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9화
52. 애벌레와 제육덮밥(4)
“어디 보자.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데.”
고수열이 시계를 확인했다.
손자가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흘렀으니 독일 뮌스터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한 고훈에게서 연락이 없자 기다리게 되었다.
“걱정은 되시나 봅니다.”
“아무렴. 아주 마음을 놓을 수 있겠나. 그래도 훈이도 혼자 다니는 법을 배워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떼어놓는 게지.”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로서 아이를 품고 싶은 마음도, 걱정되지만 홀로 설 수 있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모두 이해되었다.
“별일 없을 겁니다. 훈이랑 마르소 씨 요새 잘 지내지 않습니까.”
“그래. 둘이 같이 놀다 보면 연락도 잊을 수 있겠지. 기다려봐야지.”
고수열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 * *
앙리 마르소는 최근 주변의 시선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으나 생전 듣지 않던 말을 접하면서 확신이 들었다.
‘최근에는 고훈 군 작품만 가져오시는군요. 이 귀여운 피노키오도 고훈 군 작품인가요?’
피에르 말로도.
‘무슨 말을 하는 게야. 국적에 상관하지 말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면 앵테르미탕을 적용해 주자니. 설마 그 아이 때문인가?’
셰바송 씨몽도.
‘최근 초콜릿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아르센도.
‘김치로 뺨을 때리면 가중 처벌이 가능하냐고요? ……방금 드라마라고 하셨습니까?’
숌즈도.
‘방금 웃었어? 웃은 거야?’
미셸 플라티니도.
‘훈이하고 지내는 거 보니 결혼해도 되겠더라. 만나는 사람은 없니?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얘기 안 했잖아.’
셰리 가도마저도 전에는 꺼내지 않았던 말을 쉽게 건넸다.
주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던 앙리 마르소도 사랑하는 셰리 가도와 미셸 플라티니마저 자신이 변했다고 하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고고한 마르소 가문의 보석이 욕망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초콜릿과 막장 드라마에 빠진 것도.
미셸 플라티니 앞이라곤 하지만 가벼이 미소 짓는 일도 예전이라면 삼갔을 일이었다.
‘이놈 때문이야.’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노려보았다.
“합.”
고훈은 피자 대신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포테이토 피자를 먹지 못해 심통이 잔뜩 났지만 블랑제리 유토피에서 산 오리고기 샌드위치로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승무원이 가져다준 머스터드 소스를 훈제한 오리고기 위에 잔뜩 뿌리자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다.
“……맛있냐.”
“말 걸지 마요.”
고훈은 행복한 일요일 점심을 망친 마르소를 아직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포테이토 피자를 대령해 놓지 않는 이상 뮌스터를 여행하는 동안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맛있냐고.”
앙리 마르소가 한 번 더 물었으나 고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주 낯선 경험이었다.
막대한 부와 고귀한 혈통, 예술가로서의 명예까지 갖춘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외삼촌 루이 드 부르봉으로부터 앙주 공작위를 물려받고 이를 프랑스 법무부가 인정하였기에 프랑스 상류 계층은 그를 부르봉 왕가의 후계자로 우대했다.
유로통화권 최대 금융 그룹이자 최고 평균잔액을 자랑하는 BNP 파리바의 최대주주(31.9%)이며.
세계 최대 패션그룹 인디텍스와 화장품 기업 로레알의 대주주이기도 하였다(각각 7.1%, 5.3%).
프랑스에서는 미술계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화가로서는 드물게 세계적인 스타로 사랑받았다.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서 오리고기 샌드위치를 빼앗았다.
포테이토 피자를 잃은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던 고훈은 눈을 크게 뜨고 앙리 마르소를 노려보았다.
앙리 마르소는 보란 듯이 오리고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서민 음식치고는 제법 먹을 만했다.
“별맛 없구만.”
앙리 마르소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자 너무나 화가 나고 기가 막혀 멈춰 있던 고훈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야!”
잠시 후.
앙리 마르소를 환영하기 위해 격납고로 마중 나온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홍보팀장 피터 노이어가 당황했다.
전용기에서 내려온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노란 물감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뭐지?’
두 사람이 좋은 작품을 내주길 바라며 뮌스터를 잘 안내하려던 피터 노이어는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면서 그림이라도 그린 건가?’
비행기 안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지만, 예술가 중에서도 독특하기로 유명한 앙리 마르소라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은은하게 풍기는 머스터드 소스 냄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마르소 씨. 고훈 군.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홍보팀의 피터 노이어입니다.”
“안녕하세요.”
앙리 마르소는 피터 노이어를 본체만체했고 고훈만이 화답했다.
“아르센.”
“네.”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눈치를 주었다.
충직한 비서가 앞으로 나서서 피터 노이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르센 르블랑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작가님께서 이동하느라 잠시 피곤하신 듯합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뵐 수 있을지요?”
“예?”
