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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66화 (22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6화

49. 미술 수업(4)

“너 혼자 여기서 뭘 어쩌겠다고 고집이야! 자꾸 아빠 힘들게 할래!”

“가! 가라고! 언제부터 나 신경 썼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아들을 데리고 가려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거부하는 아들.

“그 여자네 집에 가기 싫다고!”

자크가 아버지의 손을 뿌리쳤다.

남자는 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자크 비달.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마.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네겐 새엄마 되실 분이야.”

“아니야!”

대충 들어보니 남자가 재혼한 모양이다.

무슨 이유로 이혼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자크가 받아들이기엔 힘들 수 있겠다.

“좋아. 새엄마라고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일단 아빠랑 가자.”

남자가 아들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자크는 또 한 번 몸을 비틀었다.

거듭된 설득에도 완강히 맞서자 남자도 감정이 격해졌다.

“여긴 더 이상 네 집이 아니야! 엄마도 없고 아빠하고 살기도 싫으면 혼자서 어떻게 살 거야!”

자크는 입을 앙다물고 아빠를 노려보았다.

“마음대로 해.”

남자가 자리를 뜨자 길에 남은 자크가 주저앉았다.

아무리 대화가 안 통해도 그렇지 애를 길에 두고 떠나니 무슨 생각인가 싶다.

“훈아?”

안타까운 마음에 다가가려 하자 할아버지가 불렀다.

“왜? 아는 애야?”

“같은 반 애예요.”

할아버지가 다녀오라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다.

사정을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가정사에 쉽게 참견할 수도 없어 일단 곁에 앉으니 고개를 돌린다.

“너 뭐야!”

날 알아보고는 벌떡 일어서서 눈물을 닦았다.

“앉아 봐.”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 내 집이야!”

바로 뒤에 있는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다주택용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알겠으니까 일단 앉아 봐. 초콜릿 먹을래?”

초콜릿을 하나 주니 제 아버지한테 했던 것 이상으로 소리를 빽빽 지른다.

시끄럽다.

“목소리 좀 낮춰.”

“가! 가라고!”

내게만 그런 줄 알았거늘 인제 보니 자기 아버지한테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일관되게 버릇없는 녀석이다.

“너네 집 확 사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고 앉아.”

“뭐?”

“못할 것 같아?”

당황한 녀석의 입에다가 초콜릿을 물리고 강제로 앉혔다.

“신경 쓰지 마. 혼자 두면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아서 온 거니까.”

“너야말로 신경 꺼!”

“씁. 어디 빽빽 소리를 질러대.”

“뭐?”

“그런다고 해결되는 게 있었어? 혼만 나지. 남을 설득하려면 감정에 호소하거나 논리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야. 진심을 보이거나.”

“…….”

“하나 더 먹어.”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었지.

특별히 맛있는 초콜릿을 주었다.

듣자 하니 이미 이곳은 이 아이의 집이 아닌데, 고집을 부리는 것 같다.

집에 올라가지 않고 거리에 앉아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에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말없이 같이 있어 주길 얼마간.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뭐야.”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무서웠는지 목소리를 잔뜩 떤다.

“나도 모르겠다.”

언제까지고 같이 있어 줄 순 없으니 경찰에라도 연락해야 하나.

그 남자가 돌아오는 게 최선이라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녀석이 또 고개를 푹 숙이길래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훈아.”

할아버지가 다가오셨다.

“무슨 일 있어?”

“아빠랑 싸운 것 같아요. 혼자 두기 그래서 같이 있는데.”

할아버지께 상황을 설명하던 중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정신이야? 그렇다고 애를 두고 오면 어떡해?”

고개를 돌리니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이 자크의 아버지에게 마구 쏘아대며 다가왔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자크를 발견하더니 서둘러 달려왔다.

“자크!”

자크가 그녀를 알아보더니 일어나 물러섰다.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대하듯 뒷걸음질 친다.

“괜찮아? 응?”

대답은 안 하고 노려보기만 하자 뒤따라온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대답해야지.”

“싫어.”

“자크!”

“가만있어 봐 좀!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애가 받아들여? 그러지 않아도 힘든 애한테 왜 그래? 당신 아들이잖아.”

여성이 쭈그려 앉아 자크를 대했다.

“아빠 따라서 집에 가자. 응? 아줌마 같이 안 갈 테니까.”

“…….”

“부탁해. 여기 혼자 있으면 못된 사람들도 만나고, 춥고. 배도 고프잖아.”

“착한 척하지 마! 그런다고 속을 줄 알아?”

“자크!”

남자가 당장에라도 자크를 때릴 것처럼 다가왔지만 여자가 그를 말렸다.

여자도 당황하고 속상한지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기도 하며 시선을 한군데 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해도 돼. 그래도 아빠는 믿을 수 있잖아. 아빠랑 같이 가자.”

