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3화
51. 전초전(3)
“버려.”
함께 작업할 때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하고자 단체 티셔츠를 몇 개 골랐더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검은색 바탕에 꽃과 나비가 알록달록하게 박힌 아주 멋진 티셔츠인데 버리라니.
옷가게 주인이 상처받겠다.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할아버지께도 보여드리니 난감하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구나.”
방태호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돈 받으러 다녀야 할 것 같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쉽지만 다들 반대하니 고집부릴 수 없어 셔츠를 내려놓았다.
오늘 쇼핑에선 건진 게 없다.
“근데 모집은 어떻게 해요?”
방태호에게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자를 어찌 모을지 물었다.
랄프 루퍼스가 예술가관은 처음 만드니만큼 커미셔너의 권한도 자유롭게 활용하라 했다.
그에 따라 예술가관 책임자로 미셸과 방태호가 합류해 주었고 두 사람이 공동 커미셔너로서 활동해 줄 예정이다.
“공고 내야지. 한국은 내가 맡고 프랑스에선 플라티니 대표가 나서준다고 했어.”
다른 국가 출신도 받고 싶지만 아무래도 양국만 해도 수천 명 이상 지원할 게 틀림없다.
전시관이 무한히 넓은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선별하게 될 터.
방태호와 미셸도 어떻게 하면 공평하게 기회를 부여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쉬운 대로 한국과 프랑스 연합으로 만족해야겠다.
“그럼 전시관 이름은요?”
공식 명칭이 없어서 예술가관으로 부르던 전시관에도 새 이름을 붙여야 한다.
“프랑스 한국 전시관으로 해.”
통화를 마친 마르소가 다가왔다.
“심심하잖아요.”
“심심하긴 뭐가 심심해. 이름 붙일 생각 하지 마.”
쇼콜라티에를 명명할 때도 그렇고 내 작명 실력에 불만이 많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
방태호의 말에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다.
미셸을 통해 간단히 보도자료를 내고 저녁을 먹었을 뿐인데 7시가 넘어버렸다.
마르소와 헤어지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자 김지우가 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훈아!”
“안녕하세요.”
“안 볼 때마다 쑥쑥 자란다. 어머. 염색 새로 하셨네요. 너무 잘 어울리신다.”
“껄껄. 반가워요.”
“대표님 정말 축하드려요. 어떻게 앙리하고 훈이를 동시에 데리고 가셨대요?”
“하핫. 마르소 씨하고 훈이가 절 데려와 준 거죠. 감사합니다.”
김지우가 할아버지, 방태호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피곤할 만도 한데 생기발랄하다.
“훈이한테 이야기 들었겠지만, 괘념치 말고 푹 쉬어요.”
“아항핳. 예의상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럴 처지는 아니라서요. 감사합니다!”
김지우가 할아버지께 허리를 연신 굽혔다.
2층 손님방을 안내했다. 같은 층에 방태호도 있어서 혹시 불편할까 봐 화장실이 딸린 안방을 주었다.
“그럼 푹 쉬세요.”
“잠깐! 인터뷰해야지!”
“안 피곤해요?”
“시간이 생명인걸.”
김지우가 여행 가방을 풀지도 않고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음료수 좀 가져올게요. 사과주스 괜찮아요?”
“완전 좋아.”
주스를 따라와서 마주 앉았다.
“오다가 봤는데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에 따로 참여한다며?”
“네.”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없던데. 앙리하고 같이하려고? 그쪽에서 먼저 제안했나?”
“원래는 한국관으로 참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한국관 커미셔너 정해지기 전부터 할아버지랑 미래 이모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그렇게 안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루퍼스가 제안해 준 거예요.”
“랄프 루퍼스?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
“네. 아르세날레요.”
베니스 비엔날레의 본 전시를 아르세날레(Arsenale)라고 하고, 국가전을 자르디니(Giardini)라고 부른다.
“어떻게?”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더라고요.”
“와. 진짜 인맥 엄청나시다. 그 정도 자리에 오르면 다 그런가?”
할아버지의 인맥은 나도 신기하다.
“한국관 참여 못 해서 어쩌나 걱정하던 중에 마르소가 따로 하나 만들라고 했어요. 루퍼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원래 준비하던 걸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상황이 잘 들어맞았네. 근데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네.”
“너랑 장미래 교수, 선생님이 그렇게 적극적이었는데 김수혁 큐레이터하고는 왜 안 한 거야? 뭐가 안 맞았어?”
“그렇진 않아요. 그쪽에서 답을 안 해줬을 뿐이에요.”
“히이.”
김지우가 숨을 들이마신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정말? 아무 말도 없이?”
“네.”
국가관은 어디까지나 커미셔너가 전권을 쥐고 있다.
그쪽에서 싫다면 달리 방도가 없다.
“그건 좀 이상하네. 커미셔너의 권한이라고는 해도 요청을 받았으면 예의상 뭔가 얘기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생각이다.
미술계의 원로이자 최규서에게는 스승이기도 한 할아버지에게 이유라도 설명하는 게 도리다.
“이건 마르소가 한 말인데요.”
“응.”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짓을 할 리 없대요.”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럴 리 없다는 말이다.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남이 뭐라든 달라지는 일은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굳이 귀찮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앙리 마르소가 한 말이라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도 굳이 남을 신경 쓰지 않는데, 저들과 다른 점은 방향뿐이다.
