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1화
51. 전초전(1)
마르소의 제안을 전달했더니 크게 놀란다.
“관을 하나 더 만들자고?”
“네. 어차피 김수혁이 커미셔너로 있는 한 국제관에 참가할 순 없잖아요.”
이 문제가 공론화된다고 해도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또 여론에 압박을 받아서 김수혁과 최규서가 물러난다고 해도, 그들이 계속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베니스 비엔날레만이라도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새 국가관을 창설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설득을 거듭하자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겠어.”
할아버지 말씀에 방태호가 동의했다.
“하려던 일은 계속해야 할 겁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이사진을 설득하는 건 둘째치더라도요.”
“갑자기 관을 하나 더 만들면 의아해할 테니까.”
여론을 의식하시는 거다.
방태호도 같은 생각인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을 언급했다.
“한국관을 따로 세우는 이유도 필요합니다.”
“흠.”
표면적으로는 정당한 과정을 거쳐 선정된 커미셔너가 작가를 선정했을 뿐이니, 따로 한국관을 이룰 만한 정당성이 필요하다.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협회가 다른 작가를 배제하고 가족끼리 이권을 챙긴 일로 김수혁, 최규서를 규탄하면서도 한국관을 신설해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하다.
할아버지와 나, 장미래가 출전하기 위해서 새로 만드는 건 국민들에게도,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게 취지잖아요.”
“그렇지.”
협회장 일가족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관련한 권한이 집중된 것이 문제다.
누군가는 절차상 큰 문제가 없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보기엔 기존 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커미셔너를 선정하는 아홉 명 중 다섯 명이나 협회 사람이다.
문체부 예술정책관을 제외한 나머지 3명도 협회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한 명의 커미셔너에게 작가를 지목할 권한이 있는 것도 문제다.
“새로 만들 한국관은 커미셔너도 둘 이상 뽑는 거예요. 그럼 기회가 좀 더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을까요?”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모두가 참여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나 커미셔너가 둘 이상이 되면 적어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을 순 있을 거다.
“어떻게 생각하나?”
“직접 물어봐야 알겠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작가들도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가자도 되도록 많이 뽑고.”
“흠.”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생각을 이어가다가 마음을 굳혔다.
“내일 같이 랄프하고 만나보세. 한국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구만.”
“네.”
* * *
마르소는 미술 치료 과목 첫 강의에서 정서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아마 미술 치료 과목을 왜 배워야 하는지 알려주려던 것 같았다.
실제로 몸과 정신을 별개로 여겼던 내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강의였다.
상처나 자극, 위협을 느끼면 우리 몸은 스스로 보호하려고 아드레날린과 같은 요소를 분비하는데.
이와 같은 위협이나 불안을 스트레스라고 한단다.1)
일단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르몬이 발생하여 심박이 빨라지고 체온이 떨어지며 소화기가 손상된다고 한다.
입이나 혀가 헐거나 두통, 피로, 근육통 등도 나타나기도 한데다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신체 성장이 멈추고 생식선이 위축된다.
마르소는 코티솔이라는 부신피질호르몬이 발생하여 면역력이 떨어지고 바이러스, 세균, 암세포에 취약해진다고 설명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상처가 아니라도 정신적인 피해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말에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힘들었었나 싶기도 했다.
한시라도 붓을 놓지 못했던 것도 그런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르소에게 다가갔다.
“한국관 새로 만들 것 같아요.”
“알게 뭐야.”
“마르소 덕분이에요.”
“그걸 아는 놈이 전화를 그딴 식으로 끊어?”
마르소가 SNS, 문자 메시지, 음성 채팅에 익숙한 요즘 아이는 전화 예절이 없다고 불평했다.
요즘 아이와 달리 전보에 익숙한 탓이나 어찌 되었든 마르소가 말하는 전화 예절을 지키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듣고 보니 확실히 인사와 맺음을 확실히 하는 쪽이 옳기에 사과했다.
“그렇게 할게요.”
콧방귀를 뀐다.
“아무튼 국제전 따위에 열 낼 필요 없어.”
“왜요?”
“프랑스적인 거, 한국적인 걸 개인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개인이 전체를 대변할 순 없지만 일부이기도 하잖아요.”
“잘 아네. 그 정도일 뿐이야.”
많은 사람이 한국화의 대가로 인정하는 할아버지도 본인은 한국화를 모른다고 하신다.
“그래서 되도록 많이 뽑는 쪽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린다.
“한 명이 열 명이 된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닮은 구석은 더 많을 거 아니에요.”
“남하고 같이해서 좋을 일 없어.”
“재밌었잖아요. 달리다 광장이나 뷰그레넬리 쇼핑몰. 계속 같이해야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가끔은 같이 뭔가를 만드는 것도 즐거울 거예요.”
마르소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만 알았던 그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지 이런 대화를 나눌 때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그래서. 마르소는 국제전에 안 나가요?”
“안 나가.”
“내년에 프랑스관 마르소가 꾸며야 한다고 하던데. 다들.”
“누가.”
“인터넷에서 봤어요.”
프랑스 미술 관련 커뮤니티에 접속해서 앙리 마르소라고 검색하자 베니스 비엔날레가 간혹 언급되었다.
“그놈들 때문이야.”
“그놈들?”
“프랑스관 커미셔너가 같이하자고 귀찮게 굴잖아. 그게 말이 돈 모양인데.”
“왜 귀찮아요. 같이 해봐요. 친구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마르소가 똥이라도 밟은 표정을 지었다.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는 마르소가 좀 더 행복해지길 바라서 한 말인데 몹시 불쾌한 모양이다.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럼 나는요?”
“뭐?”
“마르소하고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필요 없어요?”
