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69화 (22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9화

50. 낯선 장소에서 만나다(2)

“그전에.”

마르소가 날 보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넌 지금부터 날 그려.”

“뭔 소리예요?”

“시키는 대로 해.”

말도 없이 약속을 취소해 놓고, 강의는 하지 않는다는 말도 지키지 않은 주제에 이제는 수업 시간에 자기를 그리란다.

“수업 들을 거예요.”

“안 들어도 돼.”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내가 왜 마르소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넌 학생이고.”

마르소가 평소처럼 한 치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확신에 차 말했다.

“난 선생이니까.”1)

* * *

“빨리 그려.”

앙리 마르소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고훈을 재촉하곤 수업을 이어나갔다.

“고대 이집트 그림이다.”

앙리 마르소가 터치스크린 칠판에 <네바문의 정원>을 띄웠다.2)

“네바문이란 자의 무덤에서 발견한 벽화 일부다. 연못이 있는 정원을 표현했지.”

“연못?”

<네바문의 정원>을 본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그림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연못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라고 하기에는, 물고기와 오리가 옆으로 누운 채 수면에 떠 있었다.

“이상하게 보는 게 맞아.”

앙리 마르소는 학생들이 품은 의문을 당연하게 여기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어. 그림이라고 하기보단 지도를 그렸다고 해야겠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못은 어디에 있는지. 어느 위치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보이려고 했던 거야.”

앙리 마르소가 물고기를 하나 가리켰다.

“연못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의 윗모습을 그렸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물고기인지 알 수 있나?”

“아니요!”

“그래. 오리도, 옆으로 누운 나무도 마찬가지다. 고대 이집트 화가들은 사물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그렸어.”

선생님의 설명에 학생들이 그제야 이집트 그림이 왜 낯선 형태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앙리 마르소가 다음 그림을 보였다.

“늪지의 새 사냥이란 그림이다. 여기선 뭐가 이상하지?”3)

고훈이 손을 들었지만 마르소는 무시하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운데 새를 잡고 있는 남자는 어떻게 서 있지?”

“옆으로요!”

“다시 봐.”

옆으로 서 있다고 말한 아이들이 다시금 파라오를 살폈다.

얼핏 봤을 때는 옆으로 서 있지만 자세히 살피니 부자연스러웠다.

하체는 옆을 향해 있고, 상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마르소가 발을 가리켰다.

“발을 보면 옆으로 향해 있지만 상체는 정면을 향해 있지. 굳이 이렇게 불편한 자세를 취하게 한 이유는.”

“잘 알아볼 수 있어서요!”

“그래.”

마르소가 학생들의 대답에 만족하며 남자의 눈을 가리켰다.

“같은 이유로 눈도 정면을 보고 있다. 옆을 보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그려야지.”

마르소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옆에서 바라본 눈을 간단히 그려주었다.

“또 찾아봐.”

학생들은 무엇이 이상한지 찾다가 가운데 파라오 아래 있는 사람이 작다는 걸 발견해냈다.

“그래. 이 시기의 화가들은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키우고 줄였어. 가운데 남자는 파라오고 그 아래는 시종이라고 볼 수 있겠지.”

마르소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파라오는 위대하다. 위대한 존재는 크다. 이런 관념을 추상이라고 한다.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나무는 이렇게 생겼고 물고기는 이렇게 생겼으니 형체를 온전히 그려야 한다는 행위 역시 추상의 영역이야.”

마르소가 칠판에 적어 둔 이집트란 글자 옆에 추상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그리스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을 보여주곤 이야기를 풀어냈다.

“고대 그리스인의 신앙은 운동 경기와 밀접했다.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을 곧 신의 은총으로 여겼지. 때문에 우승자는 본인이 신의 세례를 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본인의 신체를 조각상으로 남겼다. 당연히 자랑스레 보이고 싶었겠지.”

마르소가 <원반 던지는 사람>을 보여주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4)

“인체가 완벽하게 맞아 들진 않지만 고대 이집트와 비교하면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한 걸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화가, 조각가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움직이는지 연구하고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힘썼다. 넓은 의미로 이를 구상이라고 한다.”

마르소가 그리스 옆에 구상이라고 적었다.

“미술사는 화가들이 추상과 구상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가 강성했을 때는 추상적 개념이 많이 들어갔고 왕권이 강했을 때는 구상적 요소를 강조했지.”

마르소가 잔뜩 심통이 난 고훈을 보았다. 그림을 다 그렸는지 마르소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시대가 흐르며 각 기법이 발달하고 새로 생기기도 하면서 발전해 왔지만 이 두 가지 개념을 머릿속에 두고 이해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린 거 가져 와 봐.”

마르소는 고훈의 그림을 통해 추상과 구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구상에 기반한 추상적 개념을 그리는 걸 즐기는 고훈의 그림이라면 아이들에게 좋은 예시가 될 듯했다.

