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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61화 (21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1화

48. 입학(4)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허허. 어서들 오세요.”

차시현 가족이 파리에 왔다.

“네가 훈이구나.”

“안녕하세요.”

“TV로 보는 것보다 더 예쁘다.”

“아주머니도요.”

“나?”

“시현이가 자랑했어요. TV 나오실 때.”

예전에 함께 TV를 보다가 자기 어머니라고 알려준 적 있다. 성공한 CEO를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자전거 제조업체의 대표로 소개되었다.

“우리 어머니 예쁘지!”

“어머. 얘 좀 봐.”

차시현의 모친이 민망한 듯, 기쁜 듯 웃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선물을 전하셨다.

“아이고.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시현이 봐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하자니 너무 죄송해서요. 받아주세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직접 전하니 어쩔 수 없이 받으시는 눈치다.

“한식 좋아하신다고 해서 이것저것 싸 봤어요. 양념이랑 해서.”

현금도 귀중품도 받지 않으시던 할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보시더니 활짝 웃으신다.

“오오.”

“영월 친가에서 재배한 건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직접 키우셨다고요?”

“네. 어머니가 직접 만드세요.”

“아이고. 이 귀한 걸.”

파리에도 한인마트가 있긴 하지만 가격도 비싼 편이고 종류도 그리 많지 않은데, 좋은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얻어 기쁘신 것 같다.

“저희는 올라갈게요.”

차시현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집 엄청 좋다.”

차시현이 3층 테라스로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감탄했다. 1,000만 유로나 들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좀 어때?”

“뭐가?”

“학교.”

줄곧 걱정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밝아 보여 조금은 안도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어.”

“잘했어.”

“실망하실 줄 알았는데 칭찬받았다?”

“당연하지.”

초콜릿 상자를 챙겨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나씩 입에 넣고 기다리자 차시현이 발을 앞뒤로 흔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걔들이 먼저 와서 사과했어.”

“어떻게?”

“잘 모르겠어.”

부모들끼리 어떤 대화를 나눴던 모양이다.

남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는 못된 녀석들이 정말로 반성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듣자 하니 학교 폭력 이력이 밝혀져 공들인 일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그런 걸 걱정해서 형식적으로만 사과한 건 아닌지 싶기도 하다.

“제대로 사과받았어?”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용서 못 하겠어.”

시간이 고통을 무디게 해줄지언정 상처까지 없애주진 않는다.

“당연한 거야.”

“응. ……그래도 이제 안 건드니까. 나도 걔들 신경 안 쓸 거야.”

차시현이 입을 앙다물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보인다.

“근데 이거 맛있다.”

“맛있지. 아, 더 맛있는 거 줄게.”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자 만들어 두었던 초콜릿을 냉장고에서 꺼내자 차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가랜드다!”

차시현이 좋아하는 로봇 애니메이션 디자인을 차용해 만들어 봤는데, 너무 정교하게 만들면 아이들이 도리어 먹지 않는 걸 감안해서 단순화했다.

“이거 만든 거야? 어떻게?”

생각보다 더 기뻐한다.

“너 주려고 만들었어.”

차시현이 로봇 모양 초콜릿을 요리조리 살폈다.

“진짜 먹어도 돼?”

“그럼.”

“근데 어떻게 먹어?”

“아무 데나 먹어도 돼. 다 초콜릿이랑 과자야. 잘라줄까?”

“응.”

크기가 제법 있어서 우선 몸통을 가로로 잘라냈다. 초콜릿과 누가, 누텔라, 오레오 조각으로 가득 찬 내부가 드러났다.

“…….”

놀랐는지 아무 말도 못 한다.

“맛있겠지.”

하기사 애니메이션 주인공 모양의 28㎝ 초대형 디저트가 초콜릿과 과자로 가득 찬 건 생전 처음 볼 거다.

“이런 거 매일 먹어?”

“매일은 아니야.”

차시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거 먹으니까 마르소 아저씨가 운동시키는 거 아니야?”

“…….”

“뱃살이 좋아할 것 같아.”

* * *

뷰그레넬리 쇼핑몰 벽화 작업 이후로 줄곧 일해 오던 차, 차시현이 온 김에 덩달아 푹 쉬었다.

모니터로만 만났던 작품을 직접 보여줄 좋은 기회라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는데, 차시현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다며 아쉬워했다.

차분히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을 다녔고 어느새 나흘이 흘러 차시현의 부모가 귀국했다.

오늘은 쇼콜라티에 회원들과 함께하는 날이라 라바니에게 차시현을 소개했다.

“친구야. 차시현. 파브르하고는 전에 만났지?”

파브르가 눈을 마주하고 아는 척하자 차시현이 살짝 웃으며 화답했다.

“여기는 비다 라바니.”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시현과 비다 라바니가 서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먼저 일어선 차시현이 놀라서 다시 고개를 숙이자, 뒤늦게 고개를 든 라바니가 당황해서 다시 인사한다.

재밌다.

“동영상 찍어도 돼?”

“네?”

파브르의 부탁에 라바니가 깜짝 놀랐다.

파브르가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차시현에게는 영어로 물었다.

“왜?”

“귀여워서.”

“귀여워?”

“방금처럼 다시 해봐.”

“싫어.”

