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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99화 (25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9화

55. 화룡점정(4)

줄곧 몸과 마음을 혹사했던 탓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자 금방 노곤해졌다.

평소였으면 한두 시간으로 충분했을 텐데 회복 캡슐에서 열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종을 눌러 아르센을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지금 몇 시야.”

“여섯 시 정도 되었습니다.”

“빌어먹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늘 종일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쉬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이들이 떠올랐다.

“미셸하고 꼬맹인.”

“오전에 나무를 베어다가 응접실을 꾸미셨습니다.”

“뭐?”

“성탄절이지 않습니까.”1)

아르센이 빙그레 웃었다.

최근 작업에 몰두하느라 두문불출하는 앙리를 위해 미셸과 고훈은 마르소 저택 부지에 있는 전나무를 베어다가 성탄절 분위기를 내었다.

오후에는 쇼콜라티에 멤버인 블랑쉬 파브르와 비다 라바니까지 찾아와 거들었다.

아르센은 성탄절을 매년 홀로 보낸 앙리 마르소에게 친구가 생긴 듯해 기쁘기 그지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앙리 마르소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만큼은 즐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관심 없어.”

“고훈 군과 플라티니 대표가 스트라스부르까지 다녀왔습니다.”

스트라스부르는 1570년부터 크리스마스 마켓이 운용하는 지역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관련 상품이 다양했다.

“여태 제대로 즐겨본 적 없지 않으십니까. 그간 플라티니 대표도 내심 서운해하는 눈치였으니 오늘만큼은 함께 보내시죠.”

아르센이 무엇을 반복해 권하는 일은 드물었다.

앙리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정보 전달에 목적을 두었지, 설득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길 진심으로 바랐기에 이번만 예외를 두었다.

아르센이 평소답지 않게 계속해서 권하자 앙리 마르소가 귀찮아 하며 발을 옮겼다.

응접실 문을 열자 사방이 어두웠다.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차, 크리스마스트리를 감싼 작은 조명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고요한 불빛 아래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멋있다.”

“응. 나 이런 거 처음 만들어 봐.”

“양말이 삐뚤어졌어.”

고훈, 블랑쉬 파브르, 비다 라바니가 각자의 예술 감각을 살려 트리를 재정비했다.

“왔어?”

미셸 플라티니가 싱긋 웃으며 앙리에게 다가왔다.

“어두워.”

“너무 밝으면 조명이 안 살잖아.”

앙리 마르소가 못마땅해하며 응접실을 살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는 양말과 지팡이, 별, 천사, 종과 조명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빨간 리본으로 포장한 선물상자가 여럿 놓여 있었고 아이들은 상통 인형을 선반에 놓고 있었다.

“앙리.”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발견하곤 손짓했다.

“자, 받아요.”

“뭘.”

“아기 예수예요. 이따가 가운데 놓으면 돼요.”

고훈이 앙리에게 상통 인형을 건네며 말했다.

“이게 뭔데.”

“크레슈 몰라요?”2)

알고 있지만 경험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훈과 미셸, 아르센까지 기대하는 눈치를 보내어, 앙리 마르소는 떨떠름하게 아기 예수 인형을 가운데 놓으려 했다.

“안 돼요. 자정에 놓아야 해요.”

블랑쉬 파브르가 앙리 마르소를 탓했다.

“뭐?”

“인형 놓는 날이 정해져 있어. 아기 예수는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앙리 마르소가 마땅치 않은 듯 아기 예수 인형을 들어 올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앙리 마르소.”3)

“메리 크리스마스.”

미셸과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세상에. 예쁘게도 꾸몄구나.”

마침 셰리 가도가 저녁 만찬을 준비해 놓고 응접실을 찾았다.

셰리 가도의 음식 솜씨를 익히 경험한 아이들이 미셸과 함께 서둘러 식당으로 향하자 앙리 마르소만이 얼떨떨하게 남아 있었다.

“뭐 하니? 배 안 고파?”

셰리 가도가 앙리를 재촉했다.

허기가 밀려들었지만 앙리 마르소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시끌벅적하게 놀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고유한 밤이 찾아왔다.

앙리 마르소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응접실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요란한 일은 질색했건만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은 저녁이었다.

미셸이 다가와 따뜻한 차를 건넸다.

“재밌었지?”

앙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여태껏 모든 일에 확고했던 자신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야단스러운 아이들과의 저녁을 받아들이고, 작품이 나오지 않음에도 이렇게 느긋하게 지내는 본인이 낯설었다.

“잘 안 풀려?”

미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물었다. 걱정도 우려도 더하지 않은 담백한 목소리였다.

앙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셸은 재촉하지 않고 그와 함께 창가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얼마간.

앙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상해.”

“뭐가?”

“꼬맹이가 날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는 것도. 흰머리하고 더벅머리가 내게 편지를 쓴 것도.”

