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5화
51. 전초전(5)
공고를 낸 이후로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관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졌다.
9월 19일 지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한 날에만 1,400명이 이메일을 보내왔다고 한다.
방태호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여 직원을 채용했지만 아무래도 당분간 고생할 것 같다.
안락하고 행복해야 할 저녁 식사마저도 대충 때우는 그가 안쓰럽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몸 상할까 걱정되네.”
“대충할 순 없으니까요. 이번 일 마무리하고 푹 쉴 생각입니다.”
“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시간,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며 일하면 건강을 잃을 수밖에 없다.
몸으로 느끼니만큼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 기꺼이 나서는 이유는 단 하나.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관이 미술가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기회인지 알기 때문이다.
“방 대표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
김지우도 걱정스러운지 운을 뗐다.
“어떻게 도와줄 방법 없을까요?”
“같이하면 좋겠지만 선발 과정은 공정해야 하니까요.”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서서 돕고 싶지만 선발 과정에 조금이라도 다른 의도가 섞이면 안 된다.
그건 나나 할아버지, 장미래도 마찬가지.
불한당이 또 다른 권력 집단으로 변질되는 걸 경계하시는 거다.
“분류 정도는 도와도 되지 않을까요? 회화는 회화끼리라든가. 양식 맞지 않은 건 치워놓는다거나.”
김지우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할아버지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 정도라면야 괜찮겠죠. 어서 먹고 해봅시다.”
저녁을 서둘러 먹었다.
할아버지와 김지우가 뒷정리하는 사이 방태호를 찾았다.
임시로 사무실을 들여 직원도 들였지만, 근무 시간 안에 처리하긴 힘든 탓에 매번 집에서 잔업을 처리하고 있다.
“음료수 드세요.”
사과주스를 곁에 두었다.
“아. 고마워.”
“분류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같이하면 훨씬 빨리 끝날 거예요.”
잠시 고민한다.
“양식 틀린 것만 분류할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니야.”
방태호가 씩 웃는다.
피로한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 더 안쓰럽다.
“이런 일은 나한테 맡겨줘. 넌 네 일이 있잖아.”
하루 이틀 정도는 도와도 괜찮은데 굳이 거절한다.
하지만 그 마음도 이해된다.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한국관이 성공해야만 앞으로 계속 이런 기회가 찾아올 거다.
국가관 전시에 작가를 채용하는 방식도 좀 더 공평하게 이뤄질 테고, 그것이야말로 나와 할아버지, 방태호가 진정 바라는 일이다.
방태호는 작가를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기획에 힘써야 하고.
나는 그 안에 전시될 작품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방태호가 작게 웃곤 모니터를 보았다.
“대표님, 좀 도와드릴게요.”
마침 김지우가 들어왔다.
나와 비슷한 말을 꺼내자 김지우에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어……. 그럼 이거 보고 나눠줄래요? 폴더 만들어서 양식 맞춘 거랑 안 맞는 거랑 따로.”
“맡겨주세요!”
김지우가 손뼉을 치고 자리 잡았다.
나도 김지우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나 이 일을 더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알아서도 안 된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공평하게 진행되어야 하니, 어디까지나 단순 작업을 맡아야 한다.
김지우가 방태호의 서버에 접속해서 불한당 지원자 폴더를 다운로드 받았다.
불한당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만, 프랑스-대한민국 공동 전시관처럼 긴 이름보단 불한당이 편한가 보다.
“히익.”
김지우가 파일 수를 확인하더니 깜짝 놀란다.
나도 놀랐다.
첫날에만 1,400여 명이 지원했다고 해서 놀랐는데 지원서는 4,000통이 넘는다.
“이걸 혼자 하려고 하셨어요?”
“하하. 직원들하고 같이하니까요. 처음부터 온라인 지원으로 받았으면 구분하기 쉬웠을 텐데 여건이 안 되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
김지우가 고개를 젓는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진짜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려고 하셨대?”
김지우가 서버에 들어 있는 폴더를 훑어보더니 자기 뺨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양식 구비 폴더 아래에 회화, 설치, 조형 폴더를 만들었다.
“양식 안 맞는 건 따로 둘게요. 누락 내용 없는 건 이렇게 구분하고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아유. 감사하죠. 이거 일당이라도 드려야 할 텐데.”
“내일 밥 사 주세요.”
“얼마든지요.”
김지우가 지원서를 열었다.
누가 참여하는지 궁금해서 기웃거리니 이름과 간단한 소개 정도는 눈에 들어온다.
‘김진우.’
재작년에 우리 집에도 잠깐 들렀던 사람이다.
장미래가 가르친 학생이기도 한데 군대 간다더니 전역한 모양이다.
출신대학이 적혀 있지 않아서 한국대학교 미술대 출신 김진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기적으로는 가능성이 높다.
‘백설기?’
맛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두 사람 모두 집중한 듯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도와준다더니?”
“제가 할 일은 따로 있대요.”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당연한 말씀이다.
* * *
방태호가 한창 전쟁을 치를 무렵 미셸 플라티니 역시 고초를 겪고 있었다.
프랑스의 예술인 복지제도 앵테르미탕에 등록된 예술인만 해도 58만 명.
그중 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거나 소속사와의 계약 문제, 병환 등의 이유로 지원 못 하는 경우는 있어도, 단순히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극히 일부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국가관을 포기하고 있던 예술가들은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앞다투어 지원서를 내밀었다.
