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83화 (23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3화

53. 불한당(3)

‘저러고 온 거야?’

의아했다.

면접장에 왔으면 최소한 남루해 보이진 않아야 할 텐데, 더벅머리의 젊은 남자는 남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흰 셔츠와 물감 묻은 청바지 차림은 꼭 작업하다가 막 나선 것 같았다.

“백설기 씨.”

“네.”

“마은찬 씨?”

“네!”

“두 분 다음 준비해 주세요.”

다음 순서를 고지받은 백설기는 다시 한번 숨을 골랐다.

면접실에 함께 들어갈 남자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유롭게 한눈팔 때가 아니었다.

며칠간 준비했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긴장감을 이겨내고자 했다.

다시 없을 기회라는 부담도, 최규서를 향한 두려움도 화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꺾을 순 없었다.

한편 마은찬도 각오를 다지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흰 셔츠를 정성스레 다리고, 오랜만에 면도도 했으며 면접관에게 잘 보이려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목욕탕도 다녀왔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된 제육덮밥을 먹진 못했지만 밥버거로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백설기 씨, 마은찬 씨. 입장해 주세요.”

백설기와 마은찬이 안내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면접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백설기는 미소를 보이며 면접관과 눈을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면접관 방태호가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했다.

‘몇 번 봤는데도 떨리네.’

백설기가 침을 삼켰다.

최규서의 비서로 활동했던 만큼 미술계 크고 작은 행사에 자주 참여했고 방태호와도 안면은 있었다.

전 배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이자 현재는 고훈, 앙리 마르소가 설립한 쇼콜라티에의 대표.

국내에서는 두루 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긴장되지 않을 리 없었다.

“백설기 씨부터 시작해보죠.”

“네.”

“지원서에 프랑스 유학 시절 이야기를 적어주셨는데. 그 경험이 이번 전시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한국, 프랑스 양국이 함께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에 언어 소통뿐만 아니라 작품 내적으로도 연결점이 필요합니다. 두 나라를 경험한 만큼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백설기 씨만의 장점은 어떻습니까?”

방태호는 백설기가 어찌 대답할지 유의 깊게 지켜보았다.

프랑스 유학 경험이 공동 전시에 어느 정도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넘치도록 많았다.

단지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여 선발할 이유가 없었다.

“작품으로 설명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허락을 구한 백설기가 포트폴리오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작품을 스크린에 비쳤다.

방태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라 트리콜로르>란 제목의 그림은 가로로 긴 캔버스에 붉은 물감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캔버스를 세워 둔 채 물감을 잔뜩 찍어 흘러내리도록 유도했다.

붉은 물감 뒤에는 손을 잡은 남녀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어두운 파란색으로 옅게 칠해져 있는데, 얼굴에 균열이 가 있어 몹시 기괴했다.

남자는 턱이 따로 놀았고 여자는 팔꿈치가 기형적이었다.

마치 관절 인형 같이 표현되어 있어 비처럼 내린 붉은 물감과 창백한 피부에 더해 우울함이 더하였다.

“프랑스 국민의 우울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감정을 충분히 전달받았기에 방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설기의 말을 경청했다.

“붉은 비가 창살이 되어 단절감을 주고 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두 사람이 자유를 박탈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빈 배경을 하얗게 칠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타인과 평등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프랑스 국기에 사용된 색을 활용했다는 말이었다.1)

인형처럼 보이는 관절은 프랑스 국민들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백설기는 다음 작품을 보였다.

<태극기>란 제목이었다.

두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남녀는 엎드린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2)

입술이 닿을 듯 닿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는 왼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오른손으로는 어깨를 감싸며.

남자는 여성의 머리카락과 허리에 손을 얹었다.

기름때 묻은 남자의 손가락과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여자의 손가락이 사괘처럼 보이고.

여자의 파란 머리카락과 남자의 붉은 얼굴은 태극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애절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백설기가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방태호의 귀에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서술성이 대단한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전달되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하여 백설기의 깊은 사색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우와.’

함께 있던 마은찬도 넋을 놓은 채 백설기의 그림을 감상했다.

대단한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최근 그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뒤흔든 그림은 없었다.

“이 외에도 국기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그리고 있으며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에서도 국민 정서를 담은 구상화를 전시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프랑스에도 멋진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설기가 발표를 마치자 마은찬이 손뼉을 쳤다.

좋은 그림을 보여준 화가를 향한 선의와 경의를 표한 행동이었다.

설마 경쟁자에게서 박수를 받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백설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얘 뭐야?’

물개처럼 해맑은 눈으로 박수를 보내는 마은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태호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옮겨 마은찬에게 질문했다.

“마은찬 씨는 뮌스터 국립 미술대학에 다니신다고.”

“네!”

“작품 활동에 지장은 없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되면 휴학하면 됩니다!”

발표를 끝내고 간신히 마음을 진정한 백설기가 마은찬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한 학기 휴학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할 수만 있다면 더한 일도 해야 했다.

“전시 경험이 없으신데. 길에서 초상화를 그리셨다고요?”

