르는 마은찬으로서도 쇼콜라티에의 계약 기준이 작가 친화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또 가끔 부탁을 드리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요?”
“달리다 광장이나 뷰그레넬리 쇼핑몰 그림 알고 계시죠?”
“네.”
“그런 일처럼 공공적인 업무도 있을 테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생길 겁니다.”
“문제없어요. 저 애들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마은찬이 시원하게 웃었다.
“확고하시네요. 그럼 이번 일 마치고 계약 진행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마은찬이 방태호와 악수를 나누고 고개를 돌렸다.
고훈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줄곧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마은찬이 고훈에게 다가가 한동안 어떻게 일하는지 살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훈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네.”
“어. 서리 밀밭 엄청 비싸게 팔렸잖아.”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고훈이 눈만 깜빡거렸다.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너라면 비슷한 가격에 작품 더 팔 수 있을 텐데. 어쩌면 더 비싸게도.”
“네.”
“근데 왜 안 그래?”
마은찬은 홀로 작업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고훈이 굳이 작품을 판매하지 않는 게 의문이었다.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짓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였으면서도, 끝끝내 <서리 밀밭> 이후로는 작품을 판매하지 않았다.
뉴튜브 채널을 운영한다든가 전시회, 화집 판매, 공공 작업, 영화 일 등으로 수익을 대체했다.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앙리가 없었으면 그 가격에 팔릴 리 없었을 거예요. 그 사람 제 그림이면 사족을 못 쓰니까요.”
“크흥. 그런 것 같더라.”
“아마 팔았으면 못해도 수십억은 더 벌었겠죠. 하지만 앙리에게 의존해서 돈을 벌고 싶지 않았어요.”
“……왜?”
“앙리가 제 그림을 마음에 안 들어하면 수입이 끊길 테니까요. 그럼 저는 그 사람이 원하는 그림만 그리게 될 테고.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아요.”
“큰형님 말고도 네 그림 사고 싶은 사람 많잖아.”
“같은 이유예요.”
고훈이 근대 프랑스 사진 자료집을 내려놓았다.
“목적이 달라요. 돈을 목적으로 그림을 했으면 아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을 거예요.”
“응.”
“제 마음대로 작업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그것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안 되니까 저를 좋아해 주는 분들을 찾는 거죠. 제 그림을 소유하지 않아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요.”
알 것 같기도 했다.
열렬한 구매자나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면 경제적으로는 편하겠지만, 눈치를 안 볼 순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마음 좋은 사람이라 자유롭게 활동하게 해준다고 해도 작가 스스로 족쇄를 느낄 터였다.
후원이 중단되면 어쩌지.
더 이상 작품을 사 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 속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 전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예술적으로 엄청 대단하게 느끼거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냥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그렇게 서로 위로하며 살고 싶어요. 제겐 그림이 수단인 거고요.”
“알 것 같아.”
왜 굳이 편한 길을 두고도 돌아가려는지 알 것 같았다.
예술은 긴 역사를 통해 권력에서부터 벗어나 자유를 갈구해 왔었다.
지금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분리해서 보지만, 고훈의 말을 들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대중과 함께하는 예술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예술이었다.
“그리고 저 그렇게 돈 못 버는 것도 아니에요.”
“어?”
고훈이 씩 웃고는 다시 자료집을 보았다.
이번 영화 작업 참여로 100만 달러와 러닝 개런티 1%를 약속받은 걸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