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9화
53. 불한당(9)
블랑쉬 파브르와 비다 라바니가 <149,597,870.696㎞> 앞에서 입을 쩍 벌렸다.
칠흑 같은 어둠.
나뭇가지에 걸린 단풍잎만이 석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라 단풍잎 뒷면은 그림자가 지고 배경이 노을로 물들어야 할 텐데, 그 반대였다.
비다 라바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인도 모르는 사이 울긋불긋하게 빛나는 단풍잎에 은연히 마음이 동하였다.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일을 마친 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의 노을을 추억하게 되었다.
블랑쉬 파브르 또한 소년과 다르지 않았다.
붉은색과 노란색 때때로 흰색으로 빛나는 단풍잎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슬펐다.
아버지가 데리러 오기까지 홀로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 놀이터에 쪼그려 앉아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들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졌다.
아버지는 땅을 보고 있는 파브르에게 곤충이 그렇게 좋냐고 물었지만 사실 소녀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브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비다 라바니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두 친구가 눈물을 보이자 처음에는 당황했던 고훈이 티슈를 가져다주었다.
“좋다.”
블랑쉬 파브르가 눈주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림 보고 눈물 난 적은 처음이야.”
“나도.”
비다 라바니도 동조했다.
“마르소 작가님 그림은 되게 부럽고 멋진데 훈이 그림은 뭔가 따뜻해.”
비다 라바니는 앙리 마르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영웅의 작품은 너무나 경이로워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다.
반면 고훈의 작품은 뭔가를 떠올리게 했다. 경험의 기억이 아니라 경험한 감정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훈이는 컬러리스트야.”
고훈이 슬며시 웃으며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잘 쓴 것 같아. 엄청 공들였거든.”
“어떻게?”
파브르의 질문에 고훈이 17점의 연습작을 떠올렸다.
원하는 색을 찾지 못하여 물감을 칠하기를 반복한 끝에 물감층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물감을 쌓았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하다 보니까 의도하고 한 것보다 잘 나오더라.”
“물감을 어떻게 쌓아?”
라바니가 물었다.
“말리고 바르고. 혹은 더 말랐을 때 뭉개서 칠해보기도 하고. 많이 실패하다가 하나 건진 거야.”
라바니가 다시 한번 <149,597,870.696㎞>를 바라보았다.
단풍잎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이 물감을 칠하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제목은 무슨 뜻이야?”
“지구랑 해랑 그 정도 떨어져 있대.”
“아.”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닮을 수 있으니까. 멋있다고 생각했어.”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갈래.”
블랑쉬 파브르가 초콜릿을 입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도착하면 한 시간 정도 간식을 먹으며 한 주간 있었던 일을 나누었던 터라 고훈과 라바니가 의아해했다.
“그리고 싶어졌어.”
* * *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조교수 장미래가 본인의 그림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여 보기도 멀어지기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봤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음. 아니네.”
장미래가 캔버스를 내렸다.
작년 전시회에 모든 것을 불사른 이후 줄곧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조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림이 좋았고.
꾸준히 노력하니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언젠가 뮤즈가 찾아오리라 믿는 덕이었다.
장미래는 기분을 전환하고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가우왕의 페트루슈카를 틀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대학 후배이자 조교로 있는 이나리였다.
“세상에. 세상에.”
“왔어? 커피?”
“커피고 뭐고 이게 뭐예요.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
“뭘 새삼스럽게.”
이나리가 쓰레기가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분리수거함과 쓰레기통을 보며 인상을 썼다.
외투를 벗어 놓곤 쓰레기를 치우려고 하자 장미래가 말렸다.
“그냥 있어. 나중에 치우면 돼.”
“나중에 언제요. 올 때마다 심해지는데.”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하고?”
“반년 뒤잖아요!”
“하하핫!”
장미래가 어쩔 수 없이 이나리와 함께 분리수거함과 쓰레기통을 비웠다.
손을 씻고 다시 커피를 타 자리에 앉았다.
이나리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작업실을 둘러보곤 앉을 자리가 있다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장미래는 이나리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였다.
교수로서도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화가로서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누구나 선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멋졌지만, 작업에만 들어가면 사람이 초췌해졌다.
이나리가 작업실 곳곳에 놓인 작품을 훑곤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뭐가?”
“그렇게 게으르면서 그림은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해요?”
장미래가 눈을 깜빡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몰라요?”
“그리다 보면 좀 다 귀찮아지긴 해. 아, 이거 맛있다.”
장미래가 이나리가 사 온 도넛을 우물거렸다.
푹신한 식감에 더해 안쪽에 들어 있는 포도잼이 커피와 잘 어울렸다.
