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2화
55. 화룡점정(7)
마은찬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항상 활기차게 웃고 다니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대표님!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할아버지, 방태호 그리고 내게 차례로 인사한다.
매니저님이라니. 부담스럽다.
“껄껄. 어서 와요. 마 작가.”
마 작가란 호칭에 감격한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할아버지께 연신 고개를 숙인다.
방태호가 나섰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바로 출발해도 괜찮겠어요?”
“네! 문제없어요! 저 건강한 편이라서요!”
전혀 아니다.
오리엔테이션 때만 해도 그나마 괜찮아 보였는데, 안 본 사이에 도로 핼쑥해졌다.
비엔날레 준비하며 고생한 듯하다.
“왜?”
빤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마은찬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몸은 건강하지 않지만 기운만은 누구보다도 왕성해 보인다.
“너무 말랐잖아요. 밥 제대로 먹고 있어요?”
“그럼. 요샌 고기도 먹는걸.”
“고기?”
“커리부어스트.”
소시지에 소스와 커리를 곁들어 먹는 길거리 음식으로 알고 있다.
그런 걸 고기라며 영양을 충분히 챙긴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런 걸로 안 돼요.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마은찬이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는다.
잇몸이 다 내려앉는 바람에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던 나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몸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충분히 자고 잘 먹어야만 한다.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먹여야겠다.
“그럼 다녀오너라. 전화하고.”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그럴게요.”
“말만 그러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해. 무슨 일 있어도 꼭 방 대표하고 같이 다니고.”
최근 한국 예술인 조합 일로 바쁘신데 굳이 함께하시겠다고 하셔서 설득하는 데 애먹었다.
이젠 다 컸으니 걱정 말라고 말씀드려도 겨우 13살이라고 하시니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는데, 앙리가 같이 간다고 하자 안심하셨다.
가끔 보면 방태호보다 앙리를 더 신뢰하시는 것 같다.
“다녀오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께 인사하고 격납고로 향했다.
석 달 전만 하더라도 피폐했던 앙리는 베네치아에서의 일이 잘 풀렸는지 멀쩡해져 있었다.
다행이다.
“왔냐.”
“일이 잘 풀렸나 봐요.”
“당연하지.”
엄청 고생했으면서 센 척한다.
“안녕하세요, 형님!”
마은찬이 허리를 숙이며 크게 인사해서 나도 앙리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하항. 친해지고 싶어서요.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한국에서는 친동생이 아니라도 나이 차가 많으면 그렇게 부르거든요. 존경하는 의미로.”
마은찬이 방실방실 웃자 마르소가 잔뜩 인상을 쓰고 날 보았다.
“진짜야?”
“그런 거 같아요. 왜 전에 본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불렀잖아요.”
“야인들의 시대?”
앙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예전에 같이 본 드라마 제목을 떠올렸다.
분명 조연들이 주인공을 큰형님 또는 오야붕으로 불렀었다.
“오야붕이라고 해.”
“네! 오야붕!”
“자, 잠깐. 그건 아니지.”
방태호가 나서서 말리자 마은찬이 입을 크게 벌렸다.
“참. 그쵸. 이 시국에.”
“시국?”
“큰형님이라고 할게요!”
마은찬이 냉큼 고개를 푹 숙이자 앙리도 더는 말하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
마은찬의 밝은 기운과 친화력 덕분인지 아니면 앙리에게 마음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몰라도 좋은 일이다.
“불한당에 오야붕. 이러면 훈이 이미지가…….”
방태호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잘 듣지 못했다.
* * *
한숨 푹 자고 밥 먹고.
또 자고 일어나니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사우스 웨딩튼 공원 근처에 있는 노먼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네이선 에반스 미술 감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노먼은 선명했던 금색 머리카락이 좀 더 밝아졌고 에반스는 그대로다.
“노먼.”
“훈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방태호, 앙리와도 인사를 나눈 노먼이 마은찬도 환영해 주었다.
“이야기 들었어요. 반가워요, 미스터 마.”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뼈를 묻는 심정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은찬이 악수한 채로 고개를 연신 숙였다.
처음에는 다소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도 그렇고 아직 어리기도 한 마은찬은 제대로 된 직장에 다녀본 적 없었다.
그러니 2030년 기준 미국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조차 과분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더욱이 거장 크리스틴 노먼을 돕는다면 경력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 줄곧 생활고를 겪었던 그에게 월 2,500달러가 얼마나 소중할까.
저리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사망자가 나오는 건 사양할게요.”
“네! 안 죽겠습니다!”
기운찬 마은찬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영화와 관련해서는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잘 맞을 것 같네요. 말도 잘 통하고.”
독일에서는 직장이나 대학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단다.
다행히 마은찬도 독어, 영어에 익숙해서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도착하자마자 일 이야기라니 역시 노먼답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자 직원 대본을 나눠 주었다.
영화 타이틀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부제로 칼리오스트로 백작이라고 적혀 있다.
“아.”
처음 보는 제목인데 마은찬은 아는 눈치다.
“읽어본 적 있어요?”
노먼이 묻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조금만 더 하면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네. 무슨 영화 할지 몰라서 연락 받고 뤼팽 시리즈 전부 읽었거든요.”
노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도 내심 놀랐는데, 의욕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요? 어떻게 읽었는지 들려줄래요?”
“대도 아르센 뤼팽의 시작이자 가장 큰 적이 등장하는 소설이었어요. 뤼팽 시리즈의 메인 스토리는 분명 칼리오스트로 백작이에요.”
노먼이 턱을 괴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마은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은찬은 손짓 발짓 다 써가며 세계적인 거장에게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아르센 뤼팽이 대도둑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가 아직 햇병아리였을 때 인민재판을 받는 한 여성을 구출했는데 그녀가 바로 칼리오스트로 백작.1)
마은찬은 그녀야말로 아르센 뤼팽 최대의 숙적이라고 했다.