피터 노이어가 당황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만나는 일이야 크게 어렵지 않지만 파리에서 뮌스터까지 고작해야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비행에 피곤하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쩔 거야. 내 옷.”
“당신이 내 샌드위치 뺏어가지만 않았어도 참았어요.”
“그깟 샌드위치 한 입 먹었다고.”
“그깟 샌드위치? 나한테는 점심이었어요. 포테이토 피자랑 바꾼 점심이었다고. 돈 많아서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나 본데, 그러다 벌 받아.”
“너 툭하면 말이 짧아진다?”
“존중해 주길 바라면 먹던 걸 뺏지 말아야지.”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해.”
“그림 가져가는 사람이 무슨 선생이야.”
저명한 미술가 두 사람이 샌드위치와 포테이토 피자로 싸우는 모습도 의아했다.
“크흡.”
아르센이 헛기침하여 피터 노이어의 주의를 끌었다.
“한 시간 뒤 뮌스터 대성당 앞에서 뵙지요.”
“아, 예. 알겠습니다.”
* * *
머스터드 소스가 잔뜩 묻은 옷을 벗어다가 세탁 맡기고 샤워를 한 뒤 아르센이 사다 준 새 옷을 입었다.
“팔이 짧아.”
“최대한 비슷한 치수였습니다.”
“빌어먹을.”
마르소는 기성품을 입었다고 불평한다.
요 며칠 무뚝뚝하다 싶더니 이제는 시비까지 건다.
최근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거늘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뮌스터 대성당에 이르자 좀 전에 만났던 피터 노이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좀 쉬셨는지 모르겠네요.”
“덕분에요.”
피터 노이어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가요?”
“도시 곳곳에 자유롭게 전시하는 행사로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시민과 미술이 친해지길 바라서 시작된 일이죠.”
앙리 마르소는 뚱한 표정으로 몇 걸음 떨어져서 걷고 있다.
대체 누가 잘못했는지 모를 일이다.
“1960년대 일입니다. 헨리 무어가 뮌스터에 작품을 기증하려 했는데 당시 뮌스터 시민들은 헨리 무어의 작품을 예술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었죠.”
피터 노이어는 헨리 무어와 시민 사이에 갈등이 꽤 심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도중 뮌스터시가 도시환경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뮌스터 시립 미술관에 작품 구입을 의뢰했고.
뮌스터 시립 미술관은 헨리 무어의 작품보다 더욱 모던한 조지 리키의 작품을 추천했단다.
“하지만 13만 마르크를 들여 기이한 조각을 산다고 하니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시 예산을 낭비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예전에 할아버지, 장미래와 나눴던 이야기와 비슷한 경우다.
현대 미술의 고립화로 생겨난 문제다.
“어떻게 됐어요?”
“시청으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당연한 일이다.
시민들로서는 그들의 소중한 세금이 낭비되지 않길 바랄 테고, 의미 없어 보이는 조각이 거액에 거래되는 데 반대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때 시립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있던 부스만은 현대 미술과 시민들 사이의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미술가와 대중이 멀어질수록 남는 건 없다.
내가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미술가를 좋게 보지 않는 건, 온전히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거만함 때문이다.
작품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은 절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부스만은 여러 방송에 출연해서 시민들과 현대 미술이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죠. 다행히 뮌스터 시민들도 그의 진심을 알아주었고요.”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현대 미술이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일이기도 시민들이 미술을 찾아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멋진 행사네요.”
피터 노이어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는 뮌스터 시내를 안내하며 곳곳에 위치한 조각품을 소개해 주었다.
누군가 건축 자재를 버리고 갔나 싶었던 작품도 있었고, 작은 인공 연못 주변에서 쉬고 있는 동상과 석고상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한참을 구경한 뒤 피터 노이어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반나절 둘러보는 것으론 뮌스터를 느끼기 힘들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잡혀서 솔직하게 말하자 피터 노이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기왕이면 며칠 더 머물면서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고요.”
그러기에는 학교도 다녀야 하고 개인방송,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아트 바젤 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안내는 이 정도로 하지.”
묵묵히 따라다니던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아르센이 나서서 피터 노이어에게 인사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이후에는 따로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운영위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네요.”
“아니에요. 충분해요.”
피터 노이어 덕분에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어떤 행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럼.”
피터 노이어가 돌아갔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이제 조금만 돌아다녀도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터.
어딜 구경하는 것도 힘들겠다.
“가자.”
앙리 마르소가 발을 돌렸다.
저녁 먹기 전까지는 돌아가겠다고 했으니 다음 기회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으악!”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을 옮기려는데 바로 옆 골목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는 그대로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얼어 있으니 아르센이 다급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예요?”
“……글쎄.”
아르센이 나를 보호하는 한편 쓰러진 남자를 경계했다. 옷을 보니 노숙자 같지는 않은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설마 죽은 건가 생각하던 차, 남자가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다행히 의식이 있는 모양이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눈을 깜빡인다.
“고훈?”
“네?”
“진짜 고훈이야?”
한국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