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0화
55. 화룡점정(5)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얼어붙었던 대지를 비집고 돋아난 새싹처럼 한국 미술계에도 희망이 피어났다.
예술인과 학생, 학부모 그 밖에 여러 시민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부가 대한예술협회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회원도 몇 남지 않고, 지원도 중단된 협회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면서 그동안 협회가 해 오던 역할은 여러 조직으로 분산될 예정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운용과 같이 대외적인 일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임시로 맡기로 했으며.
각 공모전 지원도 중간 단계 없이 문체부가 직접 맡기로 했다.
국전 등 국내 대규모 공모전 심사는 한국 예술가 조합이 추천한 현직 예술가 3할과 관람객 투표 7할로 진행하자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방태호는 이번 협회 사건을 통해서 예술가들이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장성을 갖춰야 함을 인지했다고 보았다.
예술을 하고 싶다며 지원금이나 국가사업에 의존해서 작품을 하는 이들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인지했단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사실 협회로 가던 지원금을 예술가들에게 직접 주자는 말도 나오긴 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프랑스의 앵테르미탕 제도를 예로 들며, 지원금 대신 현재 예술인 실업 급여 제도를 개선해 주길 바랐다.
과거 왕과 귀족, 교회에 소속되었던 예술가들이 정부와 사회에 기대었다가 다시금 한 발짝 걸어 나간 것이다.
-최영수 대한예술협회장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할아버지와 뉴스를 보던 중에 최영수 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6년 아니었어요?”
징역 6년을 구형했다고 기사가 났었는데 그보다 기간이 늘어났다.
“그러게 말이다. 구형보다 형량이 늘어난 게 쉽지 않은데.”
할아버지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시는 듯하다.
-1심에서 6년 형을 구형받았던 최 씨에 대해 판사는 지난 20여 년간 국가 지원금을 사적인 용도로 유용하여 개인 재산을 불리고, 예술계와 예술인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준 점, 배임, 횡령, 특수 협박 등 죄질이 좋지 않다며 이와 같이 판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최영수 협회장은 상고를 포기한다는 뜻을 밝혀 징역 8년과 추징금 110억 원이 확정되었습니다.
“상고가 무슨 뜻이에요?”
“재심 요청을 하는 거란다. 재판이 틀렸으니 다시 해 달라는 거지.”
그 못된 짓을 20년이나 해오던 인간이 법원 판결을 얌전히 받아들이는 게 의아하다.
“다른 생각 하는 거 아닐까요? 이상하잖아요.”
“여론이 거세고 증거가 명확하니 재심에서 형량이 늘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할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 나와도 그땐 아무것도 못 할 게다.”
최영수가 할아버지와 같은 나이니 8년 뒤에는 75세나 된다.
그보다 일찍 나오더라도 협회가 힘을 잃은 이상 어쩌지 못할 거다.
-한국관 부정 운영으로 논란을 빚었던 최규서‧김수혁 부부가 각각 징역 2년과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겨우?”
재판 결과에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집행유예가 없구나.”
“그건 뭐예요?”
현대의 사법 체계는 복잡하다.
“말 그대로 집행을 유예해 준다는 말이야. 예를 들어 4년 동안 다른 죄를 짓지 않으면 형을 살지 않지만, 죄를 지으면 감옥에 들어가는 거지. 그런 거 없이 형이 진행되는구나.”
“너무 짧아요.”
수백, 수천 명의 예술가를 괴롭히고 그들을 위한 지원금을 독식했던 사람이다.
“아마 초범이라 그럴 거다. 집행유예가 없이 가는 것만으로도 법원에선 아마 형을 강하게 내렸다고 생각하겠지.”
이해하기 힘들다.
“또 실형을 살고 나오면 저 애들이 앞으로 뭘 할 수 있겠니. 애비 따라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으니 이제 자기 재주로도 못 살게 되었구나.”
할아버지 말씀대로 된다면 최규서에게는 그보다 잔인한 일도 없을 거다.
아버지가 힘을 잃었으니 본인 스스로 살아가야 할 텐데, 범법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고.
그나마 할 줄 아는 미술로는 어디에서도 일하기 힘들 거다.
현실에 좌절하면서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냈던 이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란다.
“근데 요새 마르소가 안 보이는구나. 전에는 매일 같이 오더니.”
한동안 우리 집 작업실로 출근하듯이 찾아와 <149,597,870.696㎞>와 작년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137년>을 함께 감상했었다.
처음에는 좋아서 감상하는 줄 알았는데 보름이나 그러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사진을 찍는다든지 자로 길이를 재는 등 이상한 행동도 보였는데 지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떠났다.
“베네치아에서 지내나 봐요.”
“베네치아?”
“뭐 만든다고 하는데 얘기를 안 해 줘요.”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고생 좀 하는 것 같던데. 잘 응원해 주렴.”
“네.”
대답은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해낼 사람이다.
자존심이 강해 응원이 되레 스트레스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나는 앙리가 고뇌 끝에 완성한 작품을 즐기면 될 뿐이다.
“훈아.”
방태호 목소리다.
아침에 불한당 작품 배치를 논의해야 한다며 나갔는데 벌써 돌아온 모양이다.
“2층에 있어요.”
계단을 올라온 방태호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플라티니 대표가 네 작품. 어…….”
“149,597,870.696㎞요.”
방태호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젓고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위치를 좀 바꾸고 싶다고 하더라고.”
작품을 어디에 어떻게 전시할지는 방태호와 미셸의 권한이다.
얼토당토않은 방식만 아니라면 굳이 내 허락을 받을 필요까진 없어서 의아해하니 할아버지가 대신 물어주셨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좀 당황스러워서요. 아무래도 훈이가 허락해야 하는 문제라고 얘기하고 왔습니다.”
