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2화
54. 용기(2)
지상파 방송을 통한 대한예술협회 비리 관련 보도는 삽시간에 여론을 들끓게 했다.
동생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던 최영수 대한예술협회 회장도 보좌진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러지 않으면 대회 자체를 열 수 없으니까.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식사 자리에서 대한예술협회를 비판하는 뉴스가 나오자 비서와 가정부가 불똥이라도 튈까 눈치를 보았다.
최영수는 국을 한 수저 떠먹곤 입을 열었다.
“오늘 북엇국이 괜찮네.”
가정부가 어색하게 웃자 최영수의 동생 최만수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렇게 있어도 돼?”
“그럼?”
“그럼이라니. 뭐라도 해야지. 어떤 놈이 꺼낸 말인지 알아보든가.”
최영수는 대꾸하지 않고 한 번 더 국을 떠먹었다. 그러고는 가정부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번 김치가 괜찮던데.”
“아, 예. 꺼내 오겠습니다.”
최만수가 인상을 썼다.
협회가 여러 공모전에 수상자를 내정해 둔 일이 보도되고 있는데, 협회장이 태연히 김치나 찾으니 답답했다.
“아, 지금 밥이나 먹을 때야? 당장 대응 보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만수야.”
최영수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예순을 넘기고도 여전히 철없는 동생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큰일을 하려면 중심이 서야 한다. 작은 일에 휘청여선 아무 일도 못 해.”
“이게 작은 일이야?”
“작고 흔한 일이지.”
최영수가 입 주변을 닦았다.
“아랫것들도 지칠 때가 있는 법이야. 저들 딴에는 힘드니까 저렇게 성토라도 해야지.”
최영수는 되레 불만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저들도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불만을 가질 터였다. 여력이 남아 있기에 말하지 않을 뿐,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고름이 생기면 짜내야 해. 그래야 큰 병이 안 돼.”
“무슨 말이야?”
“적당히 떠들게 해줘야 대들지 않는다는 말이야.”
억압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때로는 숨구멍을 틔워줘야 큰일이 나지 않았다.
최영수가 가장 우려하는 일은 쌓이고 쌓인 불만이 갈 길을 잃고 부풀 대로 부푸는 일이었다.
그러다 터지면 감당할 수 없었다.
믿을 건 머릿수뿐인 이들이 한 마음으로 모이기 전에 적당히 달래줄 줄도 알아야 했다.
“기다려 봐.”
뉴스가 났으니 사람들은 협회를 욕할 터였다.
세상과 본인들의 무력함을 한탄하고 술안주로 삼아 그렇게 또 노예로 살아갈 것이었다.
뉴스에 났으니 잘 해결되겠지.
누군가는 나서겠지.
그리 생각하며 각자의 삶에 충실할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인과 크게 상관없는 일에 집중하기에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지배자는 노예들이 다른 생각을 하도록 편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과거에도 몇 차례 공모전 관련 일로 협회를 비판하는 뉴스 보도가 있었지만 크게 달라진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무마할 수 있고, 이목을 끌 새로운 뉴스는 얼마든지 있었다.
수상자가 내정되어 있어서 불만이라는 업체도 지원금을 받으려면 이 이상 대들 순 없었다.
“김 비서.”
“네.”
“하던 대로 처리해.”
“예. 알겠습니다.”
“밥 먹자.”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최영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문을 펼쳤다.
대한민국 양대 일간지 성한일보와 대한일보를 함께 구독하던 그는 성한일보을 읽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예술협회에 관련된 일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각 공모전 운영위가 지원금을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활동해 왔음을 지적하는 기사가 게시되어 있었다.
차를 한 잔 마시며 햇살을 즐긴 최영수가 대한일보를 집어 들었다.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최영수 협회장 운영비 개인 부동산 투자로 논란]
[한국 예술인 조합, 공금 유용 논란의 최영수 협회장 고발]
미술계 거장 서인호가 20일 최영수 대한예술협회 회장을 공적자금 유용 혐의로 형사 고발하였다.
