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97화 (25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7화

55. 화룡점정(2)

고수열과 고훈이 한국 예술인 조합에 가입하는 날, 행사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대한예술협회의 비리가 폭로된 가운데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 조합의 손을 들고 나서니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서인호 조합장이 직접 나서서 고수열과 고훈을 환영했으며 곧이어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조합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십니까?”

고수열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역할이라고 할 것까지 없습니다. 단지 조합원으로서 서로 협력할 뿐이죠.”

“고수열 화백과 서인호 조합장의 만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수열이 서인호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대신 답했다.

“해송 선생이 제 한 해 후배입니다만, 교류가 잦진 않았습니다. 워낙 나다니길 좋아해서 학교에서 볼 일이 없었지요.”

“하하하!”

서인호의 농담에 고수열이 크게 웃었다.

말 그대로 학교에 붙어 있기보다는 산과 들에 있었기에 서인호와의 접점은 크게 없었다.

단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국 프랑스 공동 전시관 오리엔테이션을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무리 없이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들 최선을 다하니 멋진 전시회가 될 겁니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연기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기자의 질문에 행사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국가관 운용을 감사하는 이유로 개막식이 다소 늦춰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것이 한국관으로부터 시작된 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기자는 고수열이 대한예술협회 관련 비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회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모두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숨죽여 기다렸다.

고요한 가운데 고수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물었다.

“협회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관이 정말 부당하게 운영되고 있었습니까?”

“최영수 협회장의 부정을 알고 계셨습니까?”

“조합에 가입하신 이유가 협회와 거리를 두기 위함인가요!”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일이었다.

썩을 대로 썩어빠진 미술계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한 예술인은 서인호와 몇 안 되는 조합원뿐이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고수열마저 나선다면 비판 여론에 더욱 힘이 실릴 터였다.

“현재 언론과 조합에서 말하는 협회의 비리 의혹은 모두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취재 나온 기자들은 경악했고.

행사장에 참여한 미술계 인사들은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로 저는 협회와 일절 협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수열이 힘주어 말했다.

“예술 하는 사람들의 권익을 지키고. 그간 협회에 만행 속에 이뤄진 모든 일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고수열이 곁에 앉아 있는 손자를 보았다.

모두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고훈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힘드셨을 거예요.”

따뜻한 목소리가 회장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잘못되었는데. 분명 잘못되었는데 혹시나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말도 못 하고. 설 자리는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답하셨을 거예요.”

그간 협회의 부당한 처사로 피해받았던 사람들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있기에 미술이 계속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고훈이 조합 소속 예술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협회가 아니라 그리고 조각하는 여러분 덕이에요. 만약 설 자리가 없어서 걱정이시라면.”

고훈의 말에 맞춰 중앙 스크린에 쇼콜라티에 갤러리 전경도가 비쳤다.

“제 갤러리를 드릴게요.”

가입식을 찾은 모든 이가 크게 놀랐다.

고훈이 대규모 갤러리를 짓고자 2,600평을 매입했단 소식은 익히 잘 알려져 있었다.

비교적 낙후된 지역이라고는 하나 파리 시내였다.

유럽 언론은 앙리 마르소와 함께 쇼콜라티에를 설립한 고훈의 새 갤러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고작 저 하나 힘을 보탠다고 달라지진 않겠죠. 하지만 함께하면 나아질 거예요.”

고훈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갤러리가 완공되면 한 달에 한 번, 조합원을 위한 전시회를 열 거예요.”

이 순간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 * *

[미술계 거목조차 인정한 협회 비리]

[고훈, 소외된 예술가를 위해 갤러리 개방 약속]

[고수열, “자유와 권익은 남에게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용기를 잃지 마세요]

3일 고수열(65)과 고훈(12)이 한국 예술인 조합에 가입했다.

2027년 서인호(66)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 예술인 조합은 국내 예술가가 모인 단체다.

정부 보조금이나 기업 후원을 받지 않고 예술가들이 독립하여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판매하기 위함이다.

최근 대한예술협회가 비리 의혹으로 조사받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이날 가입식에서 고수열은 “협회는 오랫동안 부정을 저질렀으며, 이에 힘없는 예술가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며 “조합이 중심이 되어 예술가들이 본연의 권익을 지켜나가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예술가들이 협회의 보복이 두려워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고, 사실상 조합이 개최한 전시회 등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문제라고 한다.

이에 손자 고훈의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고훈은 협회의 부당한 처사로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해 현재 파리 몽마르트르에 설립 중인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개방한다고 말했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합작하여 설립한 예술가 단체 쇼콜라티에의 주 무대에서 전시회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예술인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고훈은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세우기 위해 그간 작품 판매 및 광고, 영화 제작 등으로 올린 수입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호 기자(대한일보)

“용기를 잃지 마세요.”

고훈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 재산을 투자한 갤러리를 소외된 아이들의 놀이터로 활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국내 예술가를 위해 전시실 한 곳을 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진짜 할 말이 없다.

└부끄럽다. 저렇게 어린 애도 자기가 가진 거 나눠서 도우려 하는데 어른들은 뭐 하고 있냐.

