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91화 (24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1화

54. 용기(1)

고훈이 베니스에 가 있을 무렵 블랑쉬 파브르와 비다 라바니는 따로 만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훈이랑 마르소 작가님 만났겠지?”

비다 라바니가 문득 불한당 이야기를 꺼냈다.

파브르는 시계를 확인하곤 고개만 끄덕였다. 다소 토라진 표정이었다.

“아쉽다.”

라바니가 파브르를 위로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관과 불한당에 지원했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어내진 못했다.

그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파브르만큼은 꼭 합류하길 바랐다.

“안 아쉬웠어.”

“응?”

“그럴 만했어.”

앙리 마르소와 같은 무대에 서고자 매일 같이 캔버스를 채워나갔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처음에는 분해서 프랑스관과 불한당에 합류한 작가들을 찾았다.

개중에는 이름 있는 작가도, 덜 유명한 작가도 있었으나 공개된 포트폴리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국가관 커미셔너, 예술감독은 최선을 다했고.

선발된 이들에게는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블랑쉬 파브르는 국가관에 합류할 수 없는 사실보다, 이의조차 제기할 수 없이 부족한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

라바니는 묵묵히 색을 배합하는 파브르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다음엔 꼭 될 거야.”

라바니의 격려에 파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들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내리라 다짐했다.

“너도.”

파브르의 말에 라바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난 그냥 이대로도 충분해.”

미셸 플라티니를 만나고.

고훈, 블랑쉬 파브르와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비다 라바니는 자주 웃게 되었다.

도저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일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또 장학금 지원 이야기가 잘 풀려 내년부터 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기적이 여러 차례 일어났기에 더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미술 하고 싶다고 했잖아.”

“응. 그렇긴 한데.”

자신이 없었다.

고훈은 <149,597,870.696㎞>처럼 매번 멋진 작품을 보여주었고, 파브르 또한 매주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알게 되어 행복했지만, 라바니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친구로서 응원할 순 있어도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훈이나 너처럼 못 하니까. 응…….”

파브르가 라바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무슬림이란 이유로 차별받았고 그 때문에 무엇 하나 자신 있게 도전해 본 적도 없었다.

이번 불한당에 지원한 일도 고훈과 파브르가 등 떠밀어 한 일이었다.

“못 하는 건 맞아.”

“맞아. 히히.”

“웃지 마.”

“어? 아, 미안.”

파브르는 못 한다는 말을 들어도 웃음으로 넘기려 하고, 사과부터 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못 하지만 따뜻하잖아. 훈이 그림처럼 뭉클해질 때도 있어.”

“어……?”

“지금은 못 해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할 수 있어. 앙리 마르소도 그랬어. 기술적인 건 누구나 익힐 수 있다고.”

파브르가 앙리 마르소의 강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라바니도 그를 존경하니 분명 뜻이 전해지리라 믿었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했어. 넌 이미 그러고 있잖아.”

“난. ……잘 모르겠어.”

“그렇다니까.”

라바니가 시선을 회피했다.

파브르가 친구의 얼굴을 잡고 눈을 바로 마주했다.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면 알아줄 거야.”

파브르의 눈은 너무나 진지했다.

당황한 라바니가 몸을 뒤로 빼내어 시선을 피했다.

“난 그림도 잘 못 하고. 못생겼고.”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어. 생긴 것도 중요하지 않아.”

“무슬림이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랑 샤킬 오닐이랑 자넷 잭슨도 무슬림이야.”

라바니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

“축구 선수, 농구 선수, 가수. 유명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샤킬 오닐, 자넷 잭슨에 대해서는 파브르도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친구를 위해 무슬림 출신이면서도 성공한 사례를 찾으며 이름만 외워두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라바니에게 무슬림 중에서도 존경받고 멋진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라바니가 나쁜 친구가 아니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슬람교를 욕했고 파브르도 사람을 죽이고, 여성을 종속시키는 그들을 곱게 바라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라바니가 그런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할 수 없어서 찾아보았다.

여성 차별이 심각한 이슬람 국가와 테러를 자행하는 범죄단체가 왜 많은지 알아보니, 지도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샤리아(이슬람 법체계)를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샤리아는 본인을 지키는 목적에서의 폭력만을 허락했고,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 완벽히 동등한 존재로 설명했다.

그렇게 이슬람교를 조금씩 알게 되고 라바니가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친구라는 걸 직접 보고 느낀 후로 파브르는 안도했다.

소중한 친구가 나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한 덕이었다.

“나도. 너도 할 수 있어.”

라바니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파브르의 따뜻한 마음은 고마웠지만 핍박받고 경멸받은 경험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훈이가 알려줬잖아. 달리다 광장하고 뷰그레넬리 쇼핑몰에서 보여줬잖아.”

파브르가 거듭 설득했다.

달리다 광장에서는 올리비에의 부모가 무슬림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했고.

뷰그레넬리 쇼핑몰에서는 과격한 동물보호단체가 나서서 고수열과 고훈에게 개를 먹지 말라고 시위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달리다 광장은 관광지로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뷰그레넬리 쇼핑몰은 아이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할 수 있어.”

지고 싶지 않았다.

학교 애들이 지저분하고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곤충을 포기할 순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앙리 마르소처럼 되려 한다고 모욕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었다.

여태껏 들어온 폭력과 비난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무너질 수 없었다.

“지면 안 돼.”

파브르가 다짐하듯 말했지만 몇 마디 말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낼 순 없었다.

달라지는 일도 없었다.

여전히 밖에 나서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터였다.

그러나 고훈과 지금 곁에서 친구로서 격려해 주는 파브르가 있기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응.”