“네! 아르바이트로 1년 정도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5~6명 정도는 그려요. 많을 때는 하루에 두 번 이상이고요. 다들 좋아해요.”

활기찬 태도는 마음에 들었지만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땅한 전시 이력도 수상도 하지 못한 대학생을 면접장에 부른 이유는 그의 재밌는 화풍 때문이었다.

방태호는 마은찬이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슬쩍 눈길을 주곤 고개를 들었다.

“그럼 준비하신 프레젠테이션 들어보도록 할게요.”

* * *

“안 된다니까요.”

“돼.”

“안 돼요.”

“된다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상당히 고단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툰 끝에 이제 겨우 진척을 보이던 차.

마르소가 지금까지 한 작업물을 버리고 전혀 다른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타일렀다.

“앞에다가 작게 하기로 했잖아요.”

“너도 통행 문제만 없으면 크게 하고 싶었잖아.”

“환경이랑 어울려야 한다면서요.”

“꼭 원래 있던 건물에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소방서를 새로 짓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안 될 게 뭐 있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새로 지으면 상징성이 없어지잖아요. 그 건물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고요.”

“물리적으로 붙어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야. 의미만 이어지면 돼.”

“그러니까 환경하고 어울려야 한다니까?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그대로 헤어지고 나서, 할아버지께 오늘 있었던 일을 하소연했다.

즐거운 듯 껄껄 웃으신다.

“양쪽 다 그럴듯하구나.”

“하나도 안 그럴듯해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타협하고 싶지 않은 게지. 훈이 너도 처음에는 소방서 앞에 설치하고 싶어 했잖으냐.”

그러긴 했다.

마르소가 합성한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이었는데, 소방서 입구에서부터 건물에 이르기까지 타임라인을 만들고 싶었다.

걸어가면서 자연스레 뮌스터 소방서의 변천사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마르소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집을 부린다.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개벽으로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르소는 답을 찾은 게 아니고?”

“소방서 10개를 짓는 게 답은 아닌 거 같아요.”

“잉?”

마르소가 내놓은 답은 아주 넓은 공터에 소방서를 여럿 짓는 일이다.

그러면 계속 걸어가면서 소방서와 베커 부자의 변화 과정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체 얼마나 넓은 땅을 쓰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다 할 시간도 없어요. 주민들도 싫어할 테고요.”

“그건 그렇구나.”

할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신 듯하다.

“궁금하기도 하고.”

“…….”

“껄껄. 어디 기대해 보마.”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몰라도 마르소 말대로 하진 않을 거예요.”

방으로 돌아와 방송을 준비했다.

방태호가 바쁜 탓에 뉴튜브 영상을 못 올리고 있는데, 편집자를 구하기 전까지는 생방송이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방송을 켜고 사람들이 충분히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최근에 즐겨 듣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틀어두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4,000명이나 접속해 있다.

“안녕하세요.”

└훈하!

└핑하!

└이렇게 방송 자주 해도 괜찮아?

└포브스 선정 방송 열심히 하면 불안해지는 채널 1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랑 베네치아 비엔날레 준비해야 한다면서.

└학교도 다니고.

└놀이터도 하고.

└놀이터가 뭐임?

└애들이랑 노는 거. 달리다 광장처럼.

“괜찮아요. 방금도 마르소랑 일하다가 왔어요. 쉴 때 하는 거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지 않아도 바쁠 때인데 방송까지 하면 다른 일에 소홀해질까 걱정하는 듯하다.

└방송도 일이잖앜ㅋㅋㅋㅋ

└아니, 다른 거 걱정하는 게 아니라 건강 걱정하는 거라곸ㅋㅋ

└자기 몸 걱정 안 하고 일하는 건 천재들 특징인가?

└훈이 아직 13살이에요. 무리하면 안 돼요.

“여러분하고 노는 거잖아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쉬는 거라고 말하자 시청자들이 물음표를 마구 올렸다.

└아직 어려서 그런데 나이 더 먹으면 골병들어.

└잠은 푹 자고 있어?

└제육덮밥 먹었다!!!!

└마르소하고 일하는 건 어때요?

제육덮밥 빌런, 아니, 마은찬이 드디어 제육덮밥을 먹은 모양이다.

뮌스터에서 돌아온 다음 날 생방송에서 시청자가 초상화를 그려주었단 말을 꺼냈는데, 마침 마은찬이 호응해 주었다.

제육덮밥 빌런이 마은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나도 다른 시청자도 놀랐다.

매번 제육덮밥 먹고 싶다는 채팅만 쳐서 AI나 채팅 로봇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먹었냐고 물어보려던 차에 마르소 빌런이 마르소와의 일을 물어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려 버렸다.

“들어보세요.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작품을 발표하기도 전에 아이디어를 공개할 순 없어서 대강 얼버무리며 이야기를 전하자 다들 키읔을 도배 웃는다.

기분이 조금 풀린다.

* * *

1)파란색은 자유, 하얀색은 평등, 빨간색은 우애를 상징한다.

2)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포스터에서 모티프를 얻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