└최근 몇 년간 거지 같은 뉴스만 보다가 간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소식이네.

└나 미대 나왔는데 훈이 인터뷰 보고 좀 울컥하더라. 지금은 포기했지만 옛날 생각나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런 게 진짜 플렉스지. 명품이고 슈퍼카고 그딴 거 사는 게 플렉스냐.

└ㄹㅇㅋㅋ

└무슬림 데려다가 그림 가르치지만 않았어도 딱인데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좀 말자. 훈이랑 고수열도 프랑스에서 인종차별 당한다잖아. 개고기 먹는 나라로 꺼지라고. 네가 무슬림 혐오하는 거랑 뭐가 다름?

└다르지. 테러하는 새끼들하고 우리나라하고 같냐?

└테러하는 놈들은 따로 있다니까?

└프랑스 놈들 진짜 어처구니없는 게 지들은 달팽이고 뭐고 안 처먹는 거 없으면서 개 먹는다고 지랄임

└프랑스 인간 내로남불로 유명하지. 홈리스가 키우는 개 강제로 뺏어다가 팔려고 했잖아.

└이것도 차별임. 먹는 걸로 반박하면 똑같은 놈들 되는 거고, 그 노숙자한테 강아지 돌려준 것도 프랑스 사람들이야.

└제발 그만 싸우자. 훈이도 그만하자고 하잖아.

└맞아. 이제 지긋지긋함. 뉴스만 보면 맨날 싸움. 안 싸우는 사람이 없어. 지치지도 않나.

└훈이는 그냥 함께하고 싶은 거야. 작품이 항상 행복이나 그리움을 말하잖아.

└우리 훈이 장하다 ㅠㅠ

고훈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몇몇 단체가 호응하고 나섰다.

“배움 미술관이요?”

방태호가 전한 소식에 고수열과 고훈이 깜짝 놀랐다.

“네. 관장님께 연락 왔는데 소유주께 허락받았다고 합니다. 조합원들 받아서 전시회 열기로.”

“소유주라면?”

“배도빈입니다.”

“허어. 이거 참. 고마운 일일세.”

고훈이 눈을 깜빡거렸다.

배도빈이라면 고훈도 익히 아는 세계적인 음악가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미술관을 소유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휘자 아니에요?”

“WH그룹 상속자기도 하니까.”

고훈이 배움 미술관 앞에 붙은 WH라는 약자를 떠올렸다.

“배움 미술관이 움직이면 다른 곳도 금방 반응이 올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지. 잠시만.”

고수열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울 미술관 관장 이준호로부터 온 전화였다.

“네, 고수열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서울 미술관의 이준호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하하. 원체 바삐 살고 있지요. 한데?”

-다름이 아니라.

이준호 관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졌다.

-선생님과 훈이 이야기 듣고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부끄럽지만 여태 눈치를 봐 왔던 건 사실이고.

“…….”

-근데 참 그렇더라고요. 협회야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지만 전시할 게 없으면 미술관이 돌아가겠습니까.

“음.”

-해서 조합하고 일을 좀 해볼까 합니다.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 고민하다가 안부 인사도 드릴 겸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괜찮으실지…….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함께해야지요. 조합에 얘기해 둘 테니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자리 한번 마련하죠.”

-아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껄껄. 별말씀을.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고수열이 통화를 마치자마자 방태호가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서울 미술관 이준호 관장일세. 조합하고 일하고 싶다더군.”

고훈이 서울 미술관에서 연락했다는 말에 기뻐했다.

첫 발표작 <해바라기>를 전시했던 서울 미술관 역시 규모가 큰 곳이었다.

“하하. 이 관장님 속은 알기 쉽습니다.”

방태호가 이준호의 속셈을 파악했다. 분위기가 조합으로 기울어 가는 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함께하니 작품 전시를 위해서라도 재빨리 움직인 것이었다.

“껄껄. 그림을 워낙 좋아하지 않나.”

* * *

대한예술협회 사무실을 찾은 최규서의 눈이 잔뜩 흔들렸다.

사무실은 여기저기 차마 폐기하지 못한 서류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컴퓨터가 있던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전화벨 소리와 상담 중인 직원들의 말소리로 가득했다.

“네, 작가님. 탈퇴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절차상 어쩔 수 없습니다. 3개월간 준회원 신분을 거친 뒤에. 작가님? 작가님?”

상담원들이 어떻게든 복잡한 절차를 내세워 예술가들의 탈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탈퇴 요구에 대한예술협회는 일반 사무직원들까지 나서야 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의 감사를 준비하기는커녕 경찰이 압수수색을 나와 PC 및 중요 문건을 모조리 가져갔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 잠깐.”

최규서가 협회 직원을 붙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

직원이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조사 나온 거 몰라요?”

평소라면 눈도 못 마주칠 사람이 적의를 내보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방금 조사받으러 가셨습니다. 비켜 주실래요?”

직원이 최규서를 지나쳤다.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변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다리가 풀려 벽에 기댄 채 한동안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초첨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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