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60화
48. 입학(3)
“잘 먹었습니다.”
“그래.”
차재우가 힘없이 일어난 차시현을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아들의 어깨가 늘 처져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
“모르겠어. 물어도 괜찮다고만 하니까.”
성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말 없는 거 보니 훈이가 유학 가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 그 후로 계속 저러니까.”
아내의 추측에 차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친구가 멀리 떠나니 외로울 터였다.
“주말에 어디 놀러라도 갈까?”
“어디 가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
기분전환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알지 못하여 답답했다.
“그래도 좀 나가면 낫지 않을까. 아니면 방학 때만이라도 프랑스 보내주는 게 어때?”
성현주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나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고훈과 함께라면 곧잘 따라가곤 했었다.
“이번엔 같이 가고 싶은데.”
“며칠 정도는 쉴 수 있잖아.”
“금방 돌아와야 하면 더 속상해하지 않을까?”
“음.”
두 사람이 고민에 빠졌다.
부부 모두 전문 경영인으로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 마음 놓고 장기간 휴가를 내긴 부담스러웠다.
“훈이네에 부탁 좀 드려도 될까?”
“지금까지 계속 봐주셨잖아. 이제 민망해.”
“시현이랑 같이 가서 뵙고 인사도 드리고. 사정도 말씀드리고.”
차재우의 말에 성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을 위해 한두 달 정도 쉴 수 없는 입장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준비해야지?”
“그러게.”
여태 아들을 부탁할 때마다 감사 인사로 선물을 보냈지만 매번 그대로 돌아왔었다.
부부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들 방으로 향했다.
“시현아, 엄마 아빠랑 이야기 좀 할까?”
“네.”
차시현이 문을 열고 나왔다.
책상 위에 파란 나무 그림이 가득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핑구 채널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부부는 그들의 예상이 옳았단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에 둘러앉고 아들에게 물었다.
“시현아, 방학 때 프랑스 놀러 갈래?”
“프랑스요?”
차시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성현주는 내심 안도하며 프랑스에 가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점이 좋은지 설명했다.
“응. 그동안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푹 쉬었으면 해서. 미술관도 구경하고 훈이랑도 같이 놀고. 재밌겠지?”
차시현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럼 언제 가요?”
“방학하는 날. 바로.”
차시현이 엄마를 와락 끌어안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아빠를 둔 채 방으로 뛰어갔다.
성현주는 피식 웃고는 아들을 대신해 남편을 위로했다.
방으로 들어선 차시현이 고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다가 통화가 연결되자 냅다 소리쳤다.
“나 프랑스 가!”
-프랑스? 언제?
점심을 먹던 고훈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방학 때! 7월 20일!”
-할아버지, 7월 20일에 시현이 놀러 온대요.
-좋지. 방학한대?
-네. 혼자서 와?
“아니. 부모님이랑 같이. 그때 일해?”
-일은 계속 있지.
차시현이 당황했다.
파리에 가기만 하면 고훈과 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쁘다고 하니 사고가 멈추고 말았다.
-내년에 출품할 곳이 많아서 계속 작업해야 해.
“나 옆에서 그림 그리면 안 돼?”
-왜 안 돼. 루브르랑 오르세 안 가 봤지? 같이 가자.
“나 때문에 가는 거면 안 그래도 되는데.”
차시현은 고훈이 억지로 시간을 내지 않길 바랐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 여러 차례 방문한 친구가 굳이 자기 때문에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했다.
-시간 날 때마다 가는데?
“응?”
다녀온 장소를 시간이 날 때마다 간다고 하니 의아했다.
-몇 번 가서는 다 구경 못 해. 전시품도 그때마다 달라지고.
“그럼 같이 가도 돼?”
-그렇다니까. 나 밥 먹고 있으니까 이따 얘기하자.
“응!”
통화를 마친 차시현이 핑구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보았다.
고훈이 달리다 광장과 뷰그레넬리 쇼핑몰에서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미술 관련 뉴튜버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고훈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도 소식이 전해지면서 뉴스에 작게나마 소개되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자랑스러운 친구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침대 위에서 뒹굴던 차시현이 문득 학교에서 있었을 일을 떠올렸다. 이불을 끌어안고 고민하기를 얼마간.
전화가 울렸다.
고훈이었다.
“응.”
-목소리가 왜 그래?
“으응. 밥 다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연어 구운 거랑 단호박 샐러드랑 새우 넣은 파스타.
“별로였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온갖 미사여구와 공감하기 힘든 비유를 사용하던 친구가 평소와 달리 평범하게 식단을 알려주었다.
-나쁘지 않았어. 무슨 일인데.
고훈이 걱정스레 물었다.
환상적이었던 오일 파스타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시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현우가 불쌍해.”
차시현을 괴롭혀 오던 아이였다.
-계속해 봐.
“얼마 전에 무슨 지원을 받으려고 했나 봐.”
-지원?