파브르가 아쉬워하며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풍뎅이 유충 집에 다가갔다.

그림 그리기 전에 곤충들과 인사를 나누는 게 순서다.

“파브르 누나는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자기주장과 취향이 확고한 착한 아이다.

“얘들아, 준비 다 했니?”

할아버지가 아래층에서 물었다.

“지금 갈게요.”

간식을 넣어 둔 가방을 하나씩 나눠주고, 화구통도 챙겼다. 차시현은 익숙한 오일 파스텔과 스케치북을 들었다.

“어디 가?”

“뷰뜨 쇼몽 공원.”

“뷰뜨 쇼몽?”

“파리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야.”

“예뻐.”

차시현에게 뷰뜨 쇼몽 공원에 대해서 알려주는데 유충과 인사를 나눈 파브르가 다가와 거들었다.

“전망대 주변에서 그림 그리면 기분이 좋아요.”

라바니도 나섰다.

할아버지 자동차에 이것저것 싣고 40분 정도 걸려 뷰뜨 쇼몽 공원에 도착했다.

7월 말이라 날씨가 제법 덥다.

“우와.”

공원 길을 따라 걷던 중 차시현이 연신 감탄을 터뜨린다.

“얘들아, 선크림부터 바르자.”

할아버지가 나와 아이들에게 선크림을 짜 주셨다.

비다 라바니는 선크림을 로션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그대로 문대서 눈썹이고 입술이고 죄다 하얗게 돼버렸다.

파브르와 차시현이 그 모습을 보고 웃자 라바니가 어리둥절해서 나와 할아버지도 웃고 말았다.

“하아.”

이름 모를 풀과 나뭇잎들이 햇살을 머금고 빛난다.

라임색으로 활짝 웃는 잔디를 따라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나뭇가지와 함께 살랑이는 바람에 취하고 만다.

올리브색과 바질색이 점층 된 나무 위로 작은 새 두 마리가 서로의 꽁무니를 쫓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원이 건축가와 조경사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공간이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1)

“만화영화 같아.”

다리를 건너서 두 개의 큰 바위를 지나 작은 섬으로 들어가자 차시현이 입을 크게 벌렸다.

호수 가운데 바위 섬을 가득 덮은 초목은 파리에서 가장 예쁜 녹색이라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전망대에 들른 뒤에는 작은 폭포도 구경하고 섬에서 빠져나왔다.

호숫가에 돗자리를 펴고는 각자 준비한 도구를 꺼냈다.

파브르는 녹조가 짙은 호수에 유유히 떠 있는 오리를 스케치하고.

라바니는 전망대와 섬의 전경을 그릴 생각인 듯하다.

차시현은 오일 파스텔과 스케치북을 안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따금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보니 장소를 잘 찾은 것 같다.

“좋다.”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풀과 나무가 가득한 곳에 오니 마음이 편안할 테다.

“뭐 그리게?”

“손 가는 대로.”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을 그려야 하는데, 마땅히 좋은 생각이 안 나서.”

“내년에 낼 거 많다고 하지 않았어?”

뷰그레넬리 쇼핑몰과의 계약 때문이다. 추가금을 받으려면 그랜드 아트 투어에 속한 네 개 공모전에서 수상 및 성적을 내야 하는데, 굳이 그 돈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방태호와 할아버지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경험은 많을수록 좋으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응.”

“생각 안 날 땐 어떻게 해? 다 좋아서 뭐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생각만 해선 달라지는 게 없어. 뭐라도 그리다 보면 영감이 찾아올 거야.”

좋은 발상은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게 아니다.

직접 보고, 느끼고 표현하길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찾아온다.

여기 있다고. 제발 와달라고 애걸복걸해야만 비로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여기 꼭 거기 같아.”

“어디?”

“쇠라? 쇠라가 그린 그림.”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응.”

여기와는 좀 떨어진 곳이지만 차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그 따스한 분위기를 느낀 거다.

“아, 강아지다.”

차시현이 산책 나온 강아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학교에서의 일로 고생한 영혼이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받길 바라며,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녀석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핳하!”

평화로운 아침이다.

두 시간 정도 흘렀을까.

각자 그림을 그리다가 배가 고팠는지 한 사람씩 돗자리로 돌아왔다.

파브르는 오리를 그리다가 곤충 채집으로 노선을 틀었는지 비어 있던 채집통에 잠자리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

채도 없이 손으로 잡은 듯.

재주도 좋다.

“아이고. 이걸로 손부터 닦자.”

할아버지가 손에 흙을 잔뜩 묻힌 파브르와 아이들에게 물티슈를 나눠주셨다.

오는 길에 사 온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차시현과 라바니도 눕자 파브르가 빤히 내려다보더니 따라 누웠다.

“……졸려.”

“자도 돼.”

“밖에서 자본 적 없어.”

“난 많이 자봤는데.”

“왜?”

“집이 없어서.”

차시현과 파브르가 동시에 일어나 가운데 누운 라바니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있어.”

* * *

1)뷰뜨 쇼몽 공원은 오스만 남작의 요구로 건축가 아돌프 알팡(Adolphe alphand), 장 피에르 바릴렛 데샹(Jean-Pierre Barillet-Deschamps) 등이 설계 및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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