한국 예술인 조합 대표 서인호는 최영수가 협회 공금을 사적으로 활용해 부당 이익을 취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서인호는 “지난 20년간 대한예술협회는 예술인을 상대로 과도한 회비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내 공모전 및 전시회에서 불이익을 가해왔다”며 “최영수 회장과 협회의 부정이 명백히 밝혀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국 예술인 조합은 최영수 회장의 직권남용 및 공금 횡령 혐의 정황과 증거를 송파경찰서에 제출했다.
‘서인호?’
최영수가 신문을 구기자 때마침 비서가 찾아왔다.
“회장님.”
숨이 가뿐 것을 보니 고발 관련 문제로 찾아온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서인호가 일을 낸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확한. 억!”
정강이를 걷어차인 비서가 고통을 호소했다.
“같습니다?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있었어!”
최영수가 냅다 소리쳤다.
어제 있었던 일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도 가당치 않거늘,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니 화가 솟구쳤다.
“그, 그게. 비공개로 처리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그게 말이 돼!”
정치적 목적을 띤 고발은 대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자들을 최대한 모아두고 고발장을 제출해야 효과가 있었다.
고발 이유를 명백히 알리면서 여론을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루 뒤에야 기사를 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것들은 어떻게 알았어!”
대한일보 신문을 흔들어 보이던 최영수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이것들이…….’
대한일보가 관련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면 예술인 조합에서 소스를 제공했단 뜻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최영수가 끙끙대는 비서를 다그쳤다.
“정경일이한테 연락해. 당장!”
“예, 예!”
* * *
대한예술협회의 비리가 이틀 연속 보도되었다.
첫날 당선작 금품 거래 의혹에 더하여 두 번째 날, 대한일보가 1면에 게시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고수열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 서인호가 나서서 협회를 고발한 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인호가 저럴 정도면 대체 얼마나 심한 거야?
└협회 지원금이 무슨 1년에 40억이나 돼.
└이해가 안 가. 20년 동안 40억씩 해 먹었단 뜻이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하다고 봐야지. 이 나라 협회는 진짜 다 없애야 해.
└협회가 있어야 권익 보장이 되지.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데, 견제 수단이 없는 게 문제임. 미술계에서 대한예술협회 눈치 안 보고는 못 사니까 지들 멋대로 하는 거잖아.
└최영수 이 개자식은 대체 왜 안 짤리냐? 잊을 만하면 뉴스 뜨는데 왜 계속 협회장 자리에 앉아 있냐고.
└이러니까 다들 해외로 나가지.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던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백설기 그리고 많은 예술인이 분노한 만큼 대중도 분개한 듯했다.
‘더 해줘야 해.’
김지우는 대중이 이 사건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다.
언론과 정‧재계 인사들이 다수 엮인 일이니만큼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 문제가 꾸준히 주목받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제기할 문제가 차고 넘침에도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가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일을 계획하였다.
김지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시.
파리는 아침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해내야 해.’
유명 미술 잡지 보자르에 처음 연재하는 날이었다.
데미안 카터를 고발한 일로 한번 주목을 받았고, 큰 잡지에 게시한다고는 하나 여론을 움직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한국관 일에 신경 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도 몰랐다.
되레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김지우는 초조했다.
‘알려져야 하는데. 적어도 조직위 위원들에게라도.’
깍지를 꼈다가 풀기를 반복하던 김지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욕도 엄청 먹겠지.’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에 관련한 문제를 해외에서 다루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부끄러운 일을 왜 알리느냐고 욕할 수도 있었다.
김지우 또한 이러한 일을 해외로 가져와 다루는 걸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비단 한국관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강행했다.
“……후.”
김지우는 초조함을 애써 억누르며 다음 기사를 준비했다.
한편.
