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2화
48. 입학(5)
라바니가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는 미셸에게 들었다.
벽지조차 없는 낡디낡은 건물 단칸방에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그나마도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단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좀 더 나은 집을 구하고 싶다고.
미셸과 내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라바니도 모친도 갚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빚을 질 순 없다며 거절했었다.
라바니가 슬쩍 일어났다.
“좁긴 해도 저금하고 있고. 언젠가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거야.”
파브르가 라바니를 지지해 주었다.
간단한 회화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차시현도 분위기를 파악하곤 응원했다.
“벌써 일하는 거야?”
차시현이 어설프게 묻자 라바니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르소 갤러리에서 청소하고 있어.”
“형 몇 살인데?”
“15살.”
프랑스 숫자에 약한 차시현에게 우리나라 나이로는 16살이라고 전해주자 깜짝 놀랐다.
죽이 잘 맞는 듯하니 둘이 대화를 잘 나눌 수 있게 가운데서 통역해 주었다.
“멋있다.”
“멋있어?”
“응! 난 아직 돈 벌어본 적 없어. 엄청 멋지다.”
라바니가 쑥스러운 듯 목을 긁적였다.
“그런 건 아니야. 쓰레기 줍고. 화단 정돈하고. 사탕 나눠드리고. 별일 안 해.”
“아니야.”
파브르가 나섰다.
“그걸로 마르소 갤러리 찾은 사람들은 기분 좋아지잖아. 별일이야.”
본인이 하는 일이 멋있다고, 특별한 일이라고 하는 두 아이 사이에서 라바니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응. 사실 이제 파스텔이랑 스케치북도 살 수 있고 굶지 않아도 되니까.”
소소한 자랑에 차시현과 파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받은 덕일까.
라바니가 용기를 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꿈인데. 정말 꿈인데.”
“응.”
“언젠가는 훈이나 마르소 작가님처럼 따뜻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지금도 그러잖아.”
“어?”
라바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지금도 그렇다고.”
오늘 라바니가 그린 전망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따뜻해.”
파스텔을 무척 잘 활용한다.
한 재료를 오래 사용하고, 신중히 다뤘던 덕분인지 라바니의 그림에는 파스텔로 표현할 수 있는 포근한 감성이 잘 묻어나 있다.
“기술적인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런 게 중요한 시대도 아니고.”
파브르도 동조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잘 그린 그림은 이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실물을 그대로 그리는 건 다들 너무나 잘 그리니까.
좋은 작품이라 하면 자신만의 감정과 사상을 담아내고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달렸다.
“응.”
라바니가 작게 답하자 가만히 지켜보던 차시현이 내게 물었다.
“난 그래도 잘 그리고 싶은데?”
“배우면 빠르긴 할 거야. 도움이 안 될 리도 없고.”
“전에는 미술 학원 갈 필요 없다고 했잖아.”
“개성을 잃을까 봐 한 말이야.”
조언자가 곁에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있다.
시현이나 라바니가 바라는 일정 수준까지는 학원이 필시 도움이 될 거다.
나도 할아버지와 장미래, 마르소의 작품을 보고 느낀 바가 커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법도 익히고 있다.
그로 인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학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한 이유는 과거 왕립 아카데미를 연상한 탓이다.
할아버지와 장미래가 대학 입시 미술을 걱정하는 이유와 같은데, 일률적인 교육에 뛰어들어 개성을 잃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자신을 망치는 일도 없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지 말라는 말이네?”
“그렇지.”
“배울 건 있고. 라바니 형도 배우면 좋겠다.”
라바니가 침울해졌다.
“……받아주는 데가 없으니까.”
라바니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차시현이 통역을 재촉했다. 무슬림이라서 거절당한 일을 전하니 놀란다.
“왜? 저 형 나쁜 짓 했어?”
“아니.”
“그런데?”
“그러게.”
라바니와 라바니의 부모는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도 그걸 알아주었으면 싶지만 IS나 탈레반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계속해서 테러 행각을 벌이는 이상 쉽지 않을 거다.
그들은 본인들 때문에 다른 무슬림들이 피해받는 걸 자각해야 한다.
“푸생 선생님은 받아주실 거야.”
파브르가 나섰다.
“푸생 선생님이 누구야?”
“앙리 4세 중학교 교장 선생님. 미술도 가르쳐.”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마르소와 파브르가 이렇게까지 추천하니 좋은 교사이긴 한 모양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라바니가 중얼거렸다.
“다니면 되지.”
“어?”
“장학제도 있으니까 알아보면 방법이 생길 거야. 당장 입학할 순 없어도.”
등록금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도와줄 수 있지만, 미셸에게도 일방적으로 지원받진 않으려던 녀석이다.
자립심이 강한 만큼 혜택받을 방도만 찾아주는 것으로 충분할 터.
스스로 잘해낼 거다.
“그래도 난 나이도 많고.”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같은 학년에도 나이 다른 사람 있어. 그렇지?”
파브르에게 동조를 구하자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시험공부 할 책 빌려줄게. 이번에 쓰던 거 있어.”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쓰던 교재가 있다고 하니 라바니가 망설인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할 텐데,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배우고 싶은 거다.