최소한의 배려심을 가지고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마르소와 본인들의 배를 채우기 급급한 저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다.
“하긴. 그렇겠다.”
김지우가 뭔가를 적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기자님, 방태호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방태호가 나와 김지우를 번갈아 보곤 웃었다.
“벌써 시작하셨네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요. 베니스 비엔날레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잘됐네요. 안 그래도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잠깐 괜찮으실까요?”
김지우가 양손을 펴 보여 의자로 향했다.
“대한미술협회 이야기인데. 한국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더라고요.”
“이번 한국관 작가 선정 문제로요?”
“네.”
김지우가 잠시 고민했다.
“음. 일단 커미셔너 고유 권한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에요. 부부끼리 한다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고요.”
방태호가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마케팅을 워낙 잘했죠. 셀럽 부부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비엔날레에 공동 참여한다고 방송도 몇 번 탔고요.”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펼쳐 보였다.
“지난 3년 동안 국제 미술전 참가자 목록입니다.”
김지우가 고개를 쭉 내밀어 명단을 확인했다.
나도 관심이 있어 함께 보는데 아는 이름이 많진 않다.
“이 중에서 협회가 선발할 수 있는 미술전을 추리면 이렇게 되고요.”
“아.”
김지우가 작게 탄식했다.
방태호는 다른 파일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대한미술협회가 주관하거나 심사를 맡은 국내 미술 대회 수상자 명단이었다.
“세상에.”
“일명 최규서 라인이라고 하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최규서와 관련 있는 사람이 출전하고 수상했습니다.”
“저, 잠시 확인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김지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명단을 거듭 확인했다. 따로 검색해서 수상자를 대조해 보길 반복한 끝에 힘없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말도 안 돼.”
김지우가 테이블에 손을 얹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10년 전이랑 다를 게 없잖아요.”
장미래가 국전에서 대상을 놓쳤던 일을 말하는 것 같다.
“달라진 게 없죠. 그때도 지금도 협회장은 최영수니까요.”
“…….”
“언론도 한몫했습니다. 정한일보는 아예 대놓고 협회를 두둔하는 기사를 반복해 게시했더라고요.”
“그쪽이야…….”
“기자님.”
방태호가 진중하게 김지우를 불렀다.
“네.”
“전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나라 미술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지우의 목 근육이 움찔했다.
“기자님은 누구보다도 미술을 사랑하고 계시고요.”
고개를 끄덕인다.
김지우가 미술을 사랑하는 건 마르소와 데미안 카터 때 충분히 확인했다.
단순히 기사 조회 수 때문에 홀로 범죄 소굴에 잠입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만큼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고 미술을 사랑하기에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김지우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소스는 준비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글재주가 없어서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맡겨주세요.”
김지우가 가슴을 두드렸다.
믿음직스럽다.
“아휴. 전 또 영화 찍어야 하나 긴장했잖아요. 영국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지금도 몸서리친다니까요.”
“하핫. 그런 일을 부탁드릴 리가 없죠.”
방태호가 슬며시 웃고는 다시금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저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예화에 압박이 갈 수도 있고요.”
“괜찮아요. 어차피 나왔거든요.”
방태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간돼서 앞으로 유럽에서 활동한대요. 보자르라고 했죠?”
“응.”
김지우를 대신해서 설명하자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은 자리를 얻으셨네요.”
“사건 터뜨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죠.”
김지우와 마주 보고 웃었다.
“참. 그래서 예술가관은 어떻게 진행되는데?”
“프랑스랑 한국 작가들 모아서 하기로 했어요.”
“지원자가 많을 것 같아서 기준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도 노력은 해봐야죠.”
방태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양국 협력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프랑스 한국 연합으로 참가하려고요.”
스마트폰 메모 기능을 열어 ‘France-Corée parti’라고 적어주었다.
“너무 단순하지 않아? 뭔가 그럴듯한 이름이 더…….”
“마르소가 독특한 이름은 안 좋아해서요. 그래도 이거 한국말로 쓰면 괜찮지 않아요?”
“뭐가?”
“프랑스 한국 파티니까 불한당.”
“…….”
“……”
방태호와 김지우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바꾸는 게 좋겠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듣자마자 잊을 수 없는 이름인데, 이것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 * *
한편 한국에서는 이인호 기자가 장미래 교수를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음 질문은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데요.”
“그럼 하지 마세요.”
이인호가 당황해하자 장미래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뭔데요?”
“베니스 비엔날레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한국관 작가가 정해졌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참가하실 예정이신가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를 빨았다. 차가운 커피가 가슴을 진정시켰다.
“선생님하고 같이하기로 했어요. 훈이랑도요. 마르소도 한다고 하던데 재밌을 것 같아요.”
이인호는 장미래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국관 작가 선정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야 했으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들고 싶지 않았다.
이인호가 안절부절못하자 장미래가 씩 웃었다.
“규서 이야기 때문이죠?”
“아.”
“괜찮아요.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까.”
장미래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수열, 고훈과 달리 장미래는 최규서의 남편이 커미셔너로 선정된 이후로 한국관 참가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 잘난 협회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거라고 믿는 게 귀엽지 않아요?”
“네?”
“열심히 자랑하고 다니던데 그럴수록 더 창피해진다는 걸 왜 모를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