“칼리오스트로에게 물건 훔치는 법이나 남을 기만하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마은찬은 신을 내며 칼리오스트로를 설명했다.
너무나 아름다우나 자기애가 너무 강하고 가끔 소시오패스처럼 보인다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앙리를 쳐다보고 말았는데, 방태호와 노먼, 에반스도 마찬가지였다.
“뭐.”
“앙리가 하면 어울릴 것 같아서요.”
“웃기지 마!”
그동안 놀려도 별 반응이 없었는데 오늘은 예전처럼 버럭 소리친다.
재밌다.
“마르소 씨만 괜찮다면 오디션 보실래요? 응하신다면 배역을 남자 역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 볼게요.”
“쓸데없는 말 그만하지.”
한번 웃고 나서는 설명을 마저 들었다.
칼리오스트로와 함께 보물을 찾아 떠난 아르센 뤼팽이 칼리오스트로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 계기로 그녀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은찬이 말을 잘해서 그런지 재밌을 것 같다.
“정말 세세하게 기억하시네요.”
“부모님이 남의 돈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노먼이 씩 웃었다.
“기암성과 같이 근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할 거예요. 이미 구축해 놓은 세계관이 있으니 큰 줄기는 기존 데이터를 따르면 되지만.”
노먼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세부적인 건 잘 부탁할게.”
“네.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들어보니 칼리오스트로란 인물을 조성하는 게 가장 핵심일 것 같다.
차림은 어떻고 행동은 어떠한지 같은 세세한 설정을 잘 표현하고, 각 장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일 구도를 고려해야 한다.
“미스터 마도 매니저를 잘 도와주길 바라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략적인 일정까지 확인하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앙리를 보며 말했다.
“앙리도 같이하는 거죠?”
“내가 왜.”
“아니에요?”
영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올 이유가 없다.
앙리가 나를 아무리 좋아해도 고작 보호자 노릇이나 하자고 파리에서 LA까지 올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이번 영화 제작자신 걸.”
노먼이 앙리를 대신해 설명해 주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영화 콘셉트 아트 일을 하는 것도 못마땅해하던 사람이 이번 일에 크게 투자했다니 믿기 힘들다.
“영화 안 좋아했잖아요.”
“프랑스 문학 부흥을 위한 일이야.”
“거짓말.”
<기암성> 때도 같은 말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노먼 감독의 회유에 넘어가서 투자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제작 전반에 관여하는 모양이다.
“난 거짓말 안 해.”
내가 본 사람 중에 거짓말을 가장 못 하는 사람이긴 하다.
“그렇기야 하죠.”
“그래.”
* * *
[앙리 마르소, 크리스틴 노먼 감독 신작에 1억 달러 투자!]
[고훈 노먼 사단 합류]
[고훈, “원작 소설을 잘 담아낼 것.”]
[앙리 마르소, “기암성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했다.”]
프랑스 예술가 앙리 마르소가 <칼리오스트로 백작(가제)>에 거액을 투자하며 영화 제작자로 활동한다.
줄곧 제작과 감독을 함께 맡은 크리스틴 노먼 감독은 “앙리 마르소 덕분에 제작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며 “프랑스 은행, 샤똥, 고성 등을 섭외해 주어 칼리오스트로 백작 제작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말했다.
노먼 스튜디오는 앙리 마르소가 영화 촬영 및 편집 권한을 크리스틴 노먼에게 전부 위임했다고 전했다.
한편 아르누보 공모전과 <기암성>으로 화제를 이끌었던 고훈도 이번 작품에 합류한다.
고훈은 “노먼 감독과 함께하는 일은 환상적이다”고 말하며 “앙리 마르소의 눈은 정확했다”고 덧붙였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베네치아 비엔날레 프랑스‧한국 공동관, <칼리오스트로 백작(가제)>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가의 협력이 어떤 결과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 세계 박스 오피스 19억 달러를 기록한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기암성>의 두 번째 작품 소식에 영화계가 떠들썩해졌다.
└ㅁㅊ 개인이 1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앙리 이번에도 훈이 때문에 투자한 거야……?
└호궄ㅋㅋㅋㅋㅋㅋㅋㅋ
└앙리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얔ㅋㅋㅋㅋ
└BNP 파리바 주식 32% 가졌는데 거기 시총이 94조 원 정도 됨.
└?
└재산 일부가 30조 원?
└도라따
└저거 어떻게 계산됨? 총제작비가 얼만지는 몰라도 2억 달러라고 하면 흥행 수익의 절반 가져가는 거 아님?
└우리 호구형 ㅠㅠㅠ
└아닠ㅋㅋㅋ 스케일이 다르잖앜ㅋㅋㅋ 1억 달러 투자하는 호구가 어딨냐곸ㅋㅋㅋㅋ
└훈이 인터뷰 봨ㅋㅋㅋ 앙리 호구라고 할까 봐 눈 정확했다고 실드 쳐주넼ㅋㅋㅋㅋㅋ
└앙리 호구 아니다!
└근데 솔직히 기암성 본 사람들 후속작 안 보겠냐? 1/4만 봐도 5억 달러인데 그중 절반만 가져가도 2억 5,000만 달러임. 호구가 아니라 걍 독식하겠단 마인드 같은데.
└실패할 수도 있잖아.
└실패할 리가 없지. 노먼이 스피커 잡았는데.
* * *
1)한국 번역은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으로 되어 있으나, 칼리오스트로는 선대의 딸로 백작위를 상속받았기에 백작부인이 아니라 백작이 옳은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