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4화
53. 불한당(4)
방태호는 면접을 본 100명 중 좋은 느낌을 받은 20명을 추려냈다.
보름 가까이 잠을 줄이고 일한 탓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지원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문장마다.
단어 하나에서도 지원자들의 열의가 묻어나왔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말이지.’
작가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할 테지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탓에 제약사항도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 여러 작가가 쏠린 탓에 규격을 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15,000명이 넘게 지원했다.
방태호는 고개를 저어 정신을 다잡고 다시 한번 지원서와 포트폴리오, 면접 기록을 살폈다.
‘백설기.’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했더니 최규서의 비서였다.
‘괜찮았지.’
백설기가 보여준 두 작품은 한국과 프랑스 국민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는데 현상보다는 그로 인해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 상태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가슴으로만 삭히던 정서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때의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방태호는 백설기가 여태 주목받지 못한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평단이 높이 평가할 만한 그림이었으며, 하다못해 관객 호응이라도 좋았을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경력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워낙에 인맥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보니 그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녀는 최규서와 함께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제법 상도 많이 탔고 작품도 좋은 만큼 최규서가 마음만 먹었다면 작은 자리라도 내주기 어렵지 않았을 터.
무슨 사정이 있을 듯했다.
방태호는 손을 떨면서도 발표를 꿋꿋이 이어가던 백설기를 떠올리고는 그녀의 이력서를 왼쪽으로 옮겼다.
첫 번째 합격자였다.
“흐.”
다음 사람을 확인한 방태호가 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유독 눈에 띈 마은찬이었다.
특별한 이력은 없었으나 흠이 되진 않았다.
35세 미만 예술가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이들 중 이렇다 할 이력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발상과 열정 그리고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있는지에 주목했고 마은찬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화가였다.
마은찬은 두 가지 초상화를 보였는데, 하나는 고훈이었고 다른 하나는 앙리 마르소였다.
마은찬은 붓과 해바라기, 펭귄, 꿀벌로 고훈을 표현했다.
줄지어 서 있는 펭귄들이 검은색 가로줄 무늬를 이루었고, 그 아래 꿀벌들을 잔뜩 그려 노란색 가로줄 무늬로 보이게 했다.
그것을 반복하여 티셔츠를 그렸고.
얼굴 피부는 살구색, 분홍색 해바라기를 잔뜩 그려 채워 넣었다.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붓이 머리카락처럼 보이게 하니, 멀리서 보면 고훈이었고 가까이에서 살피면 붓, 해바라기, 펭귄, 꿀벌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앙리 마르소도 마찬가지.
지폐, 에메랄드, 자화상, 축구공과 고양이,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징하는 물건을 때로는 점으로, 때로는 면으로 활용해 초상화를 완성했다.
‘초상화라고 해야 할지 정물화라고 해야 할지.’
마은찬이 베니스에서 어떤 작품을 내걸지 알 수 없었으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방태호는 한 번 더 고민한 끝에 마은찬의 이력서를 백설기가 제출한 이력서 위에 얹었다.
* * *
“…….”
“…….”
베커 부자를 만나고 2주 내내 싸운 끝에 완성한 결과물에 나도 마르소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손바닥을 펴 보이자 마르소도 말없이 손을 마주쳤다.
기어이 소방서를 지어야겠다고 하는 마르소를 설득하다가 홧김에 ‘왜, 차라리 영화를 찍지?’라고 비꼰 말이 시발점이 되었는데.
정말 찍고 말았다.
뮌스터 소방서 건물을 거대한 스크린처럼 활용하여 촬영분을 비추니 생각 이상으로 잘 보인다.
밤에만 볼 수 있다는 게 아쉽긴 해도 만족스럽다.
뮌스터 소방서와 똑같이 생긴 가건물을 만들고, 개벽으로 소품이나 건물 외벽, 베커 부자 등을 그려내 반복 촬영했다.
소방서 외관이 변화하고 율리안 베커와 피피 베커가 성장하는 모습이 30분 주기로 반복 상영되고 있다.
마르소가 아니었으면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다.
개벽 작업만으로도 벅찼으니 마르소가 시공사와 영화 제작사를 섭외하지 않았으면 내년은커녕 그다음 전시회를 노려야 했을 거다.
돈의 힘이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홍보팀장 피터 노이어도 어안이 벙벙하여 입만 뻥끗한다.
“가건물과 조각은 따로 전시하고 싶은데. 적당한 자리가 있을까요?”
아르센이 나와 마르소를 대신해 피터 노이어에게 물었다.
“예?”
듣지 못한 모양이다.
“촬영에 쓴 가건물과 조각을 따로 전시할 공간이 있냐고 여쭸습니다.”
“아, 예. 그럼요. 그런데, 실제 크기라면…….”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비율로 만들었을 뿐이니.”
“그렇다면 큰 문제 없을 듯합니다. 하하! 정말 놀랍네요. 이런 식으로 접근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같은 생각이다.
<변치 않는 가치>는 올해 한 작품 중에 달리다 광장 다음으로 자랑스럽다.
“우리 좀 장했어요.”
“당연하지.”
