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01화 (25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1화

55. 화룡점정(6)

“공소사실 요지 진술하세요.”

검사가 나섰다.

“피고인은 2025년부터 4년간 대한예술협회장인 아버지를 통해 협회 운영자금으로 97점의 예술품을 판매하였고 이를 본인 소유 갤러리에 전시하였습니다.”

최규서는 아버지 최영수가 협회장이라는 점을 이용해 대한예술협회에 작품을 판매해 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판매한 본인 작품을 협회에 넘기지 않고 본인 갤러리에 전시하여 다시 판매하는 과정으로 부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에 따른 재판이 진행되다가 검사가 증인 출석을 요구했다.

백설기가 증언대에 올랐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최규서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자 애써 외면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고 선서문을 따라 사실 그대로 말할 것을 맹세했다.

검사가 나섰다.

“진정성립 먼저 하겠습니다. 증인은 수사기관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2024년부터 5년간 시클라멘에 재직하였지요?”

“네.”

“주로 어떤 업무를 맡으셨나요?”

“비서로 일했습니다.”

“누구의 비서였죠?”

“최규서 씨입니다.”

“대학 선후배 관계로 5년간 최규서 씨의 비서로 활동했으니 시클라멘과 최규서 씨에 관하여 잘 알고 계시겠군요.”

“네.”

“시클라멘은 지난 4년간 166점의 작품을 구입해 전시했습니다. 이 자금의 출처를 알고 계십니까?”

“대한예술협회 운영비였습니다.”

“대한예술협회 운영비로 어떤 작품을 구입하였습니까?”

“최규서 씨의 작품입니다.”

“총 몇 점이었죠?”

“97점입니다.”

증언을 확보한 검사가 판사를 향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거로 제출한 시클라멘 작품 거래 장부는 증인의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실제로 판매하지 않은 작품을 판매한 것처럼 위장해 대한예술협회 운영금을 부정 획득하였습니다.”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했지만 사실을 확인할 뿐 상황을 뒤집진 못하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명백히 밝혀지고 있음에도 백설기는 최규서가 무서워 피고인석을 보지 못했다.

수년간 최규서에게 당해 온 경험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초범인 점을 감안하여 관대히 처분해 주시길 바랍니다.”

변호인이 변호를 마쳤다.

“피고인.”

판사가 최규서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최규서가 일어났다.

백설기는 최규서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졸였다.

“사업체를 운영하며 수익을 올리고자 다소 불합리한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두 미술계의 발전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대한예술협회 운영금으로 구입한 작품은 제 것뿐만이 아니었고 판매한 작품을 전시하여 재판매한 경우도 작품이 비싸니 공동소유하는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억울합니다.”

재판장이 최규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피고. 판매액 전부가 개인 계좌로 넘어간 사실이 증거로 제출되었습니다.”

재판장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피고의 행동은 미술계 발전을 위한 일이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수많은 화가를 위해 형성된 지원금을 독식한 피고가 어떻게 미술계를 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반성합니까? 죄송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재판장의 꾸짖음에 최규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 모습이 백설기에게는 무척 낯설었다.

세상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다 못해 거만했던 최규서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휘광으로 미술계에서는 누구도 건들 수 없었던 그녀도 사회와 법정에서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백설기의 가슴에서 두려움이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판결선고는 3월 14일 목요일.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아도 판결선고 합니다. 불복할 경우 7일 이내에 항소해야 하며 항소장은 이 법원에 제출해야 합니다. 재판 마칩니다.”

백설기는 힘없이 법원 직원들에게 이끌려 나가는 최규서를 바라보다가 법정을 나섰다.

“잘했어.”

유라임이 다가왔다.

한국 프랑스 공동 전시를 함께하며 사이가 가까워졌는데, 백설기가 이번 일을 몹시 무서워하여 재판장에 함께 출석해 주었다.

“보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더라. 지가 무슨 미술계를 위해. 판사님 아니었음 나라도 한마디 했겠다.”