“할 수 있을 거야.”
차시현이 한 번 더 응원했다.
* * *
저녁을 먹고 양치질을 하던 중 차시현이 기특한 말을 꺼냈다.
“라바니 형은 엄청 가난하지?”
“응.”
“그런데도 열심히 일하고. 꿈도 있고.”
장학제도에 대해서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입학 관련 교재를 받아 가는 걸 보고 느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입학할 수 있을까?”
치약을 뱉어냈다.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만약 안 되면? 라바니 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 상관 없을 거야.”
물로 입안을 헹궜다.
“어떻게 상관없어?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며.”
“계속 노력할 테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방법이 있을 거야. 나랑 파브르가 도와줄 수도 있고.”
“아버지가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다고 하셨어.”
“있지.”
모든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과거 어떻게든 발버둥 쳤지만 결국 병마와의 싸움에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까.
“근데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나랑 파브르, 미셸이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라바니가 하고 싶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맞아.”
“반대로 그렇게 노력하니까 우연히 찾아온 기회라도 잡을 수 있는 거야.”
라바니가 미셸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끼니 걱정은 덜어낸 지금보다 못한 상황에 처했을 거다.
못된 놈들에게 계속 괴롭힘당했을 테고 파스텔을 살 돈조차 없어 그림조차 못 그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어떤 길이 열렸으리라 믿는다.
그림을 그리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라바니에게 미셸이 손을 뻗어준 것처럼 말이다.
“…….”
차시현이 다소 우울해 보인다.
“왜 그래?”
“너도. 라바니 형도. 파브르 누나도. 다른 애들도 다 자기 일 하는데 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왜 아무것도 안 해. 공부 잘하잖아.”
비슷한 또래는커녕 성인 중에서도 차시현만큼 박식한 사람은 드물다.
한국 초등학교 학생이 대부분 교육 수준이 높긴 하나 차시현은 그중에서도 특출하다.
“그런 거 말고.”
“너도 너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시험 성적 유지하랴, 그림 배우랴 그런 와중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가 좋아질 수 있도록 고민하고, 반 아이들에게도 상처받았다.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데 꿈을 좆아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자책하니 기가 찬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를 뿐이야. 그렇다고 네가 지금 당장 라바니처럼 일을 시작할 수도 없잖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직접 버는 라바니가 기특하고 대견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차시현이 똑같이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서로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부러워서 그런가 봐.”
“뭐가?”
“나도 라바니 형이나 파브르 누나처럼 너랑 그림 그리고 싶은데.”
차시현이 뷰그레넬리 쇼핑몰에 그린 벽화와 달리다 광장의 길거리 그림을 언급했다.
“네 이야기도 듣고 영상으로도 봤는데 너무 하고 싶었어. 근데 난 여기서 못 사니까.”
서랍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양치했는데 또 먹어?”
“민트 초코라서 괜찮아.”
“무슨 말이야.”
“치약 맛이랑 비슷하니까.”
양치질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 맛이 이상해지지만 민트 초코는 원래 맛이 이상하니 괜찮다.
초콜릿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재밌어 보였어?”
“응.”
“맞아. 재밌었어. 내년에 또 할 거야.”
차시현이 부러워한다.
“방학 때 맞춰서 오면 같이할 수 있겠다.”
“정말?”
“그럼.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어.”
손을 번쩍 들고 좋아한다.
“그 정도 일은 파리에서 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림을 어떻게 그리냐는 본인한테 달린 문제야.”
“응…….”
굳이 파리가 아니라도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내가 파리에 온 이유는.”
“마르소 아저씨 때문이지?”
“그것도 이유지. 개벽이 어떻게 개발되는지 너무 궁금했으니까.”
“응.”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꿈을 펼치지 못했던 곳이라 그래.”
“꿈?”
고개를 끄덕였다.
19세기 말.
화가의 꿈을 좇아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 잡았었다.
지금도 그때도 파리는 예술의 수도였으며 몽마르트르는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이 잔뜩 모인 공간이었다.
지금 무슬림을 비롯해 빈민층과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참 재밌게도 귀족들 눈에는 괴짜들만 모여 있던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미술사에 굵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거 알아? 몽마르트르에 마네, 모네, 드가, 빈센트, 로트렉. 피카소하고 마티스도 있었어.”
“정말?”
“응.”
19세기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들이 그리 대단치도 않은 마을을 사랑했던 거다.
“몽마르트르에는 외부인이 많았거든. 좀 이상한 인간이라도 쉽게 받아들여졌어.”
“반 고흐도 있었으면 그랬을 것 같아.”
“…….”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차시현이 설명을 재촉해서 아픈 가슴을 달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좀 다른 시도를 해도 괜찮았다는 거야. 파리 중심부에서는 인정 못 받고 조롱받은 사람들이 몽마르트르에서는 자기 작품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었어.”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몽마르트르는 지금도 사랑받는 예술가를 여럿 배출해 냈다.
“그렇게 중요한 건가?”
“응. 중요해.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으니까.”
“잘 이해가 안 돼.”
“개성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개성?”
“자기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거야. 그러니 작품이 좋아질 수밖에.”
이야기를 듣던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마르소 아저씨처럼?”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