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90화
53. 불한당(10)
11월 20일.
날이 제법 쌀쌀해졌을 무렵 불한당들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베니스로 향했다.
처음 찾았지만 왜 물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1)
푸른 하늘과 녹색 바다.
붉은 지붕을 쓴 하얀 건물이 굽이굽이 어우러져 있다.
운하와 맞닿은 도시라고 생각했거늘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물길이 나 있어 수상 택시나 수상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
너무나 생경한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옛 시가지에 있다는 농어 요릿집을 찾으러 나섰다.
옛 시가지는 차량이 다닐 만한 도로가 마땅치 않아 걷거나 수상 택시나 수상 버스를 이용해야 한단다.
“걷는 게 빠를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배 타봐야죠!”
베니스를 몇 번 찾았던 할아버지가 수상 버스는 속도가 제한되어 걷는 편이 빠르다고 했지만, 장미래가 단호히 나섰다.
“저도 타고 싶어요.”
나도 한몫 거들자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택시를 타자꾸나.”
버스보다는 좀 더 빠르다는 택시를 찾았는데, 택시라고 해봤자 모터 달린 작은 배였다.
곤돌라를 타고 싶었던 나와 장미래는 잠시 실망했다가 곧 차가운 바람 너머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고 말았다.
“멋있다아. 그치?”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오고 있겠지?”
“네. 출발 시간하고 도착 시간 체크해 두었습니다. 한국에서 모여서 같이 출발했으니 숙소까지 잘 모셔올 겁니다. 마은찬 씨만 따로 마중 나갈 거고요.”
몇 차례 들렀던 할아버지와 방태호는 불한당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훈아, 그거 알아?”
주변을 둘러보던 장미래가 훽 하고 돌았다.
“뭘요?”
“클로드 모네가 여기를 그렇게 좋아했대.”
인상주의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베니스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림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참으로 근사한 도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잘 그렸어. 몇 점 그렸더라?”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유람을 즐기는데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해 못 보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자 포장지 같은 것들이 수면에 둥둥 떠다닌다.
이따금 좋지 않은 냄새도 올라온다.
“껄껄. 운하 자체가 하수도 역할을 해서 깨끗하진 않아.”
인상을 쓰고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베니스의 운하가 왜 이렇게 더러운지 알려주셨다.
낭만이 식고 말았다.
택시에서 내려서 조금 걸었다.
할아버지가 몇 번 찾았던 농어 식당에 들어서자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와 장미래에게 인사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카멜리아 비앙카.”2)
관광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영어에 능숙하고 능글맞은 말도 잘 건넨다.
장미래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요?”
“여기에 당신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나요?”
미친놈이다.
“여기 있잖아요. 내 아들.”
장미래가 슬쩍 웃으며 나를 보았다.
뭔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직원이 장미래와 방태호 나를 번갈아 보곤 씩 하고 웃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음식을 주문하셨고 곧장 따졌다.
“무슨 말이에요.”
“미안. 들었잖아. 미친놈이야.”
그렇긴 하다.
어머니도 장미래를 귀여워하셨으니 거짓말 한 번 정도는 용서하실 거다.
“내년에 어머니한테 치즈 케이크 사 드려야 해요.”
“큰 걸로.”
내년 기일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치즈 케이크를 드리는 것으로 합의를 이루자 누군가 다가왔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단정히 넘긴 이탈리아 사람이다.
“저. 혹시.”
“네?”
“고수열 경 아니신가요? 한국의.”
할아버지가 반색하며 인사를 받았다. 발음이 상당히 어려울 텐데 제법 정확하게 말해서 조금 놀랐다.
“그렇습니다. 어찌 아시고?”
“2009년부터 줄곧 팬이었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장미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제법 인지도를 쌓았고 장미래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역시 할아버지는 대단하다.
2009년이라면 할아버지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쟁>이란 작품으로 참가했을 때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점심 맛있게 드세요.”
팬과 인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냅킨을 펼치시곤 고개를 드셨다.
“그러고 보니 앙리도 그때부터 할아버지 좋아했대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갔었대?”
베니스라고 하시던 할아버지가 굳이 베네치아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이곳에 왔으니 이곳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심하시는 것 같다.
나도 신경 써야겠다.
“네.”
“벌써 20년 전인데. 용케 기억하는구나.”
어렸을 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마르소는? 친해졌다면서 따로 오기로 했나 봐?”
장미래가 앙리를 찾았다.
“몰라요.”
“몰라?”
“흐흐. 조금 다툰 모양이더라고요.”
생각만 해도 불쾌하여 가만히 있자 방태호가 대신 답했다.
장미래는 놀라서 거듭 묻는다.