* * *

[불한당, 베네치아에서 첫 회담]

오늘 2030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프랑스 공동관이 첫 공식 일정을 가진다.

공동 커미셔너 및 예술감독을 맡은 방태호(쇼콜라티에 대표)는 양국이 서로의 입장을 나누고자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한국화의 거장 고수열 화백, 장미래 한국대학교 교수, 고수열 화백의 손자 고훈과 프랑스 유명 작가 앙리 마르소가 참가한 한국‧프랑스 공동관이 어떤 작품을 내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슬슬 준비하나 보다.

└해야지. 내년 5월 22일 개막이니까 이제 반년 정도 남았음.

└ㅋㅋㅋㅋㅋ기사 제목 봨ㅋㅋ 불한당이래 미쳤나 진짴ㅋㅋㅋ

└기자가 핑구 채널 구독자네

└ㄹㅇ 훈이가 방송에서 맨날 불한당이라고 하니까 이젠 다 불한당이라고 하잖앜ㅋㅋㅋㅋ

└어떻게 한국관보다 불한당이 더 기대되냐

└듣보 나오는 한국관보단 불한당이지.

└듣보라니. 최규서가 상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듣보래.

└ㅋ

└잘 아니까 그러는 거 아냐?

└링크 [김수혁 커미셔너, “최규서 작가는 한국관을 가장 잘 채워줄 인재.”]

└최규서랑 베니스 비엔날레 검색 좀 해 봐라. 기사만 수십 개다.

└내 말이. 한국관 혼자 맡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나 봄 ㅋㅋㅋ

└하. 내가 돈만 많았으면 속 시원하게 한마디 하는데.

└최규서 상 많이 받았지. 근데 미술 하는 사람 중에 누가 인정하냐? 장미래는 뭐 상 받아서 유명함?

└제발 부탁인데 적당히들 해. 안 부끄럽냐?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면 진짜 대단해지는 것 같지? 고수열이랑 장미래 봐봐. 훈이는 어떻고. 본인들은 아무 말 안 하잖아. 남편이 한 말 가져와서 대단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

└윗댓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부부가 같이 꾸민다고 방송에 나와서 미화하던데 역겹더라.

└갓직히 부부사기단 아님?

└헐. 나 돈 없어서 못 했던 말인데. 부럽다.

└이거 캡처했음. 최규서 작가 회사로 보낼 테니 작가님 앞에서 싹싹 빌기 전에 삭제해라.

└ㅋㅋㅋㅋ캡처했다면서 삭제하래.

└여기 댓 왜들 이래? 최규서 김수혁이 한국관 하는 게 뭐가 나쁜데?

└그러니까. 좀 이상하네.

└부러워서 그렇겠지. 솔직히 최규서도 고수열, 장미래처럼 우리나라 미술 알릴 사람인데.

베니스 비엔날레 관련 기사마다 최규서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었다.

미술계 병폐를 익히 아는 사람들은 최규서, 김수혁 부부를 못마땅해하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최규서, 김수혁 부부를 알게 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성공한 두 사람이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세계적인 미술 전람회에 단둘이 나서니 부러워하기도 했다.

“잘도 해놨네.”

반응을 주시하던 김지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인맥과 거래 관계를 활용하여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최규서는 한국 미술 발전의 주역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어디.’

김지우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TV를 틀었다.

지난 2주간 백설기의 제보를 기반으로 노력한 일이 결실을 볼 시간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NBC 뉴스를 지켜보던 차.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뉴스입니다. 대한예술협회가 국내 미술 공모전 심사에 부정 청탁을 받았다는 정황이 공개되었습니다. 이승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11월 4일. 국내 미술 공모전 관련 종사자 A씨가 대한예술협회의 부정 청탁 관련 정황을 제보하였습니다. 지금까지 A씨가 조직한 공모전에 금품을 대가로 상을 수여했다는 내용입니다.

화면에 음성 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사람이 잡혔다.

김지우가 간신히 설득한 미술 공모전 관련 인사였다.

-수상자가 내정되어 있으니 그대로 따르라고. 협회 지원받으려면 그렇게 해야 했어요.

-A씨는 공모전 운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협회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라며, 그간 협회가 지목한 이에게 상을 줘야 했다고 말합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러지 않으면 대회 자체를 열 수 없으니까.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미술관을 운영하기도 하는 A씨는 협회의 요구를 받지 않으면 다음 공모전을 열 수 없는 데다 협회 소속 작가를 섭외할 수도 없게 된다며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뉴스를 보던 김지우가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국내 미술 커뮤니티 중 가장 큰 곳에 접속하자 곧장 기다리던 반응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NBC 뉴스 뭐냐?

└또 지랄이네. 또.

└협회 새끼들 국전도 모자라 다른 공모전에서도 저러네.

└국전 그 난리가 나고도 협회장 안 바뀐 거 봐. 더럽다. 더러워.

└협회한테 협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는 거네?

└협회장 누구냐?

└돈 받았다는 건 뭐야. 상을 돈 받고 팔았다고?

└스펙도 돈 없으면 못 구하냐. 미친 세상이다. 진짜.

이제 겨우 첫 보도가 나왔을 뿐인데도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부우웅- 부우웅-

전화기가 울렸다.

“네, 인호 씨.”

-보고 있어요?

“네. 그쪽은 어때요?”

-내일 첫 면에 나갈 거예요.

국내 일간지 중 수위에 드는 대한일보에서 대한예술협회의 비리를 첫 면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보자르도 내일 게시해 준대요. 베니스 비엔날레 관련 비리로.”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까지 반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한국관이 정말 범죄자들로 꾸며질 수 있었다.

김지우는 결코 그 꼴을 지켜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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