아침 일찍 일어난 랄프 루퍼스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베네치아의 수면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렸다.
반년 앞으로 다가온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준비하느라 피곤이 쌓였으나 열정은 날로 더해갔다.
전날 사 둔 빵에 버터를 발라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며 주요 일간지를 훑어보던 차.
김지우의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국가관 운용]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가관을 비판하는 논조의 제목이었다.
국가관을 담당하진 않으나 본 전시의 총감독인 랄프 루퍼스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당 칼럼을 읽기 시작한 랄프 루퍼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계 미술인의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가관은 그 명성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내년으로 다가온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유독 많은 예술가가 참여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수열, 장미래, 고훈, 앙리 마르소가 함께한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관이 단연 물망에 올랐다.
작년 대한민국에서 활동을 재개한 고수열은 유럽, 북아메리카 순회전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일으키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증명했고.
작년 말 전 세계 동시 전시회를 기획하여 큰 성공을 거둔 장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유별한 우정을 과시하여 지난 3년간 미술계 크고 작은 일을 이끌어 온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어떤 하모니를 보여줄지도 관심사다.
필자는 이들이 한국관과 프랑스관을 두고 따로 공동 전시관을 설립한 경위를 취재하던 차,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흠.”
한국관이 그동안 협회장의 취향대로 운영되어 왔다는 문단에서 랄프 루퍼스가 안경을 찾았다.
대한예술협회장이 금품을 대가로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예술감독, 작가 자리를 주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협회장의 딸 부부가 커미셔너와 예술감독, 작가를 모두 맡았다니 랄프 루퍼스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은 故백동준 화백이 투쟁 끝에 얻어낸 역사적인 공간이다.
故백동준 화백은 “내 나라의 파빌리온이 없으니 괜히 설움이 올라온다”라며 한탄했고 이후 비엔날레가 개최될 때마다 한국관 설립을 요청하였다.
1993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에 발언력을 얻었다고 생각한 백동준 화백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에 “후미진 곳 화장실 자리라도 좋으니 한국관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되었다.
백동준 화백은 포기하지 않고 한국관 스케치와 작품을 관계자들에게 꾸준히 보냈고.
황금사자상 수상자의 요구를 더는 거절할 수 없었던 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결국 한국관을 인정하게 되며 설립되었다.
여러 국가관 중에서도 가장 후미지고 가장 좁은 전시관이지만 한국인에게는 특히나 소중한 공간이다.
과거 거장이 피와 땀, 열정으로 이룬 장소가 어찌 예술가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이들에게 유린당해 왔는지 모를 일이다.1)
김지우의 칼럼은 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고 외딴곳에 놓인 건물일지라도 전 시대의 거장이 투쟁 끝에 얻어낸 한국 미술가를 위한 장소였다.
김지우는 그런 한국관을 어찌 이리 운영해 왔냐고 비판하며 2017년도 당시 일을 끌어왔다.
1995년에 설립된 한국관은 본래 1998년에 철거하기로 한 가건물이었는데, 2017년까지 해당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밝혀진 일화였다.
재허가를 받지 않으면 백동준 화백이 투쟁 끝에 설립한 한국관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정부와 협회, 예술가들이 힘써 지켜냈지만 그동안 협회가 얼마나 안일하게 일을 처리해 왔는지 알 수 있는 일화였다.
김지우는 한국관이 그리 운용되고 있음에 한국인으로서 수치스럽고 분하다며 대한예술협회가 각성하길 요구했다.
또한 해당 일이 한국관만의 일이 아니라 몇몇 국가관에서도 관행처럼 이어져 오고 있으니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차원에서 제도를 개선해 주길 요구했다.
그 마음이 너무나 진실되고 절절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일이지.’
랄프 루퍼스가 조직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1)백남준이 한국관을 설립한 과정은 사실입니다.
한국관이 부당하게 운용되어 왔다는 것은 픽션일 뿐, 사실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