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63화 (21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3화

49. 미술 수업(1)

차시현, 파브르, 라바니와 함께 프랑스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8월이 다 가고 말았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한 파리는 다소 차분해진 가운데 평화롭게 무르익었다.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그림 그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이런 날씨라면 할아버지와 아침마다 뛰는 것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덕분에 평소보다 멀리 와 버렸다.

벤치에 자리 잡았다.

“자.”

할아버지가 블랑제리 유토피에서 산 바게트 샌드위치와 포도 주스를 주셨다.1)

조깅 후 아침 햇살을 맞이해 반짝반짝 빛나는 센강을 바라보며 먹는 샌드위치는 꿀보다 달다.

“합.”

유토피에서 파는 여러 샌드위치 중에서도 이 오리고기 샌드위치가 유독 마음에 든다.

바게트야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토마토와 양파도 신선한데다 육즙을 가득 머금은 훈제 오리고기가 가득하니 맛이 없을 수 없다.

“시현이 돌아가서 섭섭하겠구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지난 5주간 차시현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파브르와 라바니와도 친해져서 곧잘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어설프게나마 프랑스어도 익히게 되었다.

“프랑스말 공부한대요. 다음에 올 땐 애들하고 잘 얘기하고 싶다고.”

“좋지.”

안녕, 고마워 정도는 할 줄 아는 파브르와 라바니도 한국말을 공부한다니, 다음에 만날 땐 나 없이도 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합.”

샌드위치를 입 한가득 베어 물고 꼭꼭 씹던 중 옆 벤치에 앉은 사람을 발견했다.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린다.

“여기서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경치가 좋아서 그런가?”

평소에는 이곳까지 와 보질 않아서 몰랐는데 강둑길을 따라 벽화가 줄지어 있다.

고개를 돌리니 보라색 글씨로 JEUNE ET COOL(Young and cool)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젊음과 대담함이라.2)

두 단어가 가진 의미를 곱씹다 보니 어느새 샌드위치를 다 먹고 말았다.

“슬슬 일어날까?”

“네.”

쓰레기를 가방에 넣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을 아침의 센강을 곁에 두고 걸으니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집에 들러 서둘러 씻고 앙리 4세 중학교를 찾았다.

입학 날이라 내 또래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교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또래라고는 해도 다들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본래라면 CM1 과정(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에 들어가야 했지만, 시험으로 CM1과 CM2를 건너뛰고 중학교(6EME≒한국의 초등학교 6학년, 프랑스의 중학교 1학년)에 바로 입학한 탓이다.

한 살 더 먹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발육이 빠른 프랑스 아이들이라 체격 차가 상당하다.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 가라고?”

“입학식도 없는걸요.”

“그래도 그렇지.”

미리 고지받은 서류에 입학식에 관련한 내용이 없어 마르소에게 물어보니, 프랑스에는 입학식과 졸업식이 없다고 한다.

“학교 처음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걱정 마세요.”

“흠. 일단 같이 좀 있어 보자.”

굳이 말하진 않으셨지만 인종차별과 관련한 일로 걱정이 많으신 듯하다.

할아버지가 경험한 일이기도 하고 2020년 이후로 아시아 사람들을 향한 증오 범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으실 거다.

괜찮다고 달래드리는 수밖에.

아이들이 귀찮게 굴면 사랑으로 잘 감싸 줄 생각이다.

놀이터 아이들도 결국에는 다 친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학교 아이들이라고 다르진 않을 거다.

“시간이 됐는데.”

할아버지가 시계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교문이 아직 닫혀 있다.

안에 분명 사람이 있을 텐데 교문을 저리 굳게 닫아놓은 걸 보면 확실히 보안에 신경 쓰는 것 같다.

“문 열 때가 됐는데.”

“같이 들어가도 되나?”

“엄마, 나 가기 싫어.”

오늘 입학하는 아이와 그 부모들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에 교문이 열렸다.

교사로 보이는 두 사람과 학교 보안 직원 네 명이 나서서 아이들을 맞이한다.

“들어갈게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끝나면 데리러 오마.”

“통학 버스 타고 갈래요.”

“괜찮겠어?”

“네.”

안내를 받아 교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몇몇은 부모와 함께했고 나처럼 혼자 들어온 아이도 있다.

면접을 봤던 니콜라스 푸생 교장이 한 명씩 호명해 반을 지정해 주었다.

“고훈 군은 아망딘 마고 선생님 반입니다.”

마고 선생의 반에 배정되어 그 앞에 서자 아이들이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안녕.”

인사를 건네자 다가온다.

“TV 나오지 않았어?”

“앙리 마르소랑 그림 그렸지?”

“귀엽다.”

“화가랬어.”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하던 차에 마고 선생이 손뼉을 쳐 시선을 돌렸다.

“자, 여러분. 반으로 이동할게요. 선생님 따라오세요.”

교실로 가는 도중에도 이것저것 물어온다.

“몇 살이야?”

“왜 이렇게 작아?”

“어디서 왔어?”

“너 정말 앙리랑 친해?”

“친하니까 같이 다니겠지.”

“너네 얘 몰라? 기암성 얘가 그렸잖아.”

“진짜?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 같다.

벌써 피곤해진다.

교실에 도착하자 아망딘 마고 선생이 학교 수첩(Carnet de communication)을 나눠주었다.

“등하교할 때는 이 수첩이 꼭 있어야 해요.”

“집에 두고 오면요?”

“교문에 계시는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돼요. 하지만 잊지 말고 꼭 가지고 다니도록 해요. 여러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교문에서 수첩을 검사하는 이유는 아마도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본래 있는 규정이기도 하나 학생과 교사를 상대로 한 범죄가 잦아진 탓에 철저히 관리한다고 마르소에게 들었다.

