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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74화 (22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4화

51. 전초전(4)

장미래의 대답에 이인호가 씁쓸히 웃었다.

“그러게요.”

“규서가 제대로 된 작품이라도 내면 모를까. 가족 덕에 자리 차지하고는 성과가 없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에요.”

장미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일 생길 때마다 학생들한테 미안해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학부생일 시절에도 그랬지만 애들 사이에서 인맥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해요. 세계 어딜 가든 똑같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다못해 공공사업도 마찬가지예요. 단순 작업자로 참여하고 싶어도 이름 있는 작가한테라도 잘 보이지 않으면 힘든 게 현실이에요.”

장미래는 학연, 지연으로 이어진 미술계의 병폐를 걱정했다.

큰 예산이 들어가는 공공사업은 명망 높은 예술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무명 화가들은 아주 작은 이력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갑을 관계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낫죠. SNS나 뉴튜브 같은 걸로 본인 어필하고 홍보할 수단이 없진 않으니까. 그렇게 자리 잡아가는 친구들도 있고요.”

“네.”

“근데 그게 어디 쉽나요. 그러니 다들 시작하기도 전에, 열심히 노력하다가도 갑자기 맥이 풀리는 거예요. 이런 일 때문에요.”

장미래는 최영수 협회장과 최규서, 김수혁 부부가 저지른 일이 미술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기회 박탈은 곧 의지 박탈로 이어져 끝내 화가로 활동하고 싶은 이들에게서 희망을 앗아가게 되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미래의 귀에 그런 불만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 일이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장미래가 씩 웃었다.

* * *

장미래의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 소식을 전해 들은 최규서가 피식 웃었다.

정규 전시관을 얻지 못해 남에게 빌붙는 꼴이 우스웠다.

“미래 선배도 국제전 참가하나 봐요.”

최규서, 장미래의 대학 후배이자 현재는 최규서의 비서로 활동하는 백설기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교수님이 손 내밀어 주셨겠지. 뭐가 예쁘다고 저리 감싸시는지 몰라.”

“학부생일 때도 그러셨잖아요.”

“내 말이.”

고수열은 전부터 교양과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장미래를 감쌌다.

교수들이 원하는 작품을 내지도 않고, 되레 교수들이 하는 말에 말대답만 하는 녀석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최규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눈치채서 대학 생활 내내 학년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최규서는 본인이 받아야 할 사랑을 빼앗긴 듯했다.

심지어 대학생일 때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음에도.

그러나 이미 10년 전 일.

시간은 흘러 고수열도 학장직에서 물러나고 점차 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내에 최규서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공모전과 미술전은 없었다.

학생일 때는 어리게만 대했던 선배와 미술계 원로들도 지금은 최규서 앞에서 멍청하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교수님 덕에 상이라도 타면.”

백설기의 우려에 최규서가 코웃음 쳤다.

“넌 다 좋은데 생각이 짧아서 문제야. 한국에서만 열 명. 프랑스에서 또 열 명이야. 거기에 앙리 마르소도 껴 있고. 일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어중이떠중이들 모아다가 감정팔이 하겠단 거지.”

“아……. 그러네요. 흐.”

구박받은 백설기가 멋쩍게 웃었다.

최규서가 프랑스-한국관 참가희망자 모집 공고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자아가 강한 예술가가 열 명이든 백 명이든 모여봤자 의견이 모아질 리 없었다.

다수의 의견을 취합하려고 들면 평범한 생각으로 나아가기 마련.

그럴 바에는 홀로 작업하는 편이 훨씬 독창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치워.”

“네, 작가님.”

최규서가 프랑스-한국관 참가희망자 모집 공고를 던졌다.

그것을 주워 들은 백설기는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최규서 곁에 있으면 어떻게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난 몇 년간 궂은일 마다하지 않았건만.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하면 전시회를 열어준다고 약속하던 최규서는 이제 아예 노예처럼 자신을 부려먹었다.

백설기가 모집 공고를 살폈다.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희망자 모집 공고]

안녕하십니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 프랑스-한국관 공동 커미셔너 방태호입니다.

고수열, 고훈, 장미래 작가와 함께 프랑스-한국관을 채울 예술가를 아래와 같이 모집하고 있습니다.

프랑스-한국관은 융화와 독립이라는 양립된 가치관에 대한 담론을 대한민국과 프랑스 양국 예술가를 통해 진행해 보고자, 2030 베니스 비엔날레에 신설될 전시관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모집 분야

회화 3인, 설치 3인, 조형 1인.

▪모집 요강

내용: 2030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한국관 전시품 출품.

지원 양식: 작품 사진 및 설명을 포함한 포트폴리오.

지원 내용: 창작지원비 1인 500만 원, 베니스 체류 비용 및 왕복 항공료 지원.

자격요건: 대한민국 국적의 35세 미만 예술인, 해외여행 결격사유 없는 자.

▪절차 및 지원서 접수

서류 전형(10.3)–면접(10.15)–합격 통보(10.22)

접수 기간: 2029년 9월 19일(수)부터 10월 3일(수)까지.

접수 방법: E-mail 접수 [양식 다운로드]

※제목은 베니스 비엔날레_참가지원_이름 양식으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세부 양식에 어긋나는 지원서는 접수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수집된 모집 서류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파기됩니다.