“…….”
똥 밟았던 표정이 외계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변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나가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시끄러워.”
마르소가 일어났다.
아쉽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강요할 수 없는 법이다. 교문을 나섰다.
“타.”
앞서가던 마르소가 나를 불렀다.
“집에 갈 건데.”
“가.”
태워준다고 하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해서 차에 올랐다.
“근데 파브르는 수업 안 들어요?”
미술 치료 수업에 블랑쉬 파브르가 보이지 않았다.
“출석부에는 있던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말로는 마르소를 타도하자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마르소의 작품을 좋아하는 블랑쉬 파브르가 그의 강의를 놓칠 리 없다.
이따 전화해서 안부라도 물어봐야겠다.
얼마 걸리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마르소를 그냥 보내기도 무엇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라고 하자 군말 없이 따라 들어왔다.
1층 접대실에 랄프 루퍼스와 할아버지, 방태호가 앉아 있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루퍼스.”
“오. 학교 다녀왔구나.”
루퍼스가 반갑게 인사하더니 마르소를 보곤 반색했다.
“마르소 군.”
“랄프 루퍼스 관장.”
루퍼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장갑을 벗진 않았지만 마르소가 타인과 악수를 하다니.
친분이 있거나 랄프 루퍼스도 마르소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인 듯하다.
마르소가 할아버지를 향해 살짝 목을 숙이고 방태호와는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 인사를 나눴다.
예의 바르다곤 할 수 없지만 망나니 같던 전에 비해선 훨씬 나아 보인다.
“한국관 신설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방태호가 상황을 설명했다.
본인이 제안한 해결책이기도 한 만큼 조금은 관심 있는 모양.
마르소가 루퍼스에게 시선을 주어 답을 구했다.
“이사회도 크게 반대하진 않을 텐데. 문제가 없진 않네.”
“문제라니.”
“서두른다고 해도 내년 비엔날레에 곧장 적용하긴 힘들다는 거지. 게다가.”
“다른 나라 때문인가.”
“그렇네. 지금껏 이탈리아만이 개최지로서의 이점으로 두 곳을 운영해 왔는데 한국에서 두 곳을 열게 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지.”
그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방태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고수열 경과 장미래, 이 녀석이라면 명분은 충분할 텐데. 내년에 국한해서도.”
마르소가 한 번 더 반론을 제시했다.
할아버지와 장미래를 출전시키려는 이유라면 단발성 이벤트로 충분히 가능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 정도는 어떻게 설득이 되겠지만, 수열이 바라는 그림은 그게 아닌 듯하네.”
루퍼스의 말대로 할아버지와 내가 바라는 방향은 작가 선정 방식이 좀 더 공평하게 바뀌는 거다.
“내년에만 이벤트로 하고 그사이에 바꾸는 건 어때요?”
말을 마치자 방태호가 지지해 주었다.
“훈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해서 관을 늘리는 것보단 반발도 적을 테고. 사실 국내 문제를 해외에서 불거지게 하는 것도 꺼림직하지 않습니까.”
“창피한 일이지.”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당장 내년 비엔날레에 출전하고 싶으니 그 기회를 살리고, 그렇게 벌어낸 시간을 활용하여 대한예술협회를 바로 잡는 거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것 같은데 랄프 루퍼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화합을 테마로 한 전시관을 내자는 이야기가 나왔었네. 국가관에 지구촌관을 만들어서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를 초청해 보기로.”
할아버지와 방태호, 나 그리고 마르소도 랄프 루퍼스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지 잠자코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원자가 없어서 말이야. 다들 자국 전시관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고 싶어 해서 덮어둔 일이 있는데. 그걸 활용해 보는 건 어떤가.”
누구도 긍정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니 루퍼스가 한 번 더 말을 붙였다.
“아무래도 관을 하나 더 내는 건 부담스럽잖은가.”
“자네 말은 나와 훈이가 다른 사람하고 같이 하는 게 어떻냐는 말이지?”
“그렇지. 여기 마르소 군이 나서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할아버지, 나, 마르소가 서로를 번갈아 봤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내 생각엔 아주 재밌을 것 같은데 말이야. 자네도 따로 관을 내는 명분이 생기니까 괜찮은 이야기 아닌가?”
확실히 그렇다.
대한예술협회의 비리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따로 관을 내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도 돼요?”
“그럼. 사실 국가관이라는 게 국적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단다. 백동준 화백도 독일관에서 활동한 적 있었고.”
방태호가 다른 국적을 가진 작가가 타국에서 활동한 사례가 많다고 설명해 주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워낙 바쁜 친구니.”
할아버지가 마르소를 보며 말했다.
“굳이 마르소가 아니라도 괜찮잖아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라면 누구라도 화제가 될 거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사라 조지아, 니콜라 파티, 하오 렌, 혹은…….
“뱅크스는 어때요? 출신을 감춘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에선 취지에도 맞고. 화제도 될 것 같고요.”
정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그가 수락만 하면 더 좋을 수 없겠지.”
루퍼스도 동의하고 할아버지도 흥미가 있으신 듯 입술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정말 좋은데. SNS 계정이라면 연락할 수 있으니까. 루퍼스 관장님, 그 일 정말 진행 가능한 겁니까?”
“그럼요.”
“안 돼.”
분위기가 좋게 이어지던 차.
마르소가 찬물을 끼얹었다.
다들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니 태도를 완고히 한다.
“그런 녀석과 할 바에야 나랑 하지.”
“프랑스관에서 마르소 데려오고 싶어 하잖아요.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요.”
“무리 아니야.”
* * *
1)스트레스는 1915년 생리학자 월터 캐논에 의해 명명,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