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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85화 (24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5화

53. 불한당(5)

용기를 쥐어 짜낸 한마디였거늘.

최규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표정에 백설기는 점차 위축되었다.

“내가 널 왜 데리고 왔는지 알아?”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지긋지긋한 학교에 두기 너무 아까워서 그랬어. 상 타면 앞에서만 축하하지 뒤에서는 험담이나 하잖아. 교수들? 스펙 하나 만들고 싶은 학생들 이용하는 거 뻔한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수상을 축하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규서의 도움을 받았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었다.

몇몇 교수는 보수도 주지 않고 본인 작업에 학생들을 대동하고, 그나마도 명단에서 제외하기 일쑤였다.

“그럴 바에는 내 곁에 있으면서 이쪽 돌아가는 사정도 공부하고 돈 걱정 안 하면서 여유롭게 작품도 하고. 그렇게 안정적으로 성장하길 바랐어.”

서양화를 전공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비록 최저시급으로 시작했지만 꾸준히 임금을 올려주어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최규서를 뒤치다꺼리하며 보는 것도 많았다.

“설아.”

“…….”

“알아. 네 힘으로 해냈으니 당연히 하고 싶겠지. 나도 이렇게 기쁜데 넌 오죽하겠어.”

최규서가 피식 웃었다.

“근데 사회생활 해봐서 알잖아. 전업이 쉽니?”

지망생은 정말 많았지만 아주 소수만이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중 개인전을 여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개인전도 성공을 의미하진 않았다.

수많은 지망생이 선망하지만 단 한 번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커리어를 마감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멋진 작품을 함에도 찰나조차 반짝이지 못한 이를 수도 없이 봐 왔다.

“조급해지는 것도 알아. 너무 힘드니까 이번 일처럼 조금이라도 인정받으면 기쁜 것도 알고. 그래도 난 설이 네가 오래 가면 좋겠어.”

백설기는 혼란스러웠다.

최규서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다고 해도 주목받지 못하면 뒤가 없었다.

‘걱정해야지.’

최규서가 씩 웃었다.

그녀는 백설기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본인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한국 미술계에서 일할 수 없다는 걸 백설기가 모를 리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

생계 걱정.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설사 성공하더라도 이후 일에 대한 막연함.

최규서는 그런 마음을 잘 이용했다.

어렸을 적부터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체득한 덕이었다.

억지 부리거나 다그쳐서는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 사람을 부리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보여줘야 했다.

간절한 사람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종속된 것도 모른 채.

“저.”

“응.”

백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최규서의 따스한 눈길을 마주하니 마치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잘못된 길로 가려는 자신을 바로잡아 주려는 그녀가 고맙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혼란스러웠다.

지난 몇 년이 모두 오해였다고, 실은 배려였다는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괜찮아. 실수할 수 있어. 사람이니까.”

“…….”

“정말 나쁜 건 알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거야.”

“…….”

“그리고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실수하는 것만큼 미련한 사람도 없고.”

백설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난 설이 네가 그렇다고 생각 안 해. 그랬으면 데려오지도 않았지. 나 알잖아.”

“작가님.”

최규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힘든 길 걷을 필요 있어?”

“네?”

“나 믿고 따라오면 된다고. 내가 설마 너한테 안 좋은 일 시키겠니?”

최규서는 굳이 돌아갈 필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마련해 준 평탄한 길을 그저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면 편하다고 말했다.

“그렇지?”

최규서가 답을 재촉했다.

백설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던 차 최규서가 답을 주었다.

“괜찮아요.”

“……뭐가?”

“혼자 할 수 있어요.”

최규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백설기를 노려보았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지금 무슨 짓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어요.”

백설기 고개를 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하.”

최규서가 헛웃음 지었다.

안정된 길을 두고 굳이 힘든 길을 가려는 백설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주는 먹이만 받아먹었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귀여워해 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돌아선 지금.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었다.

한편.

엘리베이터 앞에 이른 백설기는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저질렀네.’

어쩌면 최규서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따랐고 지난 5년간 후회했다.

눈 밖에 나면 전시회를 열어주지 않을까 봐 온갖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새벽에 불러내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하고 차를 끌고 나가 모셨고, 주말이라고 쉬는 경우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산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너무나 절실히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최규서에게 자기만 따라오면 된다는 말을 직접 듣자, 그동안 자신이 그녀에게 의지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자유라는 게 그렇단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거야.’

‘치열하게 싸운 사람만이 자유를 쟁취할 수 있고. 우리가 아는 예술가는 모두 그렇게 싸워 왔단다.’

‘좋은 경험이란 건 없어. 되도록 다양한 일을 경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수열 학생들에게 반복해 당부한 말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거야.’

백설기는 최규서만 자신을 이용한 게 아니라, 본인도 그녀를 이용하려 했음을 인정했다.