“근데 무슨 일이야?”
“살아 계시나 싶어서 왔죠.”
“강의 나가고 있잖아.”
“그 강의 듣는 학생들이 선배 죽는 거 아니냐고 해서 왔다고요.”
“아하하. 그래?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이나리가 장미래를 살폈다.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참여가 확정된 이후로 줄곧 작품 활동에 매진한 터라 끼니를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좀 쉬면서 해요.”
“그래. 고마워.”
장미래가 도넛을 하나 더 집었다.
평소에도 좋아하긴 하지만 큰 도넛을 금세 먹어치우는 걸 보니 오늘도 밥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일정 있을 때마다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버텨요?”
장미래가 고개를 저었다.
“할 만해서 하는 거야. 정말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이나리가 눈매를 좁혔다.
“그냥.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계속 앞에 있는 거야. 이렇게 안 하면 안 온다?”
“뭐가요?”
“영감.”
장미래가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가리켰다. 딴에는 멋지게 보이려고 한 행동이었다.
“또 어디서 뭘 본 거예요. 학생들 앞에서 그러지 마요.”
후배에게 꾸중 들은 장미래가 풀이 죽었다.
이나리가 피식 웃었다.
장미래를 가까이에서 본 이나리는 그녀의 평범하고, 조금 부족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녀가 세계 최고 수준의 화가로 인정받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작업복은 대체 언제 세탁했는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하고,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작업실은 난장판일 정도로 게을렀지만.
적어도 그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그만한 명성을 쌓았으면 조금 쉬어갈 만도 한데 장미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몰아붙였다.
이나리는 장미래의 천재적인 면모가 과연 재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삶조차 돌보지 않고 붓을 놀리는 장미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잘 안 돼요? 이런 적 거의 없었잖아요.”
이나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응. 이번에는 오래 걸리네.”
“…….”
“괜찮아.”
장미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본인을 바라보는 이나리를 달랬다.
“조금 쉬면서 해도 되잖아요. 선배 작품이면.”
안타까운 마음에 꺼낸 말이었다.
장미래의 작품이라면 사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될 터였다.
이미 언론과 평단은 고수열, 앙리 마르소, 장미래, 고훈이 함께하는 불한당을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인 이름으로 발표할 작품이기에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이름을 앞세워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보다. 들었어?”
장미래가 네 번째 도넛을 집으며 물었다.
“뭘요?”
“설기. 백설기. 불한당 들어왔어.”
“선배까지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요. 요샌 불한당이라고 쓰는 기사도 있더만.”
“좋잖아. 아무튼. 설기 이야기 들은 거 없어? 동기였잖아.”
강의 때문에 1차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지 못했던 장미래가 백설기에 관해서 궁금해했다.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무척 인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라임이한테 듣기야 했죠. 시클라멘 그만둔 거 같던데.”
“정말? 왜?”
“라임이 말로는 최규서하고 사이가 안 좋아졌나 봐요. 자기 욕하고 다니던 것도 몰랐던 모양이에요.”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 번째 도넛을 집었다.
“그만 먹어요! 그럴 거면 밥을 먹지! 가만두면 다 먹겠네!”
“맛있잖아.”
장미래가 슈가 파우더가 묻은 손가락을 빨려고 하다가 이나리의 눈치를 보곤 티슈로 닦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헤어져서요?”
“뭐 그것도 그런데. 그림 포기하지 않았던 거잖아.”
장미래가 기지개를 켰다.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조교 활동을 하면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이나리는 말없이 장미래를 지켜보았다.
“난 너나 라임이나 설기 같은 사람이 멋있더라.”
“무슨. 저도 작품 팔렸으면 전업했어요.”
“그렇겠지.”
이나리의 말에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품 활동만으로 생계가 유지된다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장미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 일을 하면서 꿈을 좇는 이들이야말로 언젠가 빛을 본다고 생각했다.
“직장 다니면서 그림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내가 그러잖아.”
장미래가 가슴을 내밀고는 자랑스레 말했다.
강의와 연구, 개인 활동을 병행하는 본인을 향한 자부심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던 이나리가 내심 웃으며 말했다.
“결국 자기 자랑?”
“그럼. 난 대단하니까.”
이나리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말 그대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밥은 먹고 다녀요.”
“응. ……속이 좀 니글거리는데.”
“빈속에 도넛을 그렇게 먹으니까 그렇죠. 세상에. 몇 개를 먹은 거예요. 다섯 개?”
“그러고 보니 그제부터 커피만 마셨네.”
“네?”
“김치찌개 먹으러 갈까? 계란말이랑.”
장미래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