“잘 모르겠어. 애들이 하는 말 들어보니까 등록금 그런 것 같아.”
-집이 어렵나 보네.
“그런가 봐. 근데 다른 애들이 괴롭혀.”
차시현이 요 며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평소와 같이 놀던 아이들은 박현우가 등록금 지원서를 가지고 있는 걸 본 뒤로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박현우를 따르던 아이들은 태도를 바꾸어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가방을 들도록 하거나 시비를 거는 둥 심지어 급식을 못 먹게 하기도 했다.
-당하고만 있을 앤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엔 현우도 싸웠는데 애들이 아빠한테 이른다고 하니까 아무 말 못 했어. 막 부모님들이 내는 등록금 덕분에 학교 다니는 거 아니냐고.”
-하.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해야 11살 먹은 애들이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앞세워 남을 협박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더군다나 학교의 지원 정책을 마치 본인들이 선심을 쓰는 듯이 말한다는 대목에서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뭘?
차시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친구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말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자기도 그랬으니까. 벌 받는 거라고 생각했어.”
-응.
“현우 괴롭히니까 난 안 건드려서 편하기도 하고.”
-응.
“근데 괴롭힘당하는 거 아프니까. 그러지 않아도 힘들 텐데 하고.”
-응.
“그래서 오늘 애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어.”
* * *
-그러니까 나한테도 막 또 그러는 거야. 나 바보 같지.
“아니야.”
자기를 괴롭힌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면 내심 고소해할 수도 있다.
본인이 저지른 악행을 그대로 돌려받으니, 반성이라도 하길 바랄 수 있다.
사람이니까. 상대가 미우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괴롭힘당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심성이 고운 덕분일까.
차시현은 본인을 괴롭혔던 아이를 위해 나섰다.
“멋지잖아.”
-멋져?
“응.”
-그건 아닌 거 같아. ……내일 학교 가기 무서워.
같은 반 아이들과 싸웠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는다.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나 학교라는 작은 세계가 생활의 전부인 아이에게 그렇게 말한다고 걱정을 덜 순 없을 거다.
도리어 이해받지 못한다는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다.
“부모님께 말해봤어?”
-걱정하시니까. ……나 진짜 겁쟁인가 봐.
“아니야. 엄청 용감해.”
-용감해?
“응. 알았잖아. 알고서도 나서 준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말도 제대로 못 했고. 학교 가는 것도 무서워. 내일 또 나한테 막 그러면 어떡해?
차시현이 목소리를 떨었다.
괴롭힘당한 경험이 있는 만큼 내일 다가올 일이 걱정될 거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괜찮다는 무책임한 말로 위로할 수 없다.
“…….”
-나 되게 별로지.
“아니. 멋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차시현이 용기를 잃지 않게 북돋아 주는 일뿐이다.
-하나도 안 멋있어. 울 것 같아.
“울어도 돼.”
-응?
“울 수도 있지. 무서울 수도 있지.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모르겠어.
“정말 창피한 건 나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있는 거야. 박현우가 너 괴롭힐 때 다른 애들 가만있었지?”
-……응.
“넌 걔들하고 달라. 누군가 힘들어할 때 나섰잖아.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무서워도 나섰잖아. 정말 용감한 거야.”
차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도 괴롭힘당할까 봐 가만있던 애들이 뭐가 무서워? 욕하면 같이 욕해 주고 때리면 같이 싸워. 그런 놈들보다 네가 훨씬 더 용감하고 멋있어.”
끅. 끅.
스마트폰 너머로 차시현이 울기 시작했다.
아마 내 뜻을 전부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다. 무서운 것도 여전할 테고.
그러나 적어도 본인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지 않을까.
적어도 난 그랬다.
평단도 동료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 그림을 테오만은 좋아해 주었다. 지지해 주었다.
테오 덕분에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시현이 진정했다.
“그리고.”
-응.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아.”
-걱정하시잖아. 이런 거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
못난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보이고 싶지 않은 거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게 당연하다.
나조차 내 방과 자화상을 예쁘고 잘생기게 그려서 어머니께 보내드리곤 했으니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1)
하지만.
“나중에 네가 혼자 힘들어했다는 걸 아시면 더 속상해하실걸?”
-…….
“그리고 말씀드려야지. 불쌍한 사람 위해서 싸웠다고. 그런 일은 자랑해도 돼.”
못난 모습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말씀드리는 일이다.
그렇게 말하니 차시현이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
“그럼. 당연하지.”
* * *
1)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 9월에 완성한 <수염이 없는 자화상>은 어머니의 70번째 생일을 축하하고자 그린 작품이다.
사망하기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라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겨웠던 시기였으나 반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비슷한 시기에 그린 다른 자화상에 비하여 말끔하게 표현했다.
볼은 불그스레 혈기가 돌고 덥수룩한 수염은 말끔하게 면도하였으며,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노령의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다소 우울해 보이는 인상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