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70화
50. 낯선 장소에서 만나다(3)
약속장소에 이르자 마르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인이 우리를 반겼다.
“랄프.”
“수열.”
할아버지와 반갑게 포옹을 나눈 이 사람이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이자 영국 공공미술관 헤이드워드 갤러리 관장, 랄프 루퍼스 같다.
목탄회색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관록이 느껴진다.
“자넨 볼 때마다 몸이 더 커지는 것 같아.”
“건강하게 살아야지. 자전거는 계속 타고 있나?”
“손자에게 넘겨줬지. 관절이 이제 좀 쉬고 싶다더군.”
랄프 루퍼스는 할아버지와 안부를 나누곤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훈이구나. 반갑다.”
“안녕하세요, 루퍼스.”
몸은 말랐지만 악수를 나눈 손에 힘이 제법 있다. 눈에도 생기가 도니 호감이 생긴다.
“따뜻한 세상을 보고 있더구나.”
내 그림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보다 기쁜 말이 또 있을까.
그동안 발표한 작품으로 마음이 통했다는 뜻이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랄프 루퍼스는 할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아쌈 티에 우유를 넣은 차를 주문했고 나는 탄산이 들어간 사과주스를 시켰다.
“그래. 씨몽 협회장하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
“재밌는 일을 구상하더군.”
랄프 루퍼스가 씩 웃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확대할 생각이야. 워낙 반응이 좋았으니 무리도 아니지.”
이미 국제적인 행사인 아르누보 공모전을 어떻게 더 확대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당시에도 여러 작품을 공평하게 전시하는 일로 고생했는데, 단순히 참가자를 늘린다는 말은 아닐 듯싶다.
“확대라니? 어떻게 말인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인지 되물어 보신다.
“완전히 독립된 행사로 진행하려는 것 같아.”
아르누보 공모전은 SNBA 살롱전 특별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한 입문 과정이었다.
그러나 작년에는 도리어 아르누보 공모전이 더 큰 화제를 몰았고 큰 수익을 올렸다.
SNBA는 이 기회를 좀 더 살리고 싶은 모양이다.
“좀 더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접근하려는 것 같더군.”
“예를 든다면?”
“실시간 투표를 활용한 중계방송이라든가 말일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따르고, 돈이 있는 곳에 예술이 피어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생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미술가는 본인이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미술을 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보상이 따라야 한다.
“그렇군.”
할아버지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이유도 아마 그것에 공감하시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국가관 쪽에서 자네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하던데. 어찌 된 일인가.”
“음?”
“베니스 비엔날레 말일세. 이번에는 쉬려고?”
나도 할아버지도 랄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모집한단 소식도 못 받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랄프 루퍼스도 이상함을 눈치채곤 한국관 참여자 명단을 보여주었다.
‘최규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 적혀 있다.
의아한 점은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장미래나 서인호처럼 익히 아는 작가가 한 명도 없다.
오직 최규서뿐이다.
우리나라 작가를 전부 아는 건 아니긴 해도 이상하다.
“규서 이 녀석이…….”
“문제가 있나 보구만. 한데 규서라면 자네 학생 아니었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의 정년퇴임식 때 만났던 사람이다. 장미래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런 걸 일방적으로 정할 수도 있어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협회에서 비용을 지불하게 돼 있어. 작가도 국가별 커미셔너가 선정하는데 올해는 누군지 모르겠구나.”1)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책임자(커미셔너: Commissioner)가 누군지 물어보셨다.
“분명 김 씨였는데.”
랄프 루퍼스가 명단을 찾아 보여주자 할아버지가 신음하셨다.
“왜요?”
“김수혁이. 규서 남편이구나.”
설명을 들어보니 대한예술협회장 일가족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다.
“그럼 참가 못 하는 거예요?”
“국가관으로는 참가하기 힘들 것 같아. 다른 방도가 있나?”
할아버지가 랄프 루퍼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국가관 운영은 나라마다 고유한 일이라 내가 어떻게 할 방도는 없네. 정말 유감일세.”
할아버지, 장미래와 함께 한국관을 꾸며볼 좋은 기회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 보는 건 어떤가. 그쪽으로는 힘 써보겠네.”
여러 미술제가 국가주의, 지역주의에서 탈피했지만 베니스 비엔날레는 유독 국가관 전시가 조명받고 있다.
총감독이 기획하고 작가를 초청하는 국제전(본 전시)과 나라별 커미셔너가 따로 있는 국가관이 따로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중 할아버지와 나, 장미래는 국가관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거다.
커미셔너의 고유 권한이라고는 해도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해 온 할아버지와 장미래는 서운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랄프 루퍼스가 초청해 준다니 국제전에는 참가할 수 있겠다.
“그래야지.”