파격적인 창작지원비를 보면 협력 활동이 아니라, 작가마다 고유 작품을 허락해 주는 듯했다.

게다가 나이 외에는 특별히 요구하는 자격도 없었다.

최규서는 동정 여론을 모으려는 수작이라고 비아냥댔지만, 백설기에게는 이마저도 소중한 기회처럼 여겨졌다.

“…….”

잠시 지원해 볼까 고민하던 백설기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합격해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라도 했다간 최규서로부터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최영수 대한예술협회 회장과 최규서, 김수혁 일가에 밉보였다간 국내 활동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백설기는 모집 공고 포스터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한편.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한국관 참가희망자 모집 공고가 나자 대한민국 예술가들이 깜짝 놀랐다.

국가관 책임자를 뽑는다는 공고도 아니고, 계약직 예술가를 찾는 내용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혔다.

└살다 살다 이런 일도 다 있네.

└자격 요건 진짜 실환가? 35세 미만이면 무조건 지원 가능이야?

└“지원”은 가능하지.

└그게 어디임ㅋㅋㅋㅋ 수상 내역 없어도 된다는 게.

└화제 모으려고 저렇게 하는 거겠지. 실제로는 어디 상 받은 사람부터 뽑을 게 뻔하잖아.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ㄹㅇ 나만 할 거임.

└미쳤다 진짜. 아니, 창작지원비 500만 원 뭔뎈ㅋㅋㅋㅋㅋㅋ

└저거 때문에라도 희망자 엄청 몰릴 듯.

└지금 500만 원이 중요하냐. 고수열, 장미래, 앙리, 훈이랑 같이 작업하는 자린데.

└ㄹㅇㅋㅋ

└이 도른자들아 저거 어디 딴 데가 아니라 베네치아 비엔날레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비엔날레라고. 500만 원이 중요함?

└아니 근데 한국관은 뭐고 이건 또 뭐야?

└요강에 나와 있잖아. 한-프 양국 협력관이라고.

└솔직히 이거 제대로 될 리가 없음. 어차피 고수열, 장미래, 고훈 받치는 역할밖에 안 될 텐데 뭐 하러 함?

└1인당 1작품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주목은 저 세 사람이 받을 텐데.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야. 빡대가리야.

└근데 한국관은 그럼 어떻게 됨?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그냥 똑같지.

└아니. 국가관 황금사자상은 하나잖아. 고수열, 고훈, 장미래 다 저쪽으로 가면 한국관은 상 못 받는 거 아님?

└ㅋㅋㅋㅋㅋㅋ진짜 내가 돈만 많으면 하고 싶은 말 적었을 텐데.

└ㄹㅇ 고소 무서워서 말 못 하는데, 미술 좀 아는 사람이면 한국관에 기대를 하겠냐?

└뭔데? 왜 그러는데?

* * *

불한당 모집에 한국이 난리가 난 것처럼 프랑스도 다르지 않았다.

커뮤니티 사이트와 포럼은 온통 불한당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한데, 블랑쉬도 당연히 지원한단다.

“근데 미술 치료 첫 수업 때 왜 안 나왔어?”

“앙리 마르소가 수업하니까.”

“그렇게 싫어?”

대답하지 않는다.

대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알 방도가 없다.

“부럽다.”

모집 공고 포스터를 보던 비다 라바니가 작게 감탄했다.

“지원해 봐. 될 수도 있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떻게 해. 아니야. 난 그림도 잘 못 그리고.”

“뭐 어때. 35세 미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어.”

비다 라바니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특유의 따뜻한 감성은 좋지만 경험이 좀 더 필요하다.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런 생각으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블랑쉬가 나섰다.

“안 될 것 같다고 안 하면 정말 그대로야. 기적이란 단어는 실제로 일어나서 생겼다며.”

“……난 포트폴리오도 없고.”

“일주일이나 있으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돼.”

블랑쉬가 비다 라바니의 스케치북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으, 응.”

도전을 거듭할수록 무서워진다.

정말 이 길이 맞을까.

내가 정말 잘하고 있을까.

잘하진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나아지긴 했을까.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는지라 매번 포기하고 싶어진다.

나 또한 그러했기에 너무도 잘 안다.

막막함이 주는 두려움과 피로는 그 어떤 재능과 자신감으로도 이겨낼 수 없다.

자아를 집어삼키고 이성을 쥐고 흔들기에 도무지 당해낼 수 없다.

그 두려움은 붓과 물감으로만 이겨낼 수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빈 캔버스를 채워나가야만 점차 떨쳐낼 수 있다.1)

블랑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 비다 라바니가 뽑히긴 힘들 테지만 이렇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도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기리라 믿는다.

“근데 불한당이 무슨 뜻이야?”

블랑쉬가 물었다.

“예전에 중국하고 한국에선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했어. 그래서 불, 한국할 때 한. 파티니까 당.”

사전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하니까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는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무리라고 되어 있어서 물어봤어.”

그렇게 할 거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권력을 틀어쥔 사람에게서 그들의 재산과 힘을 빼앗아 나눠줄 거다.

할아버지와 방태호, 김지우, 장미래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고 나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현실에 낙담한 이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일 말이다.

* * *

1)“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하는지 모를 거다.”

“빈 캔버스는 꼭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는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그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에게 보낸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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