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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76화 (23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6화

52. 애벌레와 제육덮밥(1)

미술 치료 세 번째 시간이 있는 날이다.

오늘은 무엇을 배울지 설레어 참지 못하고 점심을 먹자마자 미술 교실을 찾았다.

마르소의 교실은 학교인지 네로 황제의 휴게실인지 모를 정도로 휘황찬란하다.

남이 쓰던 의자와 책상을 쓸 수 없다며 잔뜩 꾸며 놓고, 낡은 시설도 전부 갈아치워 상당히 이질적이다.

강의를 맡아주는 조건으로 교실 하나를 마음대로 개조했다고 들었다.

자리에 앉아 팔을 베고 지루함을 달래던 차 마르소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늦긴 뭘 늦어.”

수업 시간이 20분밖에 안 남았다.

“오늘은 뭐 해요?”

“스크래치.”

마르소가 검은 종이를 보여주었다.

다가가니 조각칼을 건네주었다. 조심스레 긁어내니 검은색이 벗겨지며 알록달록한 색이 드러났다.

덧칠할 필요가 없도록 미리 준비된 상품을 파는 모양이다.

의도적으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편리하기도 하고 무슨 색이 나올지 몰라서 재밌기도 하다.

“너 걔 잡아 와.”

“누굴요?”

“곤충 꼬맹이.”

블랑쉬 파브르를 말하는 거다.

“건방지게 내 수업을 두 번이나 안 들어와?”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오늘도 안 나오려나.’

걱정되긴 한다.

무슨 일인지 미술 치료 강의에 나오질 않는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할 뿐이고 쇼콜라티에 모임에도 잘 나와서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연락해 볼게요. 그리고 곤충 꼬맹이가 아니라 블랑쉬 파브르예요.”

“알 게 뭐야.”

마르소를 툭 치곤 교실 밖으로 나섰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학교에는 왔을 테니 직접 찾아볼 생각으로 중학교 건물을 벗어나 앙리 4세 고등학교로 향했다.

“쟤 고훈 아니야?”

“맞아. 아르누보 공모전. 여긴 무슨 일이지?”

“귀엽다.”

몇몇 학생이 알아보지만 다가오진 않는다.

‘몇 반이었지.’

어디 있을까 고민해도 무슨 반인지 들은 기억이 없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가까이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혹시 블랑쉬 파브르 알아요?”

“블랑쉬 파브르?”

모르는 눈치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던 차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걔 아니야? 이상한 백발.”

“아. 맞네. 아마 뒤뜰에 있을걸?”

뭔가 블랑쉬를 대하는 태도에 조소가 섞여 있다.

상당히 거슬리나 어린애들과 더 말을 섞어 봤자 수업 시간에 늦을 뿐이다.

고등학교 건물 뒤쪽으로 향하자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수풀로 된 벽으로 시야가 가려져 미로에 들어선 기분이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화단이 나왔다.

햇살이 잘 드는 덕인지 식물이 싱그럽다.

‘아.’

블랑쉬가 쪼그리고 앉아 꽃과 나무에 영양제를 주고 있다. 교복 위에 입은 점프슈트에 흙이 잔뜩 묻었다.

“파브르.”

돌아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떻게 왔어?”

“수업 시간이잖아. 찾으러 왔어.”

나를 가만히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곤 하던 일을 계속한다.

2주 동안의 태도로 짐작하건대 분명 사정이 있다.

누구에게나 들추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고 숨기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터라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근처를 둘러보았다.

뒤뜰이라고 해서 곤충이라도 키우고 있나 싶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꽃과 나무를 키우는 걸 보니 원예부를 하거나 개인적 취미 같다.

‘물을 다 썼네.’

분무기가 비어 있다.

가만히 있기도 심심하여 물을 떠다 주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고마워.”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거 무야?”

“응.”

가까이서 보니 무도 키우고 있다.

양지바른 곳에 적당한 습도, 무도 키우고 있는 데다가 마침 9월이니 혹시나 싶어 무 근처를 둘러 과연 배추흰나비가 있다.

“배추흰나비다.”

“예쁘지.”

“응.”

보통 4월에서 10월에 변태하는데 이렇게 배추나 양배추, 무 같은 식물 주변에 많이 있다.

하얀 바탕에 점이 있는 게 특징인데 팔랑팔랑 날아다닐 때 특히 귀엽다.

블랑쉬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다.

“뒤뜰에 있다고 해서 곤충 키우는 줄 알았어.”

“키우지 않아.”

설명해 주길 기다렸다.

“예전에는 키웠는데 자꾸 죽어서 이젠 안 키워.”

사랑을 준 아이들이 죽었으니 그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깊을 것이다.

파브르의 대표작 <친구>도 직접 키웠던 금자라남생이잎벌레가 죽자 작품으로나마 살아 있길 바라며 만든 작품으로 알고 있다.

아마 <친구>를 만든 이후로 곤충 키우는 걸 그만둔 모양이다.