미셸이 빙그레 웃었다.

“친해져서 싫어?”

“……글쎄.”

앙리 마르소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주제 ‘사이’는 그에게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다.

본인이 누군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만 생각해 왔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로서는 도저히 작품을 해나갈 수 없었다.

그런 도중에 고훈과의 관계가 갑작스레 진전되고 앙리 4세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쇼콜라티에 멤버인 흰머리와 더벅머리는 그를 친근히 대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동 전시관에 합류한 프랑스 작가들마저 호의를 보이며 다가왔다.

앙리 마르소에게는 낯선 환경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다가온 이들은 재산을 목적으로 했었다.

커서는 앙리 마르소의 작품이 수준이 낮다며 폄하하고 조롱하는 이들뿐이었다.

항상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이들로 가득하여 외로운 싸움을 거듭해야 했다.

팬들이 생겨났지만 인간적 교류 관계를 나눌 순 없었기에 앙리 마르소의 세계는 저택에 국한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고용인조차 거래 관계였기에 그가 진정 마음을 주고받았던 사람은 유모 셰리 가도와 미셸 플라티니뿐이었다.

그 좁은 세계에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들이지 않고 싶었거늘 한 소년이 무작정 비집고 들어와 그 틈으로 여러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낯설고 이상한 경험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확고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고.

그것이 천재 앙리 마르소가 몇 주째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이유였다.

자화상만을 그려왔던 캔버스에 나 외에 다른 이를 넣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르누보 공모전에 출품했던 <미>처럼 본인을 중심으로 그리는 일과는 다른 일이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셸이 입을 열었다.

“이미 그려봤잖아.”

“무슨 말이야.”

“그림자.”

휘트니 비엔날레 출품작이었다.

거대한 에메랄드 눈동자에 고훈의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을 그려 넣은 작품이었다.

“네가 달라 보이더라고. 훈이를 의식하고 추월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서.”

“…….”

“그전까지만 해도 인간 같지 않을 때가 있었거든.”

앙리가 눈을 치켜뜨자 미셸이 씩 하고 웃었다.

“꼭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친구가 늘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 녀석하고 난 친구가 아니야.”

“그럼?”

복잡했다.

경쟁자라고 하기엔 여태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적들과는 달랐다.

“내가 보기엔 둘도 없는 친군데 뭘.”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친구가 뭔데?”

미셸의 질문에 앙리가 눈매를 좁혔다. 생각해 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

온 세상이 존경하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예술가이나 사회성이라고는 유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너무나 뛰어나서.

너무나 특별해서.

남들과는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고 훨씬 앞서 바라봤기에 어울릴 수 없었다.

셰리 가도는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미셸 플라티니와는 끊임없이 싸우며 서로를 이해해 나갔지만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할 상대를 만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 너무나 닮은 천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고훈은 비슷한 수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친구라는 개념은 몰랐지만, 겨우 그렇게 흔한 말로 정의할 순 없었다.

“아무튼 아니야.”

“내가 보기엔 맞아. 둘도 없는 친군데 뭘.”

“…….”

“훈이 선물 안 열어 봐?”

앙리 마르소가 고훈이 주고 간 큰 상자를 보았다.

“초콜릿이나 잔뜩 넣었겠지.”

“열어 봐.”

미셸이 권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상자를 열었다.

완충재 틈으로 액자처럼 보이는 물건이 삐져나와 있었다.

몇 주 전에 전시할 작품이 없다며 그림을 팔지도, 주지도 않았던 고훈이 그림을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액자를 꺼낸 앙리 마르소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노을을 담아낸 듯한 단풍잎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 준비하면서 그렸던 거래.”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왜 날 줘.”

“17점 그렸는데 출품작이랑 그게 제일 괜찮았대.”

앙리 마르소가 액자에 꽂힌 엽서를 보았다.

<137년>이란 제목과 함께 앞으로도 잘 지내자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137년?”

제목을 이해하지 못한 앙리 마르소가 미셸에게 답을 구했지만 그녀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출품작 제목은 149,597,870.696㎞래. 태양하고 지구 거리.”

앙리 마르소가 다시 한번 <137년>을 바라보았다.

상상하기도 힘든 먼 거리를 넘어서 서로를 닮은 노을과 단풍잎이 애틋했다.

137년이라는 제목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훈이 생각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디가?”

“작업실.”

앙리 마르소가 <137년>을 내려놓고 작업실로 향했다.

‘뭔가 생각이 났나 보네.’

그 걸음이 다급하나 분명하여 미셸은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 *

1)프랑스에서는 노엘.

2)Crèche. 예수의 탄생 장면.

18세기 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상통 인형으로 예수의 탄생 장면을 표현한다.

보통 교회에서 이뤄지는 행사로, 시간이 흐르면서 서사가 진행되듯 인형이 늘어난다.

3)프랑스에서는 Joyeux Noël(주아유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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