백설기가 힘없이 웃었다.

재판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려 당장에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힘들어? 좀 앉았다가 갈까?”

“아니야. 괜찮아.”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

유라임이 운전대를 잡았다. 천천히 차를 몰던 중 어제 있었던 좋은 일이 떠올랐다.

“참. 그거 봤어?”

“뭐?”

“왜 최규서가 헛짓했었잖아.”

최규서는 마지막 발악으로 불한당 참여 작가 중 백설기가 자신을 도왔다며, 본인만 죄를 뒤집어쓰긴 억울하다고 호소했었다.

한때는 불한당에서 백설기를 퇴출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준비만으로도 벅찼던 그녀는 재판과 잘못된 여론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응…….”

“어제 네 잘못 아니라는 글 올라오더라고. 포럼 한번 봐봐.”

또 어떤 욕설이 있을지 몰랐다.

생전 처음 접하는 비상식적인 악플을 보면 며칠씩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가 거듭 권했기에 백설기는 어쩔 수 없이 미술 포럼 사이트에 접속했다.

“백설기 논란 정리였었나?”

유라임이 글 제목을 알려주었다.

마침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이 눈에 띄었다.

글을 작성한 사람은 본인을 한국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생으로 소개하며 백설기와 최규서의 관계를 설명했다.

최규서가 백설기를 속여 그녀가 받은 상을 가치 절하한 것으로도 모자라 전시회를 빌미로 다른 공모전, 전시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내용이었다.

최규서에게 당했던 이들이 댓글난에 자신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당했다며 호소하고 있었다.

└얘도 피해자란 말이야?

└어떻게 보면 제일 큰 피해자네.

└이 사람이 증거 수집 안 했으면 최규서 멀쩡히 활동하고 있었을걸?

└이래서 한쪽 말만 들으면 안 됨. 백설기 욕하던 애들 다 어디 갔냐?

└이것도 이 사람 주장 아님?

└백설기가 진짜 뭐 챙기거나 도왔으면 경찰에서 가만뒀겠냐? 이미 조사 다 진행되고 재판하는데.

게시물을 처음부터 다시 읽은 백설기가 한국대학교 졸업생임을 증명하는 사진에서 유라임의 흔적을 발견했다.

“……고마워.”

“뭐가?”

“이거.”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마음고생으로 한없이 약해진 백설기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유라임이 당황했다.

“야, 왜 울어.”

고마워서. 안도해서. 힘들어서.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작품도 냈으니까 개막까지 푹 쉬자.”

백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정말.”

* * *

-작품 문제없이 수령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은찬이 방태호에게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도 고생하셨어요! 멋지게 잘 부탁드릴게요!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보내세요!”

휴학까지 하며 작업에 매진한 마은찬이 답장을 보내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녹슨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작년 10월부터 다섯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은 탓에 잔뜩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휴식을 맞이했다.

“하.”

복잡한 감정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작품이 전시된다니 여전히 실감할 수 없었다.

현실이 눈앞에 닥친 탓에 더더욱 꿈만 같았다.

여태까지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창작 지원금 500만 원으로 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일을 찾아야 했다.

“하나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를 오래 쉰 탓에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았다.

마은찬이 일자리를 구하고자 노트북을 켰다.

시간과 임금만 맞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생각으로 구인 사이트를 둘러보았지만 학교를 다니며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부우웅- 부우웅-

구입한 지 8년 된 낡은 핸드폰이 힘겹게 울렸다.

“훈이?”

마은찬이 전화를 받았다.

“요!”

-요?

“인사야. 왜? 무슨 일이야?”

-태호 아저씨가 형 작품 받았다고 해서 전화해 봤어요.

“아, 응. 하~ 정말 힘들었어. 하나 가지고 이렇게 오래 했던 적은 처음이야. 넌?”

-저도 출품했어요. 이제 앙리 작품 빼곤 다들 제출한 것 같아요.

