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7화
53. 불한당(7)
잠시 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관 참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시작에 앞서 공동 전시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커미셔너 및 감독을 맡은 방태호입니다.”
박수를 보내는 작가들에게서 여유와 미소를 찾아볼 순 없었다.
다시 없을 기회였다.
작품 구매가 투기로 여겨지며 무명 예술가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꾸준히 노력한 이들보다 매체에 나오는 유명인의 작품이 더 가치 있게 거래되었다.
공공사업은 명망 있는 예술가들에게 집중되었고 명성도 인맥도 자금도 없는 예술가들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방태호 역시 국제 전시는 처음이라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작가들의 얼굴에서 진중함을 엿본 방태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의 테마는 사이입니다.”
방태호가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 랄프 루퍼스가 보내온 문서를 보였다.
백설기는 입 앞에 손을 감싸고는 스크린에 적힌 ‘between’이란 단어를 곱씹었다.
“거리가 벌어지고 단절이 오다 못해 혐오가 찾아왔다는 문장을 통해 랄프 루퍼스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습니다.”
방태호는 작가들에게 서류를 나눠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러 쟁점에 의해 국가와 국가, 인종과 인종,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죠. 그는 우리 사이에 놓여야 할 것과 배제해야 할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자 합니다.”
백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랄프 루퍼스는 관계 단절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걸 종용하면서도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며.
가끔은 상대방과 나 사이에 불필요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랄프 루퍼스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랄프 루퍼스가 제시한 주제를 받아들였다.
“방금 나눠드린 책자 9페이지를 보시면 현재 시공 중인 전시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태호의 안내에 작가들이 책장을 넘겼다.
돔 형태의 건물은 2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가운데 공간과 벽을 따라 놓인 난간을 통해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1층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1층은 해변, 2층은 하늘로 꾸며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2차 오리엔테이션 때 정할 계획입니다.”
설치 부문으로 참가한 유라임이 손을 들었다.
“네, 유라임 작가님.”
“전시 위치도 2차 OT 때 정하나요?”
“2차에서 의견을 나누고 3차 때 최종결정하게 됩니다.”
방태호가 이후 일을 안내했다.
2주 뒤 베니스에서 만나 양국 커미셔너와 작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2주 뒤에 모이는 일정이었다.
팔짱을 끼거나 작게 숨을 내쉬는 등 작가들이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사실 제약 사항이 많습니다.”
방태호가 나섰다.
“주제가 명확하기도 하고. 말씀하신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타협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크기라든가 무게가 될 수도 있고. 음향도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설치 예술가들의 얼굴이 다소 침울해졌다.
“까다롭죠.”
방태호가 미소 지으며 되물으니 본심을 들킨 작가들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멋진 작품을 보여주실 분을 선발했다고 자부합니다.”
작가들도 이미 인지한 일이었다.
각자 작품으로 의견을 제시하나 하나의 담론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일이었다.
커미셔너와 예술감독이 테마를 정해둔 이상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했다.
방태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금한 일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궁금하신 일부터 답해드리겠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손을 들었다. 다들 작게 웃었고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사그라들었다.
* * *
“유라임!”
“야!”
휴식 시간, 백설기가 대학 동창 유라임에게 반갑게 다가섰다.
서로를 알아보고 오리엔테이션 도중 시선을 교환했던 터라 유라임도 반색하며 손을 잡았다.
“얼마 만이야?”
“그러니까. 잘 지냈어?”
“하. 말도 마. 어마어마했지.”
붙어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잠시 같은 소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오랜 만에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은 캔 커피를 하나씩 챙기곤 대학생 시절보다 친근히 안부를 나누었다.
“근데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뭐가?”
“너.”
“나?”
“최규서 선배랑 일하는 거 아니었어? 여기 어……. 협회랑 좀 그렇잖아.”
유라임이 말을 얼버무렸다.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에 관련하여 대한예술협회가 불한당을 언짢해하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만뒀어.”
백설기가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유라임이 손을 휘두르며 반겼다.
“잘했어. 난 네가 왜 거기 있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니까?”
선후배, 동기 사이에서도 최규서를 고깝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백설기 본인도 그러했기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맨날 너랑 미래 선배 욕하고 다녔잖아.”
유라임의 말에 백설기가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았다.
“몰랐어? 하긴. 알면 같이 안 다녔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너 예전에 어디 건설사에서 연 공모전에서 상 받았었잖아.”
백설기가 대학 2학년 시절 일을 떠올렸다.
유력 건설사가 전국대학예술공모전이란 이름으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 있었다.
상금으로 500만 원을 받고, 건설사는 백설기의 작품을 아파트 입주민에게 선물하여 기사가 난 적 있었다.
백설기에게는 처음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은 소중한 경험이자 학교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응.”
