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68화 (22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8화

50. 낯선 장소에서 만나다(1)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이미지의 배반>이란 작품은 특히나 그러하다.1)

누가 봐도 아주 훌륭한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두다니.

처음 봤을 때는 참 당황스러웠다.

르네 마그리트가 나를 농락하는지, 장난을 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담배 파이프에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도 살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그냥 이상한 그림이라고 치부해도 될 텐데, 생경한 이미지와 문구에 이끌려 몇 시간이고 <이미지의 배반>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조금씩 르네 마그리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제목에 답이 있었다.

파이프를 그렸지만, 이미지로서의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될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사실 모든 그림이 그러하다.

단순한 사실이다.

내가 그린 해바라기도 해바라기 그림일 뿐이지 해바라기일 순 없는 것처럼 그림과 실물은 같을 수 없다.

단순히 똑같이 생기지 않아서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는 해바라기가 온전한 해바라기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단어는 실물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나와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해바라기를 해바라기라고 부르지만, 그 어떤 해바라기도 같을 순 없다.

이미지와 단어는 하나의 객체와 개념을 완벽히 담아낼 순 없다는 게 르네 마그리트의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또 한 번 사고를 이어나갈 수 있다.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로 실물을 복제하는 화풍이 쇠퇴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화가들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다.

르네 마그리트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는 실제 담배 파이프와 똑같은 그림을 그려두고, 그것이 담배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림의 의의를 재정립했다.

그림은 단순히 실물을 캔버스에 옮겨 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답인가.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르네 마그리트는 다양한 작품으로 실험을 이어나간다.

그중 내가 관심 있게 본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가 1929년에 그린 <심금>.

초원과 산이 어우러진 근사하고 평범한 풍경화인데 단지 산보다 큰 유리잔이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미지. 즉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르네 마그리트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지금에야 합성 기술이 워낙 뛰어나니 사진이나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도 이런 걸 구현할 수 있다지만.

당시 사진 기술로는 이런 광경을 보여주긴 힘들었을 거다.2)

그야말로 화가만이 할 수 있는 일.

붓과 물감을 자유롭게 놀려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마르소와의 약속이 취소된 주말 내내 르네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에 푹 빠져 버렸다.

* * *

“오늘 조금 늦는다고 했지?”

월요일 아침.

아침 식사 중에 할아버지가 학교 수업이 늦게 끝나냐고 물어보셨다.

오늘 오후에는 미술 심화 수업이 있어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끝난다.

“네. 3시에 끝나요.”

미술 심화 수업은 앙리 4세 중학교에 입학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 교육자로 유명한 니콜라스 푸생 교장이 앙리 4세 고등학교, 중학교 재학생 중 미술 특기자를 대상으로 심화 강의를 하기 때문이다.

마르소와 파브르가 반복해 칭찬한 만큼 기대하고 있다.

“파브르도 만나겠구나.”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미술사라서 안 나올 거예요. 미술 치료 수업만 듣는대요.”

“미술사라.”

할아버지가 김치찌개를 한 수저 뜨곤 말씀하셨다.

“곰브리치 책으로 공부한다니?”

“어떻게 아셨어요?”

“워낙 유명하니까.”

학교에서 나눠준 쿠폰으로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구입해 뒀는데, 할아버지도 잘 알고 계신 모양이다.

“좋은 책이지. 하지만 맹신하면 안 된단다.”

학교에서 교재로 활용할 정도의 책이라면 분명 검증받았을 텐데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

“어떤 점이요?”

“아주 체계적이고 예술가적 관점에서 잘 구분해서 서술했지만 현대 예술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거든.”

“아.”

“그렇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란다. 젊은 사람이나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쓴 책이니만큼 논리정연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할아버지 말씀이니 대충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온다.

항상 여러 관점에서 생각하시는 분인 만큼 비판적인 자세로 이해해 보라는 말씀이리라.

“그럼 시간 맞춰 데리러 가마.”

일주일이나 혼자 다녔는데도 걱정이 많으시다.

“혼자 올 수 있어요. 버스가 집 앞까지 태워주는데요. 뭘.”

“잊었구나.”

할아버지가 씩 웃으셨다.

“오늘 누구 만나자고 했잖니.”

그런 말을 하셨나 싶어 주말 동안의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르네 마그리트와 ‘낯설게 하기’에 푹 빠져서 할아버지 말씀을 잘 안 들었던 모양이다.

“누구 만나시는데요?”

“랄프라고 이탈리아 친구란다. 파리 온다길래 겸사겸사 차 한 잔 마시려 했는데 너도 만나보고 싶다지 뭐냐.”

“이탈리아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에 이탈리아까지. 할아버지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다.

“그래. 이탈리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비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묻지 않은 이야기도 해주셨다.

“이래저래 바빠서 만나기 힘든 사람인데 씨몽 협회장과 무슨 일이 있다더구나.”

셰바송 씨몽 SNBA 협회장과 만난다면 랄프라는 사람도 미술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리라.

“예술가예요?”

“큐레이터.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이야.”

“그런 분이 저를 왜요?”

“왜긴. 서리 밀밭하고 여름 너울을 보고 팬이 됐다고 하더구나.”

베니스 비엔날레를 총감독할 정도면 상당한 거물인데, 내 그림을 좋아한다니 기쁘다.