마르소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피터 노이어에게 전시 주의사항을 알려주곤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변치 않는 가치>를 멋지게 완성했다는 만족감과 그동안의 피로가 겹쳐 금방 잠들고 말았다.
“수고했다.”
잠결에 마르소가 기특한 말을 꺼낸 것 같기도 하다.
* * *
“뭐라고?”
“다른 일이 생겨서. 그만두고 싶어요.”
최규서가 백설기를 노려보았다.
베니스 비엔날레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일을 그만두겠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너 생각이 있는 애니? 지금 어떤 상황인 줄 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백설기는 고개를 숙일 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최규서는 그런 그녀가 답답할 뿐이었다. 한숨을 내쉬곤 타일렀다.
“이번 일 끝나면 휴가 줄 테니까 좀 참아.”
“…….”
“왜 대답이 없어?”
“저.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요.”
백설기는 차마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최규서가 어찌 나올지 너무나 잘 알기에 잠도 잘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설기야.”
“…….”
“나 봐.”
백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을 확인한 최규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말해봐.”
백설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최규서가 상냥한 척할 때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 잘 알잖아?”
더는 참아 줄 수 없으니 적당히 하라는 협박이었다.
백설기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저……. 프랑스.”
최규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말 똑바로 해. 뭐?”
“프랑스. 프랑스랑 공동 전시. ……하려고요.”
최규서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본인의 비서로 일하던 백설기가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에 참여하겠다니,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장미래가 연락했어?”
“아, 아니요! 아니에요!”
최규서는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백설기를 노려보았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설명하라고 재촉했다.
“너무. 너무 하고 싶어서 제가 지원했어요. 그제. 합격 통보 받아서. 그래서.”
백설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서 있을 힘조차 없어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
그 두려움은 최규서의 웃음과 함께 더욱 고조되었다.
“난 또 뭐라고.”
최규서가 일어나 사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앉아.”
“…….”
“혼내는 거 아니니까 앉아.”
백설기가 소파 끝에 엉덩이만 걸쳐 앉자 최규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너무나 상냥하여 소름이 끼쳤다.
“설아.”
최규서가 대학 다닐 적에 부르던 백설기의 애칭이었다.
“네, 네. 작가님.”
“작가님은 무슨. 우리 둘만 있잖아.”
백설기는 입을 다물었다.
“설아. 우리가 한 약속 기억하지?”
“네?”
“내가 너 개인전 열어주겠다고 했잖아.”
대답할 수 없었다.
“잊었다고 생각했어?”
고개를 저었다.
최규서는 싱긋 웃으며 백설기의 손을 톡톡 다독였다.
“내가 왜 네 맘 모르겠어. 너무 잘 알지. 나도 화간데.”
“…….”
“그래. 멋지네. 방태호 눈에는 네 그림이 좋게 보였단 거잖아.”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백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뭘 놀래. 당연하지. 태극기 보여줬어?”
“……네.”
“응. 알 것 같다. 나라도 너 뽑았을 거야.”
최규서가 백설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너무 놀라서 손을 빼려 했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좋은 그림이니까 당연히 보여주고 싶지. 이해해. 나도 내 동생 작품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네?”
“자랑하고 싶었다고. 작년에는 광주 비엔날레랑 선생님 개인전에 관심이 너무 쏠렸고. 올해는 베니스 비엔날레 준비로 좀 바쁘네.”
“…….”
“내년 일만 끝내면 얘기하려고 했거든.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말 안 했는데. 설이 서운했나 보다.”
최규서와 눈을 마주친 백설기는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정말, 자신에게 정말 잘 대해주었던 그때의 선배 같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최규서가 싱긋 웃었다.
“난 그런 욕심 있어야 한다고 봐. 내 그림 좋은데. 보여주고 싶은데. 그런 마음도 없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치?”
백설기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최규서가 그녀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난 네가 이용당하는 게 싫어.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어.”
“무슨 말씀…….”
“그렇잖아. 선생님이랑 장미래 있는데. 수진 선배 아들도 있고. 방태호가 다른 작가도 공평하게 대할까?”
“…….”
“만약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선생님 작품에 몰릴 텐데.”
“…….”
“설이 네 작품이 장식품처럼 쓰이는 거 난 마음 아파서 못 볼 것 같아.”
백설기가 고개를 숙였다.
최규서의 말대로였다.
공동 전시회라고는 해도 고수열, 장미래, 고훈이 있는 한 나머지는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커미셔너도 그들 위주로 전시를 기획할 테고 더더욱이 방태호는 고훈이 설립한 회사의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넌 주인공이 될 수 있어.”
최규서가 고개를 기울여 백설기를 관찰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눈동자는 심히 흔들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심이야.”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대학 동기면서도 자신보다 앞서나갔던 장미래를 인정할 수 없었던 최규서에게 백설기는 눈엣가시였다.
후배 주제에.
출신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그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그려댔다.
앞서가도록 가만둘 수 없었다.
“내년까지 잘 준비해서 전시회 열자. 배움 미술관에서.”
최규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백설기는 최규서의 눈과 약속의 상징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수년간 쌓인 설움이 쏟아진 탓에 목소리는 잔뜩 떨렸다.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