“그거 자기가 힘 안 썼으면 못 받았을 거라고 헛소리하고 다녔거든. 지가 뭐 그 건설사에 아는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백설기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헛소문을 낸 사람이 최규서였다니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원래 그래. 남보다 조금만 잘나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하거든.’
‘그런 애들이랑 어울릴 필요 없어. 지금 친하게 지내는 애들 졸업하고 볼 것 같니? 지금도 그렇게 뒷담화하고 다니는데.’
‘아르바이트 찾는다고 했지? 이번에 회사 차리는데 관심 있으면 와. 그런 애들하고 있는 것보단 얻는 게 있을 테니까.’
“너 소모임 나가고 뒷이야기도 퍼졌거든.”
“뭐라고?”
“최규서 회사에 들어갔으니까 그때 상 진짜 그런 거 아니냐고.”
백설기가 입을 악다물었다.
분한 마음으로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웃긴 건 거기 최규서도 참가했더래.”
“어?”
“나리 알지?”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학번으로 입학한 이나리를 떠올렸다.
“응.”
“걔가 학과 사무실에 지원서 낸 걸 봤었대. 빽 써서 너한테 상 줬으면 지는 왜 안 받았겠냐고. 맞는 말이지. 뭐.”
“……하.”
그동안 까맣게 속고 살았단 말에 백설기는 기가 찼다.
함께 일하며 최규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거늘 남보다도 몰랐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바닥이 없구나. 최규서.’
“지금이라도 나와서 다행이다. 진짜.”
백설기가 고개를 돌렸다.
“네 이야기 안 들려서 아쉬웠거든. 나도 그렇고 우리 중엔 제일 잘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남의 시선이 무서워서.
상처받기 싫어서.
최규서의 이간질 때문에 조금씩 거리를 두었던 옛 친구는 지금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했다.
“근데 어떻게 아무도 얘기를 안 해줄 수 있냐? 진짜 너무하다.”
마음을 터놓고 지낸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하고도 스스로 거리를 두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니야. 고마워.”
백설기가 웃었다.
‘주인공이 되면 좋겠다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농락한 최규서를 용서할 수 없었다.
* * *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김지우는 백설기와 함께 조용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백설기가 흔쾌히 포트폴리오를 넘겨주었다.
대학 졸업 이후로 활동이 없던 터라 백설기가 어떤 작품을 하는지 궁금했던 김지우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와.”
<태극기>를 접한 김지우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감각적인 구도와 붓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거친 붓 터치가 인상적이었다.
“정말 멋진데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참으셨어요?”
김지우가 진심으로 물었다.
화가라면 본인의 작품을 보이고 싶기 마련일 텐데, 어떻게 한 번도 나서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그녀와 최규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쉽게 말하진 않을 거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규서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두말할 필요 없었고, 만약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한국 미술계를 장악한 최규서를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런 민감한 이야기를 오늘 처음 만난 본인에게 털어놓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꼬시지.’
김지우는 신중히 접근했다.
“저 같으면 엄청 자랑하고 싶을 것 같은데.”
김지우가 너스레를 떨자 백설기가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미련했죠.”
“제가 진짜 보는 눈이 있거든요. 이번에 일 한번 내실 것 같아요. 정말로. 제가 이렇게 보여도 은근히 발굴한 분들 많거든요.”
“알아요. 훈이라든가.”
“훈이 기사도 보셨어요?”
“그럼요. 제일 처음 쓰셨잖아요. 정말 팬이에요.”
“아항항.”
김지우가 쑥스러워하며 커피를 마셨다.
독자를 만나는 일은 드물었고 더군다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았다.
그런데다 팬이라는 생전 처음인 말까지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데미안 카터 기사도 읽었어요.”
“아.”
“정말 멋져요. 잠입 취재 같은 거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그땐 좀 멋있었던 것 같아요. 아하하!”
“정말로요. 사치 갤러리랑 소더비, 데미안 카터까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백설기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서웠죠. 지금도요.”
김지우가 슬며시 티슈를 쥐곤 구기기 시작했다.
“데미안 카터랑 제이 조플링 같은 사람들은 징역 살고 있지만 나중에 나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후원단체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
“그래도 이게 제 일이니까요.”
김지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때는 보복이 두려워 밤잠을 설쳤고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데미안 카터 일을 외면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백설기는 김지우를 다시 보았다.
진중하고 비판적인 기사, 칼럼을 작성하는 데 반해 직접 만난 그녀는 다소 부산스러워 보였다.
또 데미안 카터 일을 떠올리자 불안한지 애꿎은 티슈를 찢는 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서워하면서도 미술계의 병폐를 고발하는 일을 본인의 과업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믿음이 갔다.
또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한 언론인으로서의 역량도 신뢰할 수 있었다.
“한국에도.”
백설기의 말에 김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네?”
“한국에도 비슷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