안내에 따라 태블릿에 교과서를 다운로드받고, 사물함 배정, 학교 시설 안내를 받으니 오전이 금방 지나고 말았다.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에요. 다들 식당 어딘 줄 알죠?”

“네.”

푸생 교장의 미술 수업 다음으로 기대했던 점심시간이다.

1시간 45분이나 되는 긴 시간을 과연 어떤 음식으로 채워줄지 설렌다.

사물함에 가방과 태블릿을 넣어두고 일어서자 몇몇 아이가 다가왔다.

“너 화가라며?”

“앙리랑 진짜 친해? 전화번호도 알아?”

“기암성 진짜 네가 그렸어? 어떻게?”

평소 그림에 관심 있는 아이와 마르소의 팬, 영화 <기암성>을 본 아이들 같다.

“맞아.”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있자니, 몇몇 아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지는 않고 멀리서 째려보거나 노려볼 뿐이다.

아마도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 것 같다.

할아버지와 파리에서 지내면서 느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물건을 팔지 않는 마트 주인이라든가 서 있는데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든가 황당한 인간을 종종 만났었다.

단지 생김새가 다른 것만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안타깝다.

“밥 같이 먹을래?”

“그러자.”

“너 그럼 학교 끝나면 그림 그려?”

“대부분 그러지.”

“오늘도?”

“오늘은 땅 보러 가.”

“땅? 땅을 왜 봐?”

“좋은 땅 있나 하고.”

아이들이 이상하게 본다.

* * *

앙리 4세 중학교에서의 첫날을 보내고 통학버스에 타려는데, 아이들이 버스에 오르진 않고 건너편을 주시하고 있다.

“뭐야?”

“누구 차야?”

“몰라.”

고개를 돌리자 아르센이 마르소의 차 중에 가장 무난한 세단과 함께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마르소가 창문을 내렸다.

“타.”

왜 왔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학생들이 소란을 피웠다.

“앙리다!”

“앙리! 앙리!”

보통 화가가 이렇게까지 인기를 끄나 싶지만, 프랑스에서 그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마르소가 학생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소리 지르는 아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도 있다.

차에 올라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르센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자.”

마르소가 서류를 한 장 던져줬다.

그랜드 아트 투어에 해당하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관련 문서다.

“괜찮대요?”

“어.”

뷰그레넬리 쇼핑몰과의 계약 때문에라도 참가해야 했는데,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이미 참가자가 결정된 터라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에게 따로 연락해야 했다.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마르소와 한 팀을 이루고 싶다고 요청했고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문서를 한 장씩 넘겼다.

내가 합류함을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작품 계획을 올해 안에 넘겨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직 안 냈어요?”

철두철미한 마르소가 아직 작품 계획을 잡지 않았다는 게 의아해서 물었다.

“보류. 구색은 맞춰야 할 거 아냐.”

내가 참가할 수 있도록 공동작업을 기획해서 기존 계획은 일단 보류한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미 정해진 자리에 이름을 더 올릴 순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내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돼.”

“싫어요.”

안내 책자를 좀 더 읽으니 독일 뮌스터의 공공장소를 배경으로 작품을 설치해야 한단다.

공공 예술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고자 만들어진 행사라고 하니 장소와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뮌스터.”

“이번 주말에 가.”

“하루면 될까요?”

“주말 동안 있든가.”

할아버지께 여쭤볼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땠어.”

“뭐가요?”

“학교.”

“신기했어요. 보안에 상당히 신경 쓰더라고요. 급식도 맛있고.”

한국 초등학교도 급식은 훌륭했지만, 앙리 4세 중학교는 다른 방식으로 좋다.

뷔페 방식으로 운영되어 얼마든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애들은.”

“귀엽더라고요.”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그래.”

“귀여우니까요.”

애들은 다 귀엽다.

“……괴롭히는 놈은 없고?”

“네.”

“그래.”

대화가 끊겼다.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인제 보니 굳이 학교 앞까지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일부러 왔어요?”

“뭐가.”

모른 척한다.

아마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니 건들지 말라는 경고 같은 느낌으로 온 것 같다.

할아버지나 마르소 눈에는 12살 꼬마고 체격도 같은 학년과 비교해 작은 편이니 걱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과하다.

“내일부터 더 시달릴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않아도 마르소랑 친하냐, 얼마나 친하냐고 묻는데 이런 짓까지 하니까 그렇죠. 봤잖아요. 아주 난리던데.”

“영광인 줄 알아.”

“영광이네요.”

마르소가 인상을 썼다.

잘난 척할 때 긍정해 주면 더 약 올라 한다.

매번 이렇게 반응해 주니 재밌다.

“오늘 일정은.”

“땅 보러 가게요.”

“땅?”

“슬슬 알아보려고요. 갤러리.”

* * *

1)프랑스의 빵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주식용 빵을 판매하는 블랑제리와 간식용 빵을 판매하는 파티스리.

크루아상, 팽오쇼콜라, 팽오레장, 바게트 같은 빵은 주로 블랑제리에서 판매한다.

2)현대에는 cool이 ‘털털하다’, ‘멋지다’, ‘세련되다’의 의미로 사용되나 고훈은 이를 대담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본래 cool은 조용한, 차분한, 냉정한, 냉담한이란 뜻의 형용사지만, 1825년에는 차분하다, 대담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현대 구어체에서 통용되는 ‘털털하다’, ‘멋지다’, ‘세련되다’라는 뜻은 1933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사용하던 은어가 1930~1940년대의 인기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을 통해 대중화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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