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98화 (25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8화

55. 화룡점정(3)

[대한예술협회 잇따른 탈퇴 요청]

[탈퇴 절차 까다로워 사실상 연 끊은 예술가들]

[최규서‧김수혁 경찰 소환 불응]

[검찰 최규서‧김수혁 출국 금지 조치]

[베니스 비엔날레 감사단 어리둥절, 감사 대상이 잠적 중]

[한국관 어떻게 되나?]

세상이 변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 예술인 조합에 가입한 뒤로 예술가들은 자진해서 협회를 탈퇴했다.

이에 배움 미술관, 서울 미술관에 호응하고 나서면서 전국 각지의 미술관과 갤러리가 뒤를 따랐다.

더는 협회에 간섭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합 소속 예술인들과 관계를 맺어갔다.

지금 당장은 큰 관심을 받는 덕에 조합원들의 전시회가 잘될 수 있지만, 사실 조합에 들어온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결국 좋은 작품을 보이고 전시회를 어떻게 꾸미고 홍보하느냐에 따르는 건 본인들 몫이다.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재정을 바탕으로 협회가 밀어주었던 몇몇 작가에 비하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작가와 관객, 관객과 미술관 사이에서 부정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한국 미술계가 어떻게 성장할지는 예술가와 미술관의 손에 달려 있다.

“쯧.”

뉴스를 보시던 할아버지가 최규서, 김수혁 부부가 경찰 소환에 불응했다는 소식에 혀를 찼다.

“저래도 돼요?”

“글쎄. 버티려 하는 것 같은데 얼마 못 갈 거다.”

“계속 안 나가면 어떻게 돼요?”

“흐음. 모르겠구나. 수배라도 되려나?”

수배령이라니.

할아버지도 잘 모르시는 것 같지만 최규서 얼굴이 붙은 수배 전단지가 뿌려지면 볼만할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구나.”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에서 파견한 감사단이 한국에 도착했는데 감사 대상인 대한예술협회가 공중분해 직전인 상황.

듣기로는 압수수색을 받아서 감사할 것도 없이 귀국하게 되었단다.

“그럼 한국관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쇄될지도 모르겠구나.”

“네?”

“협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주체가 사라지잖니. 관리할 사람도 전시할 사람도 없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더구나.”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지켜온 곳인데.”

“너무 걱정 마라. 조합이 정부하고 비엔날레에 계속 연락하고 있으니 뭔가 방안이 나올 거야.”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도 멋진 작가가 있다는 걸 보이는 거란다. 할 수 있지?”

조금 돌아가는 느낌이나 그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다.

한국관이 지속해서 좋은 작품을 내보일 수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낸다면 베네치아 비엔날레도 흥행을 위해 폐쇄하진 못할 거다.

* * *

“이름이요.”

경찰의 질문에 최규서가 눈을 치켜떴다.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으로도 모자라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조사받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몰라서 물어?”

경찰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말하지 마시고요. 이름 말하세요.”

“반말하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군지 몰라?”

“누군데.”

최규서가 미간을 좁혔다.

“찬물 더운 물 구분을 못 하네. 이봐요, 아가씨. 여기가 어디라고 협박질이야? 정신 안 차려?”

생전 처음 겪는 수모였다.

“시간 없으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해. 뭔 놈의 혐의가 이렇게 많아?”

경찰이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름.”

“…….”

“이름!”

“……최규서.”

“빨리빨리 좀 합시다. 며칠 걸릴 것 같으니까.”

“뭐?”

경찰이 눈을 부라렸다.

최규서가 움찔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 지원금 부정 수령, 공금 횡령, 배임 등 조사할 것이 산더미 같은 데다 국가적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대통령과 정치권에서 엄중히 조사할 것을 당부했고 상부에서는 먼지 하나 나오지 않게 털라고 지시한 상황에서 이 철없는 인간이 뭘 믿고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요. 믿는 구석이 있나 본데, 여기 전직 장관이고 국회의원도 이러지 않아요. 예? 정신 차립시다.”

정치 자금을 대주던 국회의원과 광고를 넣어주며 관계를 맺은 언론사를 믿고 있던 최규서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대한예술협회 회장 딸이라는 이름만으로 설설 기던 미술계 인사들이 아니었다.

“대답만 해요. 1997년 8월 9일생. 맞아요?”

“아는 걸 왜 자꾸 묻냐고.”

경찰이 노려보자 최규서가 요자를 붙였다.

“절차라고. 절차. 대답이나 해.”

“……네.”

* * *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해오던 천재 미술가 앙리 마르소는 최근 심각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800여 점이 넘는 자화상과 자각상을 만들어 온 끝에 한계를 맞이한 것이었다.

한 달 내내 새 작품 구상에 매달렸지만 그를 충족시키는 발상은 찾아오지 않았다.

