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5화
54. 용기(5)
한국과 프랑스의 유명 작가들이 함께하는 불한당에 대한 기대가 부푼 상황.
NBC와 대한일보를 통해 대한예술협회의 비리가 연일 보도되고 거기에 고훈의 <한으로 핀 꽃>마저 화제가 되니 언론이 이를 두고만 볼 리 없었다.
각 방송국, 신문사에 더하여 1인 미디어까지 나서서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둘러싼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고.
그중 김지우가 작성한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역사’는 각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알려졌다.
한국관이 단순한 국가관이 아니라.
동양의 작은 나라이기에 받았던 수모와 차별 속에서 꿋꿋이 지켜내 온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런 장소가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대한예술협회를 철저히 조사하고 해체하라는 청원이 올라온 지 하루 만에 40만 명이 참여했고.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와 예술감독, 작가 선정을 다시 하라는 요구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최영수 일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대한예술협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날로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관 운영 권한이 예술인 조합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끄럽다.”
최영수의 말에 사위 김수혁이 TV를 껐다.
“이대로 지켜만 볼 거예요?”
약이 바짝 오른 최규서가 아버지 최영수에게 물었다.
인터넷에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모멸적인 글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평생 남을 내려다보고 대접받기만 했던 그녀로서는 감당키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
최영수가 반응이 없자 최규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실제로 만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엎드려 길 연놈들이 자신을 모욕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물러나.”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최영수가 입을 열었다.
최규서 김수혁 부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인어른, 규서 이번 일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최규서가 남편을 가로막고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버지가 이대로 물러날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그녀는 크게 실망했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최영수가 눈을 떴다.
“네가 처리한다?”
“네.”
최규서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내부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백설기라고 의심하고 있었기에, 출처를 공격하면 사태가 더욱 심각해질 일은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백설기 짓이에요. 그 애만 처리하면 돼요.”
최영수는 굳은 얼굴로 딸이 하는 말을 들었다.
“보도할 내용이 떨어지면 여론도 잠잠해질 거예요. 항상 그랬듯이.”
“백설기가 입을 닫겠어?”
남편 김수혁 물었다.
“걘 반항 못 해.”
최규서가 조소를 지었다.
“일 그만둘 정도로 비엔날레에 진심이야. 그런 애가 자기한테 안 좋은 일 퍼질 걸 좋아할까?”
메시지를 부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압박해야 했다.
“내 밑에서 온갖 잡일 하던 애야. 멍청하긴 해도 여기서 더 나가면 자기도 위험해진다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야.”
“…….”
김수혁이 입을 다물자 최규서가 최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 시선 돌릴 뉴스만 챙기면 돼요. 시간은 많이 남아 있어요.”
베네치아 비엔날레 개막까지는 반년.
여론을 수습하고 비엔날레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지금까지의 평가를 반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일이 네 뜻대로 흘러갈 것 같으냐.”
최영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부녀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 딸이라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이젠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안다고 판단했는데 지금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집쟁이로 키웠구나.”
최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 떼. 명령이다.”
최영수가 더는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듯 안방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무시당했단 생각에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한 최규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규서야. 아버지 말 따라라. 아버지가 틀린 말 하더니?”
어머니가 타일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선 그녀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화를 삭였다.
“여보. 여보.”
뒤따라 나온 김수혁이 아내를 달랬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최규서가 까득 이를 갈았다.
“내 방식대로 처리할 거야.”
늙은 아버지는 겁이 많아졌다.
판단력도 흐려지고 자존심도 없는 노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최규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풀어내,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보란 듯이 증명하고자 했다.
부부가 대문을 나서자 박 기사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백설기한테 연락해 둬. 만나자고.”
“네. 무슨 일이라고 할까요?”
최규서가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 박 기사를 노려보았다.
감히 자신이 보자고 하는데 용건을 묻는다니 기가 찼다.
“그게 저.”
“나오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당황한 박 기사가 서둘러 차를 몰기 시작했다.
‘가만두지 않겠어. 백설기고 장미래고.’
인터넷에 올라온 시건방진 글이나 아버지도 용서할 수 없었다.
* * *
불한당 2차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 한국 작가들이 다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합.”
장미래, 유라임, 백설기는 왕성한 식욕을 보이는 고훈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귀엽다.”
유라임의 말에 백설기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훈 옆에 앉은 마은찬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이 생소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더벅머리를 정리한 덕에 전보다는 인상이 좋아졌지만, 첫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차림도 남루하고 행동도 기이했다.
부우웅- 부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전 직장 동료인 박지호 대리였다.
“저 잠시.”
“응.”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선 백설기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박 대리님.”
