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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80화 (23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0화

52. 애벌레와 제육덮밥(5)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도 20대 초반이지 않을까 싶은 앳된 인상이다.

부러졌는지 테이프로 감아둔 안경다리가 눈에 띈다.

더부룩한 머리카락은 물감이 묻은 채로 굳어버린 붓 같다.

삐쩍 말라 도드라진 광대뼈, 버짐 핀 피부, 각질이 올라온 입술까지.

한눈에 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다.

“…….”

땅에 떨어진 낡은 이젤과 화구통, 간이 의자를 황급히 챙기고선 벌떡 일어났다.

“진짜. 진짜 고훈이야!”

남자가 다가서려고 하자 아르센이 그를 저지했다.

“예의를 지켜주시죠.”

남자가 나와 아르센을 번갈아 보곤 입을 크게 벌렸다.

“아항항.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뉴튜브 구독자거든요.”

스마트폰을 꺼내 조작하더니 화면을 보여주었다. 핑구 채널을 구독했단 표시를 갈라진 액정 아래로 볼 수 있었다.

그리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방금 넘어져 금이 간 건 아닌 듯하다.

“허이이.”

기이한 소리에 고개를 들자 남자가 오른쪽을 보고 뺨을 감싸고 있었다.

“앙리! 앙리 마르소잖아! 미친. 개잘생겼어. CG?”

이 당황스러운 남자의 너무나 솔직한 감상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 상황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마르소도 시선을 주었다.

자기 팬이란 걸 인지한 모양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게 대체 웬일이야? 이쪽으로 다니길 진짜 잘했다.”

남자가 다급히 화구통을 열어 얇은 도화지를 꺼냈다. 재질이 작품 하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습작용 종이가 아닐까.

“그림 그리세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인 좀 해줄 수 있어? 나 진짜 진짜 좋아하는데.”

“그럼요. 성함이 어떻게 돼요?”

“마은찬.”

이름을 적어서 건네자 그것과 나를 번갈아 보다니 또 웃는다.

처음에는 너무 놀란 탓에 당황했지만 나쁜 사람 같진 않다. 되레 웃음 가득한 얼굴에 친근감을 느낀다.

“이런 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일하다가 집에 가는 중이었는데. 진짜 너무 신기한 게 평소에는 안 다니던 길이거든. 근데 오늘따라 왠지 돌아서 가고 싶은 거야.”

그리고 날 만났다는 듯 두 손을 뻗었다.

“쓰러진 것 같았는데. 괜찮아요?”

“응. 난 튼튼한 편이니까.”

전혀 안 그렇게 보인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

“일이요?”

“응. 이 주변에서 초상화 그리거든. 아, 그려줄까? 공짜로 해줄게.”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기왕이면 앙리 마르소도 같이.”

“감사하지만 돌아가 봐야 해서요.”

할아버지한테 저녁 먹기 전에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했고 날도 조금 어두워졌다.

정중히 거절하려던 차 마르소가 다가왔다.

“얼마야.”

마은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대체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

“어? 한국말 할 줄 아시네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얼마냐고.”

“아니에요. 어떻게 돈을 받아요. 잠깐만요.”

마은찬이 간이 의자를 펼치곤 손으로 먼지를 툭툭 털었다.

앙리 마르소는 그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더니 아르센을 보았다.

아르센과 수행원들은 위생을 병적으로 챙기는 고용주를 위해 곧장 호화로운 의자를 가져왔다.

달리다 광장에서도 그러더니 의자를 아예 가지고 다니나 보다.

“어…….”

“값은 실력 보고 치르지. 뭐 해. 와서 앉아.”

“돌아가기로 했잖아요.”

마르소가 시계를 확인했다.

“30분 안에 끊어.”

“맡겨주세요!”

* * *

‘와. 한국말 진짜 잘해.’

마은찬은 한국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앙리 마르소가 신기했다.

그의 눈은 에메랄드를 연상케 하여 가지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오늘은 반만 넘겼네.’

매번 화제가 되는 앙리 마르소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확인한 마은찬이 해맑게 웃었다.

그 옆에 뚱하니 앉아 있는 고훈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거봐. 운 좋은 편이잖아.’

마은찬은 사랑하는 두 화가를 앞에 두고 차분히 연필을 움직였다.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온 1년간 마은찬은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실물보다 조금만 더 잘 그려주는 것.

과하게 미화하면 되레 싫어했고 똑같이 그리면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잘생겨 보이도록 그리고 거기에 밝은 분위기를 얹어 주는 걸 좋아했다.

‘넘어지길 잘했지. 안 넘어졌어 봐. 훈이랑 앙리를 그릴 수 있었겠어?’

이젤과 간이 의자 화구통 등을 낑낑대며 들고 가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은찬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편 모델이 된 고훈도 마은찬을 관찰하고 있었다.

추레한 외관과 낡은 도구로 그리 좋지 못한 환경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도 무척 행복해 보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연필을 움직이는 그는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착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절박하게 매달리는 앙리 마르소나 본인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 심심하시면 노래 들으실래요?”

“필요 없어.”

마은찬이 모델을 배려해서 음악을 권했다.

그러나 고훈과 나란히 앉은 초상화가 목적인 앙리 마르소는 불필요한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부탁할게요.”

