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6화
53. 불한당(6)
2주간 꼬박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매달린 후로 마르소와 꽤 가까워졌다.
망나니 같은 놈이긴 해도, 작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도 마찬가지인지 내게 새 작품 구상을 보여주곤 했다.
오늘은 불한당에 출품할 작품이라며 스케치를 가져왔는데, 평범한 에메랄드였다.
표현력이야 워낙 잘난 친구니 더 할 말이 없다지만.
멋진 구성력을 자랑해 온 마르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왜 말이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된다.
입바른 말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진 적이 많았고 마르소는 고갱만큼이나 성질머리가 더러우니 필시 또 싸움이 날 거다.
“솔직하게 말해.”
“정말요?”
“당연하지.”
매너리즘과 비대해진 나르시시즘이 결합한 탓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에메랄드로 보인다고 말하면 당장 달려들 주제에 말은 잘한다.
적당히 순화했다.
“별로예요.”
“뭐?”
눈을 부라린다.
“에메랄드는 많이 강조했잖아요. 다른 작품들처럼 특징이 되는 것도 아니고.”
“…….”
삐졌다.
스케치를 가져가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아마 본인도 자각하고 있을 거다.
800여 점이 넘는 자화상과 자각상을 만들어 왔으니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노력한다고 해도 한계에 봉착했을 거다.
어쩌면 이미 몇 번의 고비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활동해 왔으니 마르소 정도 나이라면 그러지 않은 게 되레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마르소.”
돌아보지도 않는다.
“마르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대꾸도 안 한다.
“앙리.”
앙리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거덕거리며 목을 돌렸다.
피자를 먹다가 파리가 나와도 저런 표정은 안 지을 거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앙리라고요.”
“뭐?”
“이제 그럴 때도 됐잖아요.”
만난 지 3년이나 되었고 제법 친해졌으니 이름 정도 부르는 거야 큰일도 아니다.
“아무튼. 지금 몇 살이에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뭐 잘못 먹었어?”
“뭔 소리야. 몇 살이냐고요.”
한 번 더 묻자 다가와 어깨를 잡고 흔들며 다그친다.
“내가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했지! 뭐 먹었어! 어? 뭐 먹었냐고!”
“아아아.”
“약 치는지 몰라서 자꾸 먹어?”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가끔 먹을 수 있는 꽃을 발견하는데,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가끔 따먹었더니 뭘 잘못 먹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약 치는 걸 안 이후로는 자제하고 있는데 아직도 의심한다.
“이거 놔요!”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어 인중을 들이박아 겨우 빠져나왔다.
제법 아플 텐데 신경도 안 쓰고 날 살핀다.
“멀쩡하다고요.”
스마트폰을 꺼내 앙리 마르소라고 검색하자 1995년 12월 12일생이라고 나온다.
오늘이 2029년 10월 30일이니 33살이다.
13살부터 꿈을 키웠다고 들었으니 거진 20년이나 활동한 것.
확실히 변화가 필요할 시기다.
“자화상 말고 다른 것도 그려보는 건 어때요?”
고개를 들자 앙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 *
불한당 오리엔테이션을 찾은 김지우가 건물 앞에서 방태호와 이인호 기자를 발견했다.
“대표님, 인호 씨.”
방태호와 이인호도 김지우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엄청 잘 지냈죠.”
김지우가 미소 띤 이인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잘 지내기엔 일이 너무 많을 때죠.”
“하하. 그렇죠. 참. 예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그래도 여기 방 대표님 이야기 들으니 더 좋은 자리 얻으셨다고.”
“네. 보자르에서 기획 칼럼 쓰게 되었어요.”
“이야. 엄청난데요? 이제 그럼 작가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인호 씨는 요새 어떻게 지내요?”
“저야 뭐 항상 똑같죠.”
“저번 기사 보니까 공부 되게 많이 하신 것 같던데.”
“아휴.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하핫.”
방태호가 이인호와 김지우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친근했나 생각하게 되었다.
“근데 참가자분들은 아직이신가 봐요?”
이인호와 안부를 나눈 김지우가 방태호에게 물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긴 하나 방태호와 이인호가 밖에 나와 있으니 의아했다.
“몇 분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은찬 씨는 사정이 있어 국내에 길게 체류하기 힘들다고 하셔서 다음에 뵙기로 했고요.”
“그분! 그분이 제일 궁금했거든요. 대학생이죠?”
김지우가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마은찬과 백설기를 떠올리곤 손뼉을 쳤다.
“네. 뮌스터 국립 미술대학 재학 중입니다.”
“아~ 유학생이구나. 대단하네요. 대표님 눈에도 들고. 뮌스터에서는 어때요?”
방태호가 선택했다면 작은 이야깃거리라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한 질문이었다.
추후에 만났을 때를 위해서라도 마은찬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었다.
“조용히 잘 다니는 듯합니다. 평소에는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준다더군요.”
“초상화요?”
“네. 훈이랑 마르소도 그려줬다고 하던데.”
“제육 빌런!”
김지우가 크게 소리쳤다.
유명 화가들의 개인방송도 간간히 챙겨보던 그녀는 고훈 방송에서 유명했던 제육덮밥 빌런을 떠올렸다.
얼마 전 방송에서 그가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단 이야기를 봤었다.
깜짝 놀란 방태호와 이인호가 눈만 껌뻑였다.
“모르세요? 제육덮밥 빌런이요.”