단지 힘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고 그래서 당한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돌려놔야 해.’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걷기로 마음먹었다.

“…….”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백설기는 주머니에 넣어둔 USB 저장장치를 꼭 쥐었다.

‘안 쓰게 돼서 다행이다.’

최규서가 혹시라도 협박하고 나섰을 때를 대비한 무기였다.

그동안 최규서가 저지른 비리 정황과 증거 일부가 담겨 있었으나, 되도록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태 언론이 최규서의 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백설기에게는 여론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도 깨끗하진 않으니까.’

최규서의 강요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녀가 저지른 일을 묵인해 왔었다.

건물 밖으로 나선 백설기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 *

“아그아그아아악.”

취재 자료를 정리하던 김지우가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방태호를 따라 한국에 온 뒤로 대한예술협회의 비리를 파헤치려고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관계자로 추정한 사람 모두 철저히 말을 아낀 탓이었다.

방태호에게서 넘겨받은 정황 증거만으로 기사를 쓰기엔 무리수가 따랐다.

“하아.”

책상에 엎드린 채 멍하니 있던 차 핸드폰이 울렸다.

방태호였다.

“네. 대표님.”

-통화 괜찮으세요?

“그럼요. 무슨 일이세요?”

-작가들하고 미팅 약속 잡았는데, 기자님도 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김지우가 벌떡 일어났다.

“좋아요! 좋고말고요.”

-하하. 모레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3시.

일정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불한당의 첫 오리엔테이션을 취재할 수 있다면 다른 일은 얼마든지 미룰 수 있었다.

“갈게요. 꼭.”

-네. 참, 그리고 이건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건데.

“네?”

-이번에 선발한 작가들 사실 그렇게 이름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35세 미만 작가를 선발했으니 그럴 만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35세 미만 예술가 중 주목받는 사람은 장미래, 최규서, 고훈 정도뿐이었다.

-가능하면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기 전에 유럽에 소개 정도는 되었으면 해서요.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그 정도야 당연하죠. 어차피 불한당에 관심이 많아서 다루려고 했어요.”

-하핫. 감사합니다. 모레 오시면 대강 포트폴리오도 보실 수 있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네!”

-그런데 그 불한당이란 이름은.

“아항항. 훈이가 자꾸 그러니까 저도 입에 붙었나 봐요. 프랑스 대한민국 공동 전시가 말이 길잖아요.”

-요샌 인터넷에서도 그래서 좀 난감합니다.

“에이. 괜찮아요. 다들 부정적으로 보진 않던데요. 뭘. 진짜 불한당은 따로 있고.”

대한예술협회와 최규서, 김수혁 부부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다행이죠. 그쪽 일은 좀 어떻습니까?

“하아. 솔직히 큰 진전은 없어요. 심증은 있는데 증거가 없으니까 어쩌지 못하고 있어요. 내부 사람이 제보해 줄 리도 없고.”

-그렇군요.

방태호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서로 힘내보죠. 모레 뵙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통화를 마친 김지우가 대한예술협회 회원 명단을 살폈다.

만나본 사람은 빨간 줄을 쳐 두었는데 이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되겠지.’

정신을 차리고자 볼을 두드린 김지우는 모레 취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에게 무엇을 물어볼지 정하려면 최소한의 사전 지식이 필요했다.

‘김영일. 유라임. 박준수.’

미술계에 오래 몸담았던 만큼 자세히 알진 못해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마은찬?’

김지우가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에 눈썹을 좁혔다.

모든 예술가를 알 순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상관없는 문서만 노출될 뿐이었다.

알 수 있는 정보는 방태호가 보내준 명단에 적힌 나이였다.

만 20살.

‘대학생이야? 대단하네.’

김지우는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마은찬이라는 대학생을 아냐고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동그라미를 쳤다.

‘백설기? 백설기는 또 누구야.’

흔치 않은 이름이라 들어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좀 당황스럽네. 모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김지우가 인터넷에 백설기라고 검색했다.

“맛있겠다.”

표면이 포슬포슬한 백설기 사진이 여럿 나왔다.

“콩은 에바지.”

여러 사진 중 서리태를 넣어 만든 백설기를 본 김지우가 고개를 저으며 뉴튜브에 접속했다.

활동 중인 사람이라면 뉴튜브에서 언급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설기 만드는 법에 관한 영상이 나올 뿐이었다.

‘올해 29살이면 한참 활동 시작했을 나인데.’

화면을 쭉쭉 내리자 최규서의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재수 없게.’

인터넷 창을 끄려던 찰나 백설기란 단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최규서의 영상 설명란에 기획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엥?”

다른 영상에도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불한당 참가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드문 이름이기도 하여 영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사람인가?’

Vlog 영상 중에 비서로 보이는 여성이 잠시 등장했다.

최규서의 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이도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에이. 설마. 최규서 비서가 불한당에 왜 들어오겠어.”

김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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