-아, 과장님.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죠?
“네. 뭐. 무슨 일이신데요?”
-아, 그게. 아이참. 이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다름이 아니라. 대표님이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셔서요.
백설기가 숨을 골랐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불안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거늘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지금 베네스에 있어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래요? 하참. 과장님도 아시다시피 이분이 말해주는 분이 아니라서.
“…….”
-이건 정말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대표님이 한 말 그대로 전하는 건데요.
“네.”
-나오지 않으면 후회하실 거라고. 아이고 제가 별말을 다 하네요.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직접 연락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중간에 낀 박지호를 나무랄 이유는 없었다.
최규서의 용건은 하나뿐이었다.
이번 일에 소스를 제공한 사람이 백설기라고 확신하니, 협박해서라도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마음을 굳게 먹었거늘.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한편.
본 요리가 나올 때까지 백설기가 자리로 돌아오지 않자 장미래와 유라임이 걱정스레 여겼다.
“설기 어디 갔어?”
“전화 울리던데. 모르겠어요. 통화가 길어지나.”
장미래가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빠져나와 식당 밖으로 나서자 백설기가 건물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설기야.”
본인을 부르는 소리에 백설기가 눈주변을 옷으로 닦아내곤 일어났다.
“울었어?”
“아니에요. 들어가요.”
장미래가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백설기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무슨 일인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거늘.
장미래와 눈을 마주한 순간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한이 흘러넘치고 말았다.
장미래는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 후배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이대로는 함께하는 자리에 돌아갈 수 없을 듯해 고수열에게 메시지를 보내두곤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간신히 진정한 백설기는 그간 있었던 일을 장미래에게 모두 전했다.
평소 최규서를 좋지 않게 여기고, 그녀에게 상을 빼앗긴 적 있었던 장미래로서도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걔 진짜 못 쓰겠다. 제정신이야?”
그동안 해온 짓으로도 모자라 타인의 꿈을 조건으로 협박이나 해댄다니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나올 거라고.”
장미래가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백설기에게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어떤 일인지 잘 알기에 속이 타들어 갔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꿈이었던 화가로서의 삶을 이룰 기회였다.
참고 참아 마침내 제 손으로 쟁취한 기회였다.
그런 일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규서와 함께 일했기에 그녀와 다를 바 없다는 입소문이 번지면 그녀에게도 좋을 일이 없었다.
작품을 선보이기도 전에 선입견이 생길 테고, 나아가서는 지금 최규서가 당하는 것처럼 하차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생겨날 터였다.
“저.”
백설기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포기 못 해요.”
“…….”
“그 사람 때문에 5년을 참았어요. 아무것도 못 하고 멍청하게 뒤치다꺼리나 했어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당연하지.”
장미래가 백설기의 손을 잡아주었다.
“근데.”
백설기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지금 한국관이랑 다르잖아요.”
백설기의 말대로 현재 한국관은 협회라는 거대한 힘으로 부당히 운영되는 곳이었다.
반면 공동 전시관은 그런 협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예술가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최규서의 비서로 활동했던 사람이 있다면 뜻이 퇴색될 터였다.
“아니야.”
장미래가 백설기의 손을 꼭 쥐었다.
“너도 피해자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해.”
“…….”
“최규서가 그 짓 할 때 네가 뭐 얻은 거 있어? 뭐 받아먹었어?”
“그렇진 않지만…… 도운 것도 사실이에요.”
백설기가 슬며시 손을 빼냈다.
“고마워요. 선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설기야.”
“이제 정리가 좀 됐어요. 사실 계속 걱정해 오던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뒀거든요.”
장미래가 턱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랑 어제. 훈이랑 무궁화 그리면서 생각했어요. 얘는 비엔날레가 목적이 아니구나. 상이 목적이 아니구나.”
“…….”
“아직 어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았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그게 진짜 화가지 않나? 하고. 그 진심이 통해서 다들 그렇게 사랑하는 거겠죠.”
고작 이틀뿐이었지만 한국관 주변에 무궁화를 그리는 일은 행복했다.
단순히 돈과 명예가 아니라 가슴으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론 진지하게.
때로는 웃으며 무궁화를 그리던 고훈을 보면서, 백설기는 불한당에 피해를 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년이 지키고 싶어 하는 한국관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먼저 말할 거예요. 비서였던 사람이 매스컴에 나서서 이야기하면 일이 더 커지겠죠.”
백설기가 작게 웃었다.
“불한당은. 포기할게요.”
장미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백설기를 위한 일인지 당장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건 허락 못 하겠구나.”
“선생님?”
문자 메시지를 받았던 고수열이 장미래와 백설기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