“왜? 왜 싸웠어.”
“출품할 것까지 팔라고 하잖아요. 학교 과제로 그린 것도 가져가고. 이대로면 갤러리 지어도 전시할 그림이 없을 거예요.”
장미래가 피식 웃는다.
“뭐야. 사랑싸움이었구나?”
“아니에요.”
정색하고 부정했지만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인 모양. 히죽히죽 웃는다.
“근데 고민되긴 하겠다. 경매로 내놓으면 마르소가 다 살 거 아니야.”
팔면 그만이라는 태도라면 큰 문제 안 될 테지만, <서리 밀밭> 이후로 경매장이 나와는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돈을 좋아하긴 해도 내가 진정 바라는 건 그림으로 교감하는 일이다.
앙리처럼 갤러리를 두고 작품을 마음껏 전시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행복하리라.
“혹시 또 모르죠. 마르소 씨보다 더 열렬한 팬이 생길지.”
“그런 사람이야 생기겠지만 그 사람이 마르소보다 더 큰 금액을 부를지는 다른 문제지 않을까요?”
“마르소 씨가 어마어마한 부자긴 해도 돈 많은 사람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훈이 그림이라고 전부 다 사진 않거든요.”
“그럼요?”
“그중에도 유독 마음에 드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그점은 방태호가 옳다.
지금까지 경매나 정찰제로 판매한 작품은 총 29점이고 마르소는 그중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을 샀다.
그 외 <거짓말쟁이 마르소>나 <자화상> 등 외부에 발표하지 않은 그림을 7점이나 가져간 것이 문제다.
“학교에서 그린 걸 가져간 게 문제예요.”
“그건 이상하구나. 그 친구가 망나니긴 해도 도둑질할 인간은 아닌데.”
“그러니까요.”
다른 아이들 그림은 돌려주었으면서 내 그림은 왜 안 돌려주는지 도통 알려주질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쟁이 마르소>는 꼭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다.
“의아하긴 하네요. 마르소 씨 예전에 훈이 개인전 때 한 말이 있거든요. 훈이 그림은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래서 휘트니 비엔날레에 걸 수 있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또 그렇다.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 * *
-어떠십니까?
마르소 미술관 시공 책임자 올리버 워커가 카메라에 별관 내부를 담았다.
일이 요구한 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벽은 고훈과 놀이터 꼬맹이들을 데려다가 해바라기와 꿀벌을 그리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어.”
-알겠습니다. 혹시 변동 사항이 있으면 이번 주 안으로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
통화를 마친 앙리가 미셸과 눈을 마주쳤다.
“왜.”
“신기해서.”
마르소 미술관은 앙리가 수집한 작품을 전시할 공간이었다.
갤러리에서는 새 작품을 발표하고 미술관에서는 이전 작품과 수집품을 전시하도록 장소를 분리한 것이었다.
작품 수가 늘어나며 마르소 갤러리만으로는 전시 공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자택 별관에 보관하기에는 아쉬운 작품이 너무나 많았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
국보 혹은 그에 준하는 작품에 더하여 고수열 같은 현세대 거장의 작품도 소장하였고 그것은 시대순에 따라 전시될 예정이었다.
“설마 별관까지 만들 줄은 몰랐지. 훈이가 그렇게 좋아?”
“시끄러워.”
미셸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멍청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천재 소년의 그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닮은 친구를 만나 기뻐하고 있었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앙리와 고훈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투철한 노력가였고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을 여의었다.
둘 다 어느 한쪽에선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본래 성격인지.
아니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앙리 마르소는 변하고 있었다.
캔버스와 자기만 알았던 남자가 고훈을 만난 이후로 조금씩 웃고 화내는 등 감정 표현이 잦아졌다.
건강을 챙긴답시고 고훈에게 빡빡한 일정을 강요한다든가.
그랜드 아트 투어에 해당하는 미술전에서 모두 수상하는 걸 축하한답시고 수행평가로 제출한 그림을 모아 별관을 만든다든가.
방법은 미숙했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미셸은 본인과 모친 셰리 가도에게만 마음을 열었던 앙리의 세계가 점차 확대해 나가는 것이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서운했다.
“난 뭐 없나.”
미셸이 의자에 등을 파묻고는 뒤통수 뒤로 깍지를 꼈다. 뉴스 기사를 읽던 앙리가 고개를 들자 턱을 당겼다.
“뭘.”
“아니야.”
“말해.”
“싫어.”
앙리가 다시 기사로 눈을 돌렸다가 인상을 썼다.
“빨리 말해.”
“아니라니까?”
* * *
1)두칼레 궁전,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1, 캔버스에 유채
2)꽃 이름. 꽃말은 사랑스러운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