“아빠가 곤충이랑 같이 있으려면 채집통을 꾸미지 말고 마당에 꽃이랑 나무를 심으라고 했어.”1)

“멋진 말씀이네.”

“그치.”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고자 그것을 어떠한 틀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면 상처가 될 뿐이다.

파브르의 아버지가 참으로 멋진 말씀을 하셨다.

“누구 시에서 본 말이래.”

“좋은 인용이네.”

같이 웃었다.

한 번 분위기가 풀어진 덕일까.

파브르가 그동안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말해준다.

“학교 애들은 나 싫어해.”

따돌림당했다는 기사도 있어서 알고 있었다.

파브르가 따돌림당한 일을 광고라도 하듯 프랑스 전역에 퍼뜨린 기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듣기 싫구나.”

“아니.”

파브르와 눈을 마주했다.

“걔들이 뭐라고 하든 나랑은 상관없어.”

평소대로 당차다.

다수에게 미움받으면 위축될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다.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지, 아니면 익숙해진 건지 몰라도 부디 파브르가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화가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파브르가 잠시 말을 멈췄다.

떨리는 눈썹과 앙다문 입에서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을 엿볼 수 있다.

“앙리 마르소가 보는 게 싫어.”

“…….”

이 아이가 왜 그간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또래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따돌림받는 자신을 마르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며 견디고 있지만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다.

앙리 마르소를 무찌르자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파브르는 분명 그를 존경하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화가로 인정받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마르소가 하는 수업 재밌어.”

“…….”

“놓치면 후회할 거야.”

“…….”

“또 그런 걸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마르소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본인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존중한다.

반대로 재산이 아무리 많고 유명하더라도 본인 삶에 성실하지 않은 인간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건 쇼콜라티에 모임에 함께하며 지켜본 파브르도 잘 알 거다.

“마르소가 너랑 라바니를 반대하지 않은 것도 나름대로 인정하기 때문이야. 누가 널 미워한다고 실망하거나 하지 않아.”

파브르가 모종삽으로 애꿎은 흙을 내려친다.

“그렇게 따지면 마르소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을걸.”

“…….”

“1억 명 정도.”

“흡.”

파브르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수업을 시작하고 5분이 지나서도 고훈이 보이지 않자 앙리 마르소의 심기가 상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이 감히 내 수업에 안 들어와?’

아이들은 나눠 받은 스크래치 용지를 긁어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시계를 주시하던 마르소가 자리를 박차려던 차, 교실 문이 열렸다.

고훈과 블랑쉬 파브르가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린 몇몇 고등학생이 수군거렸다.

“쟤 뭐야? 이 수업 들었어?”

“그랬나 봐. 무슨 생각으로 안 나왔대?”

“뒤뜰에서 벌레 가지고 놀았겠지. 애도 아니고 저게 뭐야.”

“어지간히 튀고 싶나 봐. 저것도 앙리 선생님 관심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야? 왜. 쟤 앙리 선생님 따라했었잖아.”

블랑쉬 파브르가 같은 반 학생들을 노려봤다.

“보면 뭐 어쩔 건데.”

“선생님 앞이라고 센 척하냐?”

“닥쳐.”

마르소가 신성한 강의 시간에 잡담하는 학생들을 협박했다. 아이들이 입을 닫자 스크래치 용지와 조각칼 세트를 가리켰다.

“가져가.”

“뭐 하고 있었어요?”

“자화상.”

각각 준비물을 챙긴 고훈과 파브르가 자리를 찾았다.

고등부 학생들이 모여 앉은 곳에 빈자리가 있었지만, 학생들이 다리를 걸치는 등 비키지 않았다.

고훈은 파브르를 이끌어 중등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두 학생은 곧 작업에 열중했고 고등학생 몇몇은 파브르를 조롱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앙리 마르소는 파브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30분 정도 흐르고.

마르소가 내준 과제를 마친 학생들이 집중력을 잃고 조금씩 딴짓하기 시작했다.

고훈과 파브르도 손을 놓은 걸 확인한 마르소가 오른쪽 끝에 앉은 학생을 지목했다.

조금 전 블랑쉬 파브르에게 시비를 걸었던 학생이었다.

“너. 나와서 발표해.”

“오~”

처음 지목받은 학생은 친구무리의 호응을 받으며 어색하게 앞으로 나섰다.

“어. 뭐. 저고요.”

고등학생은 스크래치로 그린 자기 얼굴을 보였다.

미술을 전공하려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심화 학습반다운 실력이었다.

눈코입의 비율이 정확하고 눈썹과 머리카락 표현도 세심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검게 덧칠될 부분을 촘촘하게 벗겨내거나 듬성듬성 벗겨내고 또 힘 조절을 하여 명암도 구현해냈다.

학생들이 작게 감탄하자 발표한 학생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끝이야?”

“네?”

“끝이냐고.”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소는 턱짓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블랑쉬 파브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음 너.”

마르소에게 지목된 파브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와.”

* * *

1)“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광장> 中, 문학동네, 2012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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