“어디에 건대요?”
“입구 이야기를 하더라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했는데 역시 모르시는 눈치다.
“입구라니?”
“훈이 작품. 어…….”
“149,597,870.696㎞요.”
“아이고. 할애비도 못 외우겠다. 우리끼리는 그냥 단풍이라고 하자.”
“네. 단풍을 입구 쪽 천장에 걸어서 달자고 하더라고요.”
“그럼 못 볼 수도 있잖아요.”
“나갈 때는 볼 수 있긴 한데, 마지막에 시야에 들어오니까 좀 꺼려지긴 하지.”
“자리가 부족한가?”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애초에 20점 이상 전시할 계획으로 크게 지었으니까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과 설치 미술 작품도 고려했으니 불한당 전시관은 국가관 중에서도 가장 크게 지었다.
“그런데 굳이 왜?”
“마르소 씨의 요청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말해주지 않더라고요.”
앙리면 몰라도 미셸이 이런 일을 설명도 하지 않고 제안할 리 없다.
아마 앙리가 미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게 무슨 경운가. 플라티니 대표를 만나 봐야겠네.”
“아니에요. 할아버지.”
“음?”
“앙리가 무슨 생각이 있나 봐요. 그렇게 하라고 해주세요.”
방태호가 턱을 쓸었다.
“일단 그쪽에서 제안했으니 전달하긴 했지만 난 반대야. 단풍은 진짜 의미 있는 작품이야. 단순히 좋은 작품을 넘어서 어쩌면 서리 밀밭보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어.”
“같은 생각이에요.”
방태호가 허리를 폈다.
그동안 내 역량보다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149,597,870.696㎞>만큼은 자신 있다.
여러 재료를 익혀나가며 동시에 색을 활용하는 방법도 확장해 나갔는데, <149,597,870.696㎞>는 이보다 더 멋진 작품을 그릴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잘 뽑혔다.
할아버지가 자신감을 찾은 나를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난 제일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봐. 모두 좋은 자리에 전시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은 자리는 있으니까. 네 1억 4,900만…… 단풍이 제일 어울리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이 대부분 전시관에 도착한 상태다.
단 하나 앙리의 작품만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방태호는 내 작품이 중심에 서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고마운 일이다.
“미셸은 어떻게 생각한대요?”
“플라티니 대표도 어제까지만 해도 단풍을 두기로 했거든. 근데 하루 만에 이렇게 말을 바꾸네.”
방태호가 서운함을 내비쳤다.
평소 미셸 성격상 무례하게 굴진 않았을 거다.
본인도 영문을 모르니 조심스레 제안한 거지만 내 그림을 자랑하고 싶은 방태호는 그 자체로 서운해하는 것 같다.
믿음직스럽다.
“괜찮아요. 앙리가 저한테 손해 끼치진 않을 거예요.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겠죠.”
“그렇기야 하겠지만 이야기는 들어봐야겠구나.”
“그래.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
“연락해 볼게요.”
* * *
-뜻은 좋은데 이유는 설명해 줘야지. 훈이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한편 미셸 플라티니도 앙리 마르소를 탓했다.
“미리 알면 안 돼.”
-그럼 적당히 변명거리라도 생각해 둬야지. 훈이가 착하니까 이해해 줬지 다른 사람이면 벌써 싸웠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며.”
앙리와 통화하던 미셸 플라티니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처음 앙리의 발상을 전해 들었을 땐 무척 사랑스러운 생각이라고 여겼건만 멍청이답게 행동했다.
기껏 멋진 선물을 준비해 두고, 주기 전에 사람을 서운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셸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멍청이를 한 번 더 설득했다.
-막상 보면 좋아하겠지. 근데 아무나 받아주는 거 아니야.
“아무한테나 안 해.”
-하. 그래. 아주 대단한 사랑꾼이네. 끊어!
통화를 마친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핸드폰을 넘기곤 베네치아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건축가, 기상학자까지 대동한 채 두 달을 꼬박 베네치아에서 지낸 그는 최근에야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자화상 말고 다른 것도 그려보는 건 어때요?’
친구라고도 동업자라고도 경쟁자라고도 할 수 없는 꼬맹이가 던진 말을 시작으로 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작가님, 이 위치로 예상됩니다.”
“확실해?”
“그럼요. 날이 안 좋은 경우만 아니라면 분명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전시관 건축 책임자가 다가왔다.
“개막이 연기된 덕에 어떻게 가능할 듯싶습니다만.”
“다만?”
“올라오기 불편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보통 한 전시관만 보는 게 아니다 보니 입구를 지하와 1층 두 곳에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해. 비워두는 거 잊지 말고.”
“네. 염려 마십시오.”
앙리 마르소가 불한당 전시관 주변을 둘러보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줄곧 준비한 일이 드디어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작가님.”
아르센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훈이 전화입니다.”
앙리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왜.”
-뭐 하는데 거기에 계속 있어요?
“일.”
-그걸 몰라서 물어요? 학교는 안 나와요?
“바빠. 다음 학기부터 나갈 거야. 왜?”
-라바니가 앙리 수업 기대하거든요.
장학제도 덕분에 앙리 4세 중학교에 입학한 비다 라바니 일이었다.
마르소 갤러리를 통해 화가의 꿈을 키우는 소년은 존경하는 앙리 마르소를 사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고훈은 비다 라바니 소식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냈고 앙리 마르소는 간간이 호응하며 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해요.
“그래.”
불한당 전시관을 올려다보던 앙리 마르소가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다른 거나 준비해. 아트 바젤도 있잖아.”
-걱정 안 해요.
노을이 단풍처럼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