김지우가 의아히 묻자 방태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훈이 방송 시청자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그 사람이 마은찬이잖아요.”
“예?”
불한당 준비로 1달 가까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못했던 방태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핑구 채널 영상도 전문 편집자를 따로 구해 맡겼으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진 못했다.
김지우에게 설명을 듣고 나자 웃음이 나왔다.
“그런 줄은 몰랐네요. 훈이가 알고 있었으면 얘기해 줬을 텐데.”
“훈이가 몰라요?”
“참가한다는 말은 안 한 거겠죠.”
“하긴. 제육덮밥 얘기만 하니까.”
제육덮밥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이인호는 그저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이야. 세상 참 좁아요. 일이 이렇게 되네.”
“그럼 어쨌든 마은찬이 훈이 방송 시청자인지 모르고 뽑으신 거네요?”
“그럼요. 애초에 서류가 블라인드였으니까요. 인적 사항도 묻지 않았고.”
다른 조건 없이 공평하게 포트폴리오만으로 평가한 것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다.’
김지우는 참가자들에 관하여 자세히 모른다는 방태호를 이해했다.
“그럼 백설기 그분도 잘 모르시겠네요.”
“아, 그분은 안면이 좀 있죠.”
“어떻게요?”
“시클라멘 직원이라서요. 배움 미술관에서 일할 때는 그쪽이랑 만나는 일이 좀 있었죠.”
“최규서가 운영하는 갤러리 말씀이시죠?”
오랜만에 아는 이름을 접한 이인호가 나서서 물었다.
시클라멘은 최규서가 대표로 있는 회사로 에이전트와 매니지먼트를 겸하는 갤러리였다.
“네. 맞습니다. 최규서 비서로 일하셨죠.”
김지우가 입을 크게 벌렸다.
“아니. 어떻게요? 백설기 씨가 불한당 들어오는 걸 최규서가 보고만 있대요? 허어!”
“예? 왜, 왜 그러세요?”
“스파이?”
“하하. 설마요.”
영화 같은 이야기라 웃어넘기려던 방태호가 멈칫했다. 김지우와 이인호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닐 겁니다.”
방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포트폴리오의 우수함과 발표 당시의 간절한 표정을 떠올리며 김지우, 이인호를 안심시켰다.
“정말 절박해 보였거든요. 그게 연기라면 화가가 아니라 배우를 하는 게 맞을 거예요.”
방태호가 웃음을 더했으나 현직 기자와 전직 기자 두 사람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죠. 불한당 들어오면 최규서가 좋아할 리 없는데. 게다가 비서라면서요.”
“아, 원래 한국대 미대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 교수님하고 최규서 씨한테는 후배죠.”
“그럼 더 이상하지 않아요? 최규서랑 계속 붙어 있었단 말인데, 인제 와서.”
“꿈이라는 게 쉽게 포기되는 게 아니니까요.”
방태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제 생각엔 둘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무슨?”
“최규서 말 듣고 여기서 뭔가 얻어가려는 거 아니면, 최규서하고 뭔 일이 있었던 거죠.”
“후자라면?”
이인호가 김지우의 추측에 장단을 맞췄다.
“비서였으니까 대한예술협회 관련 이야기도 많이 봤을 겁니다.”
“사이가 틀어졌으면 불만도 많겠죠? 최규서 성질 더러운 건 유명하니까.”
이인호와 김지우는 거의 확신했다.
최규서가 미치지 않은 한 아이디어를 유출할 생각으로 사람을 심진 않을 터였다.
백설기 또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
본인 비서가 불한당에서 일하도록 가만 내버려 둘 최규서가 아니니,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혹시 남편 쪽 이야기도 알지 몰라요.”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죠. 한국관 커미셔너 선정을.”
김지우와 이인호가 한창 이야기를 풀던 중 방태호를 알아본 백설기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김지우와 이인호가 깜짝 놀라 펄떡이자 백설기도 몸을 뒤로 뺐다.
“어서 오세요.”
시간을 확인한 방태호가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딱 맞춰 오셨네요. 올라가시죠. 2층에 자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분들은 취재 나오신 기자십니다. 기자님, 이쪽이 이번에 합류하신 백설기 작가님이십니다.”
이인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일보 이인호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유력 일간지에서 나왔다는 말에 백설기가 반가워했다.
“안녕하세요. 백설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인호에게 명함을 건네받은 백설기가 난감해했다.
“어쩌죠. 지금 쓰는 명함이 없는데.”
“시클라멘 비서실에서 일하지 않으세요?”
김지우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백설기는 당황했지만 기자들 앞이라 태연한 척 미소 지었다.
“네. 얼마 전까지는요.”
“그럼.”
“지금은 그만뒀어요.”
백설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의 예상대로 들어맞을 확률이 높았다.
김지우는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능청스레 인사를 건넸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칼럼니스트 김지우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예화에 있었어요.”
“아. 김지우 기자님. 기사는 많이 읽었어요.”
예화를 간간이 찾아보던 백설기가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어떻게 묻지.’
좀처럼 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난 김지우는 백설기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한예술협회와 최규서의 비리 정황과 증거, 증언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정말요? 제 글 읽어주신 분 만나기 어려운데. 아하하!”
그러기 위해선 감정적 거리감을 최대한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방 대표님이 엄청 칭찬하시던데. 혹시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작품 이야기 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아. 괜찮을까요?”
“그럼요! 완전 영광이죠.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하시는 분하고 단독 인터뷰인데.”
김지우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