앙리 4세 중학교도 방학을 맞이했겠다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에 매진한 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앙리?”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작업실을 방문한 미셸과 고훈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 엎드린 앙리를 발견했다.

캔버스와 앙리 마르소 사이에는 물감이 가득 있었다.

“자?”

미셸이 앙리에게 다가가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일어났는데 몸 한쪽이 온통 하얀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훈과 미셸이 움찔했다.

앙리가 최근 새 작품 구상에 애먹고, 본래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고훈이 물었다.

“보면 몰라?”

고훈이 앙리 마르소가 누워 있던 곳을 살폈다.

자기 몸에 물감을 발라 그대로 누워 있을 정도로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살인사건?”

“큽.”

미셸이 웃고 말았다.

소년의 말대로 앙리 마르소가 누워 있던 자리가 마치 시체가 있던 장소를 표시해 둔 것처럼 보였다.

앙리 마르소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곤 의자에 앉았다.

“뭐 하러 왔어.”

“크리스마스잖아. 계속 작업실에 있었으니 기분 전환 좀 하자고.”

고훈이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럴 기분 아니야.”

“그럴 기분 아니니까 해야지. 너 지금 꼴을 봐.”

“내가 뭐 어때서.”

“지금 반쯤 시체예요.”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였다.

감히 고귀한 마르소 가문의 보석에게 시체라는 말을 붙인 고훈을 용서할 수 없었다.

“너.”

자리에서 일어난 앙리가 멈칫했다.

‘이게 나라고?’

미셸이 꺼내든 거울 속 자신을 보곤 눈매를 좁혔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기름이 흘렀고 눈 주변은 어둑어둑했다.

작업 스트레스로 끼니와 수면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탓에 혈색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얼굴 반쪽은 하얀 물감으로 덮여 있으니 영웅 앙리 마르소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이러고 있어요.”

“내 말이. 일단 씻어.”

“밥도 먹고요. 초콜릿으로 때우지 말고.”

“회복 캡슐 좀 그만 쓰고.”

“커피도 그만 마셔요.”

“좀 치우면서 하면 안 돼?”

“잠도 좀 자요. 얼마나.”

“시끄러워!”

앙리 마르소가 소리를 지르자 그를 놀리던 고훈과 미셸이 웃으며 작업실을 벗어났다.

혼자 남은 앙리 마르소는 작업실을 둘러보다가 혀를 찼다.

잠시 후.

목욕하고 나선 앙리 마르소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회복 캡슐에 들어갔다.

남용해선 안 되지만 당장 상태가 좋지 않고, 숙면할 수 있는지라 고훈과 미셸도 말리지 못했다.

대신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

“내년 봄부터 시공 들어간다며?”

미셸이 고훈에게 쇼콜라티에 갤러리에 관하여 물었다.

“네. 마르소 갤러리보다 멋지게 지을 거예요.”

“그거 기대되는데. 초대해 주는 거야?”

미셸이 고훈에게 선물상자 모양의 고리를 넘겨주었다.

“그럼요. 마르소 미술관은 언제 완공해요?”

“원래 내후년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빨리 될 것 같아. 내년 가을쯤?”

“엄청 빠르네요.”

“응. 앙리가 서둘러서.”

미셸은 고훈에게 ‘고훈관’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만 했다.

고훈관 자체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그 외에 앙리가 준비한 선물이 또 있었다.

그 즐거움을 빼앗을 순 없었다.

“끄응.”

고훈이 사다리를 타고 크리스마스트리 제일 위로 손을 뻗었지만 꼭대기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몇 번 더 시도하다가 하는 수 없이 미셸에게 별을 넘겼다.

미셸 플라티니가 대신 사다리에 올라 별을 달았다.

“앙리 괜찮아요?”

“응. 괜찮을 거야.”

“저렇게 고생하는 건 처음 봐요.”

사다리에서 내려온 미셸이 씩 웃었다.

“가끔 저래. 마르소의 보석 만들 때 한번 봤잖아.”

고훈이 벌써 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전시가 시작되고도 조각상에 눈을 두고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던 앙리 마르소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걱정되겠어요.”

“그러니까.”

평소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도 작업에만 들어가면 다른 건 뒷전이니 주변 사람으로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작품에 대해서는 조금도 우려하지 않았다.

그 어떤 벽이 막아서도 넘어서지 못한다면 부숴서라도 나아갈 사람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니까. 쓰러지지 않게 도와줘야지.”

미셸의 말에 고훈이 싱긋 웃었다.

앙리 마르소가 저렇게 작품에만 매진하면서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유를 발견한 탓이었다.

곁에서 응원하고 지켜주고.

작품을 완성한 뒤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멋진 전시회를 꾸려주니 다른 걱정을 할 리 없었다.

“미셸이 없었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그럼.”

두 사람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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