“형님만? 대체 뭘 만드시길래?”

-형님?

“완전 큰형님이지.”

고작 한두 번 만났을 뿐이고 그마저도 앙리에게 무시당했으면서 큰형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게 신기했다.

고훈이 웃었다.

-모르겠어요. 베네치아에서 만드니까 제법 큰가 봐요.

“그림은 아닌가 보네. 진짜 기대된다. 훈이 너랑 형님 것도. 8월까지 어떻게 기다려?”

마은찬이 베네치아 비엔날레 연기 소식에 불만을 내비쳤다.

한국관을 운영하던 대한예술협회가 법정에 선 탓에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관이 재정비되던 차 감사 중이던 그리스관, 러시아관, 베네수엘라관, 스페인관, 영국관, 일본관, 헝가리관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문제 소지가 있던 국가관의 재정비를 요구했고 개막을 8월로 확정 연기했다.

-다른 일 하다 보면 금방 올 거예요.

“그렇겠지. 아, 넌 정말 바쁘겠다. 카셀 도큐멘타랑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아트바젤도 해야 하잖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작년에 앙리랑 준비했어요. 도큐멘타랑 아트바젤도 마무리했고.

“히이. 그럼 좀 여유 있겠다. 엄청 부지런하네.”

-그렇지도 않아요. 영화 작업 때문에 미리 한 거거든요.

“영화?”

-뤼팽 시리즈요.

마은찬이 입을 쩍 벌렸다.

작년에 개봉하여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일으킨 영화 <기암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후속작 나와?”

-네. 이번에도 매니저로 일하게 되어서 바쁠 것 같아요. 다음 달부터 시작하기로 했거든요.

“완전 멋있다. 매니저면 높은 거지?”

-콘셉트 아트 팀을 맡는 건데. 높고 그런 거 없어요. 다들 같이 일하거든요.

“아항.”

-그래서 말인데요.

“응?”

-콘셉트 아트 팀에 같이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형 출품도 했으니까 복학하기 전까지 같이 해보는 거 어때요?

“어어?”

쾅쾅!

“시끄러워!”

너무 놀란 탓에 목소리가 커졌다.

바로 옆방에 사는 사람이 벽을 두들기자 마은찬이 전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 잠깐만. 밖에 나갈게.”

-네.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선 마은찬이 쿵쿵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하고 고훈을 불렀다.

“여보세요?”

-네.

“그. 그러니까 크리스틴 노먼 감독 작품에 참여하라는. 그런 말이야?”

-맞아요.

마은찬이 입을 벌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나 기뻐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근데 나 콘셉트 아트 일은 해본 적 없는데. 콘셉트 아트는커녕 아무 경력도 없고.”

-앙리랑 저 그린 거 보면 테마 잡고 그리는 거 잘할 것 같아요. 묘사도 섬세하고. 처음부터 경력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도 재작년에 처음 했어요. 별로예요?

“아니? 거짓말이야. 나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니, 잘할게! 너무 하고 싶어!”

마은찬의 솔직한 대답에 고훈이 웃었다.

-그럼 다음 달부터 시간 돼요?

“응응!”

-돈은 많이 받긴 힘들 거예요.

“괜찮아!”

생계가 앞서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드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돈은 좀 덜 받더라도 그림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신입은 시간제로 고용할 수밖에 없대요. 한 달에 2,500달러 정도인데 정말 괜찮아요?

“……한 달에?”

-너무 적으면.

“아니야! 충분해! 과분해! 너무 좋아! 감사합니다!”

“누가 이 밤 중에 소리를 질러!”

마은찬이 주변 눈치를 보았다.

-다행이다. 그럼 노먼한테 얘기해 둘게요.

“응!”

통화를 마친 마은찬이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잖아.’

마은찬이 고훈에게 고맙다는 문장을 반복해 적어 보내곤 하숙집 마당을 폴짝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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