무안해하던 마은찬이 고훈의 대답에 밝게 웃었다.

“그럼 한 곡 해볼게. 내가 또 한 노래 하거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주리라 생각했던 고훈이 되묻기도 전에 마은찬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선곡은 제멋대로였다.

유행하는 아이돌 그룹 노래를 부르기도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가수의 히트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길거리에서 그림 그리며 노래하는 그는 무척 이상했다.

그리 잘 부르지도 않는 노래를 저렇게 즐겁게 부르니 웃기기도 하고 괜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 앙리 마르소와 다투면서 꽁했던 마음이 어느새 풀리고 말았다.

“참. 근데 진짜 포테이토 피자를 그렇게 좋아해?”

노래하던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네. 좋아해요.”

고훈이 마르소를 한 번 째려보곤 답했다.

“그렇게 맛있나? 어디가 그렇게 잘하는데?”

“마르소네가 제일 잘해요. 셰프랑 셰리 가도가 만든 건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는 것처럼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알 것 같아.”

마은찬과 고훈이 함께 웃었다.

너무나 대단한 걸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그도 익히 경험한 덕분이었다.

“그럼 마르소 씨는요?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이야기야?”

“그럼요! 마르소 씨에 대해서 잘 알아야 더 잘 그리죠.”

잠시 고민한 앙리 마르소가 나름대로 마은찬의 의견에 공감했다.

“케일 주스.”

“케일 주스? 그건 뭐예요?”

“케일로 만든 주스.”

“어……. 오렌지 주스 같은 건가?”

“약간 쌉싸름한데 마르소는 과일이랑 같이 마셔요. 사과라든가.”

“뭔가 맛있을 것 같다.”

쉼 없이 조잘대던 마은찬도 시간이 흐르자 말수가 줄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고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림에 몰두해야 했기에 그런 마음을 꾹 눌렀다.

시청자와는 실제로 처음 만나 반가웠던 고훈도 그가 집중하게 되자 굳이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한 30분이 흐르고 마은찬이 손을 내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림과 거리를 두고 한 번 살펴본 뒤에 고개를 끄덕여 고훈과 앙리 마르소에게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어때요?”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있는 대로 들어 올렸다.

마르소의 양쪽 볼에 수염이 세 가닥씩 그려져 있고 짙은 갈색 머리에는 고양이 귀가 나 있었다.

고훈은 꿀벌처럼 날개와 더듬이가 돋아난 채로 마르소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귀엽죠?”

일반적인 초상화를 예상했던 고훈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앙리 마르소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거면 왜 앉아 있으라고 한 거야!”

“어, 어. 관찰해야 하니까.”

“이 빌어먹을 귀는 뭐야! 죽고 싶어!”

“아, 아니에요. 이렇게 그려주면 좋아하던데?”

“누가!”

“사, 사람들이요. 어? 이상해요?”

마은찬이 본인이 그린 초상화와 성난 마르소를 번갈아 보며 당황해했다.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길 1년.

평범한 초상화로는 인기를 끌지 못해 나름대로 강구한 방식이었다.

초상화에 동물 이미지를 덧댄 그림 덕에 그나마 찾는 사람이 생겨났었다.

고훈이 나섰다.

“왜 고양이에요?”

“그. 약간 츤데레 같은 느낌이라서.”

“뭔 데레?”

츤데레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앙리 마르소가 으르렁댔다.

고훈도 이해하지 못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는 해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이 인간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그 점도 똑같아.”

거듭된 대답에 고훈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슷한 거 같아요.”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당장 안 치워?”

“어. 그럼 다시 그려드릴까요? 그, 금방 그려요.”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저한테 주세요.”

“정말?”

“그걸 왜 가져!”

“마음에 안 든다면서요. 난 마음에 들어요. 얼마 드리면 돼요?”

“아니야. 어떻게 돈을 받아. 이건 진짜 내 마음. 팬으로서 마음.”

마은찬이 기쁜 마음으로 고훈에게 초상화를 건네자 앙리 마르소가 중간에서 낚아챘다.

고훈과 마은찬이 얼떨떨해 있는 사이 마르소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 뭐야? 엄청 화났나 봐. 버리려고 저러는 거야?”

“마음에 안 들었으면 이 자리에서 찢었을 거예요.”

“그럼?”

“제가 가지는 건 싫거나 마음에 들었나 봐요. 아니면 둘 다.”

“……응?”

아르센이 어리둥절해하는 마은찬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평소 거래 가격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니에요. 정말. 정말 팬심으로 한 거라서. 모델이 되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너무 기뻤어요.”

“작가님은 어떤 작품이든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요.”

마은찬이 거듭 사양하자 아르센이 지갑을 꺼내 500유로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어?”

“기뻐하시는 듯합니다.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 저.”

마은찬을 아르센이 넘겨준 지폐를 제대로 쥐지 못했다. 갑자기 큰돈을 받자 손이 벌벌 떨렸다.

고훈은 당황해하는 마은찬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기 그림이 생각보다 비싸게 팔린 순간의 기쁨과 당혹스러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고마워요. 나중에 또 봤으면 좋겠어요.”

고훈이 손을 내밀었다.

마은찬은 엉겁결에 악수를 나누고는 아르센과 고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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