남자도 한 번 심호흡하고선 손을 뻗었다.

“싫어.”

“자크.”

“아빠도 거짓말쟁이야. 아빠만 아니었으면 엄마도 안 죽었어! 아빠 때문에 죽었잖아!”

여자가 자크의 뺨을 감쌌다.1)

자크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데, 여자는 이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여자가 자크의 손목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아빠도 자크만큼 마음이 아파. 자크만큼 엄마 사랑해.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자크는 아빠 마음 알잖아. 얼마나 아픈지 알잖아.”

자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딨어. 다신.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알겠어?”

“…….”

“대답해!”

여자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크를 다그쳤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이라 어떻게든 잘해주고 싶고, 친해지고 싶을 텐데 잘못했을 때는 바로 꾸짖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자크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보다, 자크가 정말 바른 아이로 자라길 바라기에 저럴 수 있지 않을까.

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 * *

다음 날.

할아버지와 운동을 하고 집에 막 들어서는데 마르소가 전화를 걸었다.

내일 독일 뮌스터를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뒤로 미루잔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나와 함께하는 사전 조사를 미룰 리 없어 걱정된다.

“무슨 일 있어요?”

-그런 일이 있어.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다.

굳이 말하기 싫은 기색이다.

“알았어요.”

통화를 마쳤다.

“할아버지, 뮌스터 다음 주에 가기로 했어요.”

“왜? 무슨 일 있대?”

“모르겠어요.”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만 이유 정도는 설명해 주는 게 도리이거늘.

인성 참 고약하다.

“껄껄. 서운한가 보구나.”

“하나도 안 서운해요.”

샤워하고 학교 갈 채비를 마쳤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집 앞으로 나가자 시간에 맞춰 통학버스가 왔다.

“안녕하세요.”

기사님께 인사하고 올라서자 아이들이 반겼다.

“여기! 여기 자리 있어!”

“훈아! 여기 앉아!”

어디에 앉으라는 건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불러댔다.

시선을 옮기다 보니 가장 뒷자리에 뾰로통하게 창밖을 보고 있는 자크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아는 척하지 않고 수업을 듣고 있으니 마르소가 점점 더 괘씸해졌다.

나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주말 내내 뮌스터에 있자고도 먼저 말했으면서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약속을 뒤로 미루다니.

암만 생각해도 짜증이 올라온다.

“참아야지.”

그 인간이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소중한 점심시간을 망칠 순 없다.

화를 풀고자 디저트라도 실컷 먹을 생각이었는데, 치즈 케이크는 한 사람에 한 조각뿐이란다.

되는 일이 없다.

“어제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했겠지?”

치즈 케이크를 먹는데 자크가 다가왔다.

“너 신경 쓸 시간 없으니까 저리 가.”

마르소가 무슨 일로 약속을 미뤘는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다.

자크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

녀석이 내 앞에 초콜릿 바 하나를 놓았다.

“미안.”

“뭘?”

“어제. 괴롭혀서. ……동양인이라고 해서.”

녀석과 초콜릿 바를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 가지곤 안 되겠는데.”

“그럼?”

치즈 케이크를 보니 녀석이 망설인다. 몇 번 고민하고는 날 향해서 쓱 밀었다.

“좋아. 용서해 주지.”

성의를 보이기도 했고, 어린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길 바라니 사과를 받아주었다.

다시 식사를 이어가는데 녀석이 다른 곳으로 안 간다.

“또 할 말 있어?”

“고마워.”

녀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혼자 있을 때. 같이 있어줘서.”

이제야 좀 아이답고 귀엽다.

“그래.”

당분을 섭취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점심시간 이후에 미술 수업도 있으니 마르소 때문에 망친 하루 기분을 잘 풀 수 있을 것 같다.

자크가 또 계속 앞에 있다.

“왜 또.”

“어제 한 말.”

“말?”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도 마땅히 기억나질 않는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

남을 설득하려면 감정에 호소하거나 논리적이어야 한다. 혹은 진심을 내비쳐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녀석이 준 초콜릿 바와 치즈 케이크를 가리켰다.

* * *

1)‘아이의 뺨을 때리는 프랑스 부모’라는 기사 제목이 심심치 않게 게시될 정도로 프랑스는 가정에서의 체벌을 허용하는 나라였다.

학교에서의 체벌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1998년 유럽에서 아동 체벌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음에도 나폴레옹 시대에 제정된 자녀 징계법 등의 영향으로 오랜 세월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교육 목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체벌하는 건 어쩔 수 없다며, 2010년대만 하더라도 훈육을 위해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영유아를 상대로 한 체벌이 문제가 되면서 2019년에야 자녀 체벌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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