할아버지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 * *
집으로 돌아와 방태호와 함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할아버지와 장미래는 작년부터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하고 싶다고 협회에 이야기해 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커미셔너가 선정되기 전이라 9명의 위원이 뽑은 커미셔너에게 협력하겠단 뜻도 전했다고 하신다.
그러나 참고하겠단 답변만 돌아오고 일이 어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안내받지 못하셨다고 한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방태호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인 모양.
헛웃음 짓더니 정색하고 나섰다.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안 되지.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생길걸세.”
할아버지 말씀에 백번 공감한다.
방태호도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주먹을 쥐었다.
“어떡하면 좋겠나?”
“공론화해야지요. 일단 피해 사례 모아서 기자들한테 소스 제공하면.”
“쉽지 않을걸세.”
할아버지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여기저기에 손을 뻗치고 있는 놈들이야. 국전 문제도 유야무야 넘어갔고.”
과거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유력한 대상 후보였던 장미래가 최규서에게 밀려났던 일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관련 종사자가 아니라도 미술에 관심 가진 사람이 많아졌으니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방태호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민하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김수혁이가 본인의 의도에 부합하는 작가를 선정했다고 나오면 아무 문제 없네.”
듣자 하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커미셔너가 작가를 지명한다고 한다.
그 커미셔너는 당연직 위원 2인(대한예술협회 사무처장,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관)과 미술계 위원 7인이 선정한다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규정 위반을 한 것도 아니니, 반격당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고 싶으신 거다.
“문제점을 확실히 잡아야겠죠. 다른 일도 아니고 나라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지 않습니까.”
방태호는 김수혁이 커미셔너로 선정된 과정에 비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커미셔너로 발탁된 이후 아내 최규서만을 초청한 건 명백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다.
“흠. ……학교 쪽에는 내가 이야기해 두겠네. 자네는.”
“네. 이인호 씨는 훈이한테 우호적이니 분명 기사 써 줄 겁니다. 예화 김지우 씨도요.”
그러고 보니 김지우가 요즘 연락이 없다.
달리다 광장과 뷰그레넬리 쇼핑몰 이후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던 차, 김지우에게서 오랜만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지우 기자님 내일 파리로 온대요.”
“그래?”
“집으로 오라고 할까요?”
“그래. 분명 도움이 될 게다.”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으로 올라와 김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아!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네. 기자님은요?”
-어. 조금 애매하지? 하항핳.
무슨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좋지 않은 일을 겪어도 밝게 웃는 걸 보면 참 건강한 사람이다.
-이번에 유럽에서 일하게 됐거든. 집이랑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가.
“예화는요?”
-좀 어렵게 됐어. 그래도 이젠 쓰고 싶은 거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게 됐으니까 좋은 걸지도?
긍정적인 태도다.
“분명 더 잘될 거예요.”
-고마워. 그래서? 내일 볼 수 있어?
“네. 집에서 봐도 돼요? 할아버지가 지낼 곳 없으면 손님방에서 묵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정말? 정말이지?
“그럼요.”
스마트폰 너머로 김지우가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나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럼 내일 보자. 저녁 즘에 도착할 것 같아.
“좋아요. 조심히 와요.”
-그래~ 고마워!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르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잠깐 볼 수 있어요?”
-얼마나.
“바빠요?”
-……빌어먹을 영감이 내일 강의도 맡겼어.
내일 심화 수업이면 미술 치료 과목인데 아는 것도 많다.
“베니스 비엔날레 일 때문인데 마르소는 좋은 생각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베니스?
상황을 간단하게 전달하자 마르소가 스마트폰 너머로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버러지 사육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죽여도 죽여도 기어 나오는 걸 보면.
같은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국제전에 참가하면 된 거 아니야? 한국관에서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전시장 전체를 꾸밀 수 있잖아요.”
커미셔너와 다른 작가까지 여럿이서 함께하는 일이다 보니 마음대로 꾸밀 순 없겠지만, 협력이라는 틀에서 작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달리다 광장과 뷰그레넬리 쇼핑몰에서의 경험으로 함께해서 얻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다.
-국가관을 더 만들어.
“……네?”
-만들라고.
마르소하고 대화하다 보면 이야기를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뭐라고요?”
-이탈리아도 두 개잖아. 이탈리아관이랑 베네치아관. 고수열 경이 나서고 랄프 루퍼스가 이사회만 설득하면 될 일인데 무슨 걱정이야.
“…….”
상상도 못 해본 방법이라 잠시 고민되었지만, 선례가 있다면 불가능하다고만 볼 순 없을 거다.
마르소 말처럼 베니스 비엔날레 이사회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두루 존경받는 할아버지와 인기 작가 장미래에 나도 있으니 어쩌면 베니스 비엔날레 이사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멋져요.”
-그걸 지금 알.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있는 2층으로 내려갔다.
* * *
1)작중 등장하는 단체 및 인명은 실존하는 단체, 인물과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