“또 내년 비엔날레에서 주목할 화가이기도 하고 말이다.”

할아버지가 또 나를 치켜세우신다.

“부담스러워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지만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도 고민 중이다.

휘트니 비엔날레와 비슷할 정도로 큰 규모인데 상까지 달려 있으니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리라.

내 주변에서만 할아버지에 마르소, 장미래까지 참가하니만큼 낙관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부담스럽긴. 상은 자연스레 따라올 테니 작품 생각만 하면 돼.”

“상 받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크게 세 가지 상이 있다.

황금사자상, 평생공로상, 특별상.

그중에서 내가 노릴 만한 상은 황금사자상과 특별상이다.

황금사자상은 다시 국가관상, 개인작가상, 젊은 작가상의 세 부문으로 나뉘는데 그중 국가관상과 젊은 작가상을 기대한다.

할아버지, 장미래와 함께하는 한국관은 상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35세 미만이라는 조건이 붙은 젊은 작가상도 받아보고 싶은데, 마르소를 제외하고 특별히 경쟁자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좋게 생각했을 경우가 그렇지 국가관상은 프랑스, 영국, 미국이 꽉 잡고 있으며 마르소는 누가 뭐라 해도 가장 강력한 경쟁자다.

쉬울 리 없다.

총감독을 만난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베니스 비엔날레 현장이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슬슬 시간이 되지 않았나?”

“맞아요.”

차시현의 부모님이 항공편으로 보내주신 나물 반찬을 입에 쑤셔 넣고 일어났다.

* * *

학교 수업을 듣는 도중에도 작품 생각으로 가득하다.

낯선 장소에 낯선 물건을 놓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재미에 맛을 들린 탓인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

학습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책상 대신 침대를 놓는 건 어떨까.

아니면 아예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옮겨 에펠탑에 세워두는 건 어떨까.

그도 아니면 아이들로 에펠탑을 쌓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아니.

이런 단순한 발상으로는 아무 충격을 줄 수 없다.

“…….”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충격을 주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르네 마그리트에 너무 깊게 감명받은 탓에 ‘낯설다’는 느낌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생소한 장소에 전혀 생각지 못한 물건을 둔다는 형식에만 매달려서는 의미 없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낯설게 하기’를 온전히 소화하려면 상처를 보듬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중요한 건 메시지와 나.

형식과 기법은 빌려올 뿐이다.

지금까지 밀레 스승을 비롯해 수많은 화가를 선생으로 여겼듯 르네 마그리트 또한 다르지 않다.

“자, 그럼 현재 활동 중이신 화가 한 분을 모시도록 하겠어요.”

낯설게 하기에 얼마나 심취했으면 환각까지 본다.

푸생 교장이 고개를 돌리자 마르소가 교실로 들어온다.

“와!”

“앙리다! 진짜 앙리잖아!”

학생들이 갑자기 소리를 치며 환호한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르소가 턱을 치켜들고 교실을 훑어본다.

“오늘부터 2주간 미술사 강의를 맡은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르소다.”

“와아아아아!”

아무래도 망상이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아플 지경이다.

“진짜 앙리야!”

“미쳤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생겼어?”

“앙리, 저 사인해 주세요!”

화가, 조각가 등 미술 관련 직업을 꿈꾸는 아이들인 만큼 마르소를 잘 아는 모양.

푸생 교장이 아이들을 다독이곤 있지만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나저나 안 한다며.

꼬맹이들 가르칠 시간 따위 없다고 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강단에 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혹시 주말에 약속을 취소한 것도 이 때문인가 싶다.

탕-

마르소가 책상을 내려쳤다.

“입 다물어. 귀한 시간 내서 왔으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마.”

“네!”

아이들이 힘차게 답하자 푸생 교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리도 생기 있는 대답은 나도 처음 듣는다.

“곰브리치는 본인의 저서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마르소가 칠판에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적었다.3)

“이 말은 각 시대의 미술이 미술이라는 단어로 규정되나 각기 다른 형태와 의미를 가지기에, 미술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라는 명사가 파이프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했듯이.

곰브리치 또한 미술이라는 단어가 미술의 역사와 미술가들의 행위 전체를 포괄할 순 없다고 말한다.

“때문에 미술사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기준을 두고 싸워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부터 네 시간 동안 누가 어떻게 발버둥 쳤는지 알려주지.”

마르소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미술을 하고 싶다면 새겨들어야 할 거다.”

“네!”

아이들이 명랑하게 대답하자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곤 칠판에 이집트라고 적었다.

* * *

1)<이미지의 배반>, 르네 마그리트, 1929, 캔버스에 오일.

담배 파이프 그림 아래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두었다.

2)작중 고훈이 사진의 역사를 잘 모르기에 생긴 오해.

사진 합성 기술의 역사는 사진의 역사와 함께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1826년 처음 사진기가 발명되고, 1861년에 세계 최초로 합성 사진이 등장한다.

바로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진인데, 키가 크고 당당한 존 칼훈의 몸에 링컨의 얼굴을 붙인 합성 사진이다.

최초의 ‘포토샵’이 적용된 사례.

*반 고흐가 사진 합성, 편집 기술을 잘 몰랐다는 건 어디까지나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설정일 뿐, 사실로 확인된 바 없다.

3)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예경, 1997),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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