고훈은 순순히 마르소를 그린 초상화를 넘겼고, 그것을 본 마르소는 눈썹을 찌푸렸다.

피부는 목재처럼 표현했고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씌워두었다.

코는 기이할 정도로 길게 그린 것이 꼭 피노키오 같았다.5)

“뭐야.”

“뭐가요.”

거짓말을 한데다 입장을 이용해 그림까지 그리라고 하니 화가 잔뜩 난 고훈이 대들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했어.”

“했잖아요. 강의 안 한다며. 시간 없다며.”

“없어!”

“근데 왜 여기 있는데! 나 부려 먹으려고 왔어요?”

“저 영감이 협박해서 왔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갑자기 싸우자 학생들이 놀라 눈만 껌뻑댔다.

두 사람이 왜 말다툼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하던 차, 슬며시 다가가 초상화를 챙긴 니콜라스 푸생 교장이 피식 웃었다.

“아주 멋진 초상화네요.”

아이들이 피노키오 꼴을 한 마르소를 보곤 함께 웃었다.

“마르소 선생님, 수업 계속하셔야지요?”

* * *

“빌어먹을.”

니콜라스 푸생은 고훈이 그려준 초상화를 두고 씩씩대는 제자를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훈이랑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학생들이 앙리 마르소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기에 강의를 부탁했는데, 주말 동안 수업 준비를 하느라 약속을 미룬 듯했다.

“신경 꺼.”

마르소가 <거짓말쟁이 마르소>를 챙기곤 일어섰다.

“참. 미술 치료 강의도 부탁해야겠구나.”

“뭐?”

미술사 강의로도 모자라 미술 치료도 가르치라는 말에 앙리 마르소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니콜라스 푸생에게는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늙었더니 병원에서 자꾸 오라고 하잖느냐.”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마르소가 지난주 금요일을 떠올렸다.

몸이 좋지 않다며, 달리 강의를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 꼭 좀 부탁한다던 니콜라스 푸생은 오늘 직접 만나니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푸생은 옅게 웃으며 마르소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과 나왔어?”

푸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는데. 어? 어디가 안 좋은데?”

“재검부터 받아보자고 하더구나.”

“뭐가 이상하니까 재검이 나온 거 아니야. 뭔데!”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할 필요 없잖니.”

푸생이 마르소를 달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미술 치료 수업만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병원 간다고 수업을 미룰 수도 없으니.”

마르소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다른 학교는 선생이 파업한다고 학생도 보내지 말라고 하더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아픈 거잖아!”

“그럴 수야 있니.”

“빌어먹을. 다른 놈은 어쩌고 영감만 일해!”

“다들 각자 일로 바쁘지.”

푸생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네게도 부담이겠구나. 마음 쓰지 말고 가보도록 하려무나. 검사는 좀 미루면 되지.”

“말 같은 소릴 해! 검사를 왜 미뤄!”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마르소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고령의 은사가 몸이 안 좋은데 마음 놓고 병원에도 가지 못한다고 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해줄 테니까 내일 당장 검사받아. 알았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푸생은 귀여운 제자가 결국 자신을 도와 좋은 일을 하러 나서주니 그저 기뻤다.

한편.

“허허.”

하교한 고훈에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은 고수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교장 선생님도 보통이 아니구나.”

“협박인지 진짜인지 몰라서 더 걱정됐대요.”

나이 많은 은사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야 한다며 수업을 부탁했다니, 사람이라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훈은 마르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긴. 연세가 많으시니.”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나이를 먹으면 안 보이는 곳이 아프단다. 심각한 병이 없더라도 주기적으로 검진받는 게 좋지.”

“할아버지는 건강하시죠?”

“그럼. 증손자 업고 놀 때까지 건강할 거다.”

“증손자?”

“장가가면 애 볼 거 아니냐.”

“전 결혼할 생각 없는데.”

“뭐! 왜!”

“누구 만나면 불행해지더라고요.”

올해로 만 11살인 손자가 누구를 만나면 불행해진다고 하니, 고수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 사귄 적 있었어?”

고훈이 잠시 망설이다가 거짓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지난 삶에서의 연애담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 보면요. 드라마 얘기였어요.”

“이 녀석아, 드라마는 다 재밌게 만들려고 하는 거지. 일부러 비극적이고 복잡하게 하는 거야.”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지금도 그 막장. 아니. 엄한 드라마 막 보는 건 아니지?”

“그럼요. 안 봐요.”

의심스러운 시선을 느낀 고훈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늦겠어요. 랄프 만나러 간다면서요.”

* * *

1)2002년 MBC 수목 드라마 <로망스> 5화 中 김채원의 대사 패러디.

2)<네바문의 정원>, 기원전 1400년경, 작자 미상

3)<늪지의 새 사냥>, 기원전 1400년경, 작자 미상

4)<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450년경, 미론의 청동 조각을 복제한 작품.

5)피노키오, 카를로 콜로디, 1883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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