방태호와 달리 온라인을 통해 지원을 받은 덕에 일일이 분류할 필요는 없었지만, 고작 열 명으로 만 단위의 포트폴리오를 전부 확인하기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벌써 수일째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던 미셸 플라티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잔열이 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몇 시지.’
오후 4시 20분 전.
4시에 약속이 잡혀 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다.
“어둡게 해줘.”
미셸의 목소리를 인식한 사무실 제어 시스템이 전등을 끄고 커튼을 쳤다.
의자를 뒤로 젖힌 미셸이 눈을 감고 있기를 얼마간 인터폰이 울렸다.
-대표님, 방태호 쇼콜라티에 대표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 곧 갈게.”
-네. 안내하겠습니다.
미셸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집무실 안쪽 세면대에서 대충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시안을 챙겨 복도로 나섰다.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미셸과 방태호가 서로에게 인사하곤 허탈하게 웃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서로가 얼마나 큰일을 책임지고 있는지 알기에 눈 주변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와 처진 어깨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좀 어때요?”
“쉽지 않네요. 포트폴리오만으로 판단하기도 그렇고.”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단 몇 작품으로 판단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체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기에 타협하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하니까요.”
미셸이 방태호에게 서류를 건네곤 응접실에 비치된 스크린에 공동 전시관을 표현한 투시도를 3D 그래픽으로 띄웠다.
“저번에 이야기 나눈 걸로 가안을 만들어 봤어요.”
방태호가 건물을 살폈다.
1, 2층으로 분리된 전시관은 돔 형태로 되어 있었다.
1층 천장이 뚫려 있어서 위로 올려다보면 2층을 볼 수 있었다.
반대로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2층 난간은 벽에서 조금 떨어진 채 원형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요인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이 보였고 돔 중앙은 유리를 두어 하늘이 보이도록 했다.
불한당 전시관의 콘셉트는 풍경이었다.
양국 미술가들의 작품이 가까이에서 보면 독립된 작품으로, 멀리서 보면 하나의 풍경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전시관을 새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좋은데요. 시간을 맞추면 여기서 해를 볼 수 있다는 거죠?”
방태호가 유리로 된 천장 가운데 부분을 가리켰다.
“맞아요.”
“그런데 조건이 맞는 땅을 구할 수 있을까요?”
해가 정확히 전시관 가운데에 오는 시간과 장소를 구해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미셸이 작게 웃었다.
돈으로 해결 가능한 일은 앙리 마르소에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아하하.”
방태호가 다시금 전시관을 살폈다.
의도대로 진행된다면 관람객은 전시관 어디에서든 풍경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가까이 놓인 작품을 보면 하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시야를 반대편으로 돌리면 2층과 1층을 하늘과 바다처럼 관람할 수 있을 듯했다.
작품 안에서 감상하는 <앙리 마르소 002>를 모티프로 삼은 불한당 전시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좋습니다. 솔직히 더 건들 곳이 있나 싶네요. 역시 플라티니 대표님이시네요.”
“별말씀을요. 여길 얼마나 잘 채워 넣는지가 중요하죠.”
미셸의 지적에 방태호가 공감했다.
아무리 좋은 기획을 만들어도 결국 전시회를 완성하는 건 미술가였다.
양국에서 각각 열 명씩 총 스무 명을 선별하면 그들에게 전시관 콘셉트를 알려줄 예정이나.
그들이 불한당 전시관을 얼마나 잘 소화해낼지는 미지수였다.
“참. 그리고 이건 훈이 요청인데.”
“네.”
“전시관 입구에 간식거리를 두고 싶다고 합니다. 초콜릿이나 사탕이요.”
관객을 위한 배려로 알아들을 수도 있었으나 미셸 플라티니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미술을 즐겁게 즐기자는 쇼콜라티즘적 발상이기도 하며, 동시에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연상하게 했다.
“79㎏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괜찮을 것 같아요. 도리어 쇼콜라티에를 홍보하기에도 좋겠네요.”
“프랑스하고 한국에서 잘 팔리는 간식을 함께 두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간식을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교류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그리고.”
미셸이 방태호가 맡았던 일이 어찌 되었는지 묻고자 신호를 보냈다.
“네. 이런 식은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방태호가 서류를 꺼내 보였다.
“숨은그림찾기입니다.”
“숨은그림찾기?”
“아무래도 국가관이 워낙 많다 보니 관람객을 잡아두기 힘들 것 같아서요.”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조금씩 전시관 내부에 다른 요소를 집어 넣을 예정입니다.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전시 위치일 수도 있고요.”
미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태호의 제안에 귀 기울였다.
“찾아낸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을 주려는데, 훈이가 작가들 사인은 어떠냐고 하더군요.”
“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훈이가 해바라기를 그려줘서 반응이 좋았는데. 그런 느낌으로요.”
미셸이 피식 웃었다.
당시 괜한 승리욕에 불타올라 스스로 몸을 혹사시킨 멍청이가 떠올랐다.
“사인회를 따로 열면 작가들에게도 부담이 되니까 이렇게 한정적으로 하면 경품이 되기도 하고. 또 찾아보려고 반복해서 방문할 테니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멋져요. 작가마다 하나씩 바꾸게 하는 건 어떨까요? 해당 요소를 고친 작가의 사인을 받을 수 있게.”
수집 요소를 추가하자는 말이었다.
특정 작가의 팬에게는 전시회를 찾을 특별한 동기가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