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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59화 (21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9화

48. 입학(2)

초콜릿과 과자를 나눠 먹은 꿀벌들이 쇼핑몰 지하 1층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달리다 광장에서 보낸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며,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해?”

“나 이제 해바라기 잘 그려.”

“닭 그릴래! 닭!”

한 아이가 입을 열자 저마다 나서서 조잘거렸다.

아이를 보호하고자 따라나선 부모와 복지사가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고훈은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굳이 입을 막거나 행동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

놀러 온 만큼 최대한 자유롭게 지냈으면 했다.

조용히 해달라는 말 대신, 협찬받은 금박으로 포장된 동전 초콜릿을 보였다.

“그거 뭐야?”

“나 알아! 돈이야!”

“난 저런 돈 본 적 없는데?”

“엄청, 엄청 좋은 거야.”

“나 만화에서 봤어. 금화야.”

“금화가 뭐야?”

“비싼 거.”

“얼마나?”

“몰라. 초콜릿 열 봉지?”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이자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오늘 자기 얼굴 그린 사람한테 이거 하나씩 나눠줄게.”

“정말?”

“응. 엄마나 아빠, 친구 얼굴도 그리면 하나씩 더 줄 거야. 붓하고 물감은 저 아저씨가 나눠주실 거고.”

고훈이 방태호에게 시선을 주자, 수십 명의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방태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작할까?”

“응!”

아이들이 우르르 방태호에게 다가갔다. 붓과 물감, 오일 파스텔을 챙겨 벽에 달라붙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고수열이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 이거 어떻게 지워요?”

“형, 나 어떻게 생겼어?”

“어……. 눈은 두 개야.”

“그건 나도 알아.”

붓과 오일 파스텔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왜 초록색으로 칠해?”

“초록색이 세니까.”

“세?”

“세이버즈 몰라?”1)

“알아. 그럼 난 파란색으로 해야지. 캡틴이 젤 멋있어.”

아이들은 마음 가는 대로 색을 칠했다. 학습되어 내려온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그렸다.

그러니 즐거울 수밖에.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고수열은 아주 오래전 그저 그리는 행위를 즐겼던 때를 떠올렸다.

‘언제부터였나.’

순수했던 시절을 지난 어느 시점부터 고수열은 치열하게 매달렸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확실히 상을 받는 것에 집착했던 것 같았다.

기성세대가 세운 기준에 따라 남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봤자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교내 대회에서 상 받는 것보다 유명 전시관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입상했을 때 더 큰 칭찬을 받았다.

세계학생미술대회에서 대상을 탔을 때는, 저놈이 환쟁이가 돼서 집안 망신시킨다며 꾸짖던 부친도 인정해 주었다.

어린 고수열에게는 상을 받는 것이 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앞만 바라보고 뛰기를 몇 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처음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남보다 나아지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잊었던 자신을 찾는 데 힘썼고,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시야를 넓혔다.

그러자 조금씩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 주었다.

남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시기에는 상패만이 그의 곁에 있었지만, 스스로와 경쟁한 순간부터 주변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고수열은 한 작품, 한 작품을 그릴 때마다 벽을 느꼈지만 결코 피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기 위함이니, 며칠 밤을 새워도 기꺼웠다.

그렇게 10년이 흐르자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어렸을 적과 같이 그림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50여 년을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앞으로도 저렇게만 웃었으면 좋겠구나.’

* * *

“잘 그렸지!”

항상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올리비에에게 이끌려 한쪽 벽으로 갔더니, 상당히 전위적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콧구멍이 눈과 나란히 있고, 웃고 있는 입은 얼굴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 옆에는 눈을 가린 아이가 작게 미소 짓고 있다.

아들리다.

이 두 아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는 좋은 그림이다.

“멋지다.”

“그치? 이건 우리 엄마아빠야.”

올리비에가 부모를 가리켰다.

엄마는 손이 빨갛고 아빠는 얼굴을 그려 넣지 않아 표정을 알 수 없다.

일전에 올리비에를 다그쳤던 일이 떠올라 어떤 분위기인지 알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잘 그렸네.”

올리비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금화 초콜릿 세 개를 주었다.

“우와!”

올리비에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친구들에게 금화 초콜릿을 자랑했다.

강압적인 부모 아래 있으면서도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리라.

“아들리는?”

“이거.”

아들리가 살짝 비켜서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건 라바니 형. 이건 파브르 누나. 이건 형. 이건 올리비에.”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니 확실히 그럴듯하다. 한눈에 알아볼 순 없어도 특징을 잘 잡아냈다.

귀가 큰 편인 라바니와 아주 밝은 금발을 가진 파브르, 눈이 똘망똘망한 나 그리고 꼭 한군데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는 올리비에까지.

“잘 그렸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정말 잘 그렸어.”

금화 초콜릿 다섯 개를 쥐여 주자 세 개만 가져갔다.

“왜? 다 가져도 돼.”

“올리비에랑 같은 게 좋아.”

친구와 함께하고 싶을 때니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이건 내가 맡아두고 있을게. 먹고 싶으면 두 개 찾아서 올리비에랑 하나씩 나눠 먹으면 되겠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초콜릿이었어!”

올리비에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 올리비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디?”

“동전인데 초콜릿이야?”

“그럼 그냥 초콜릿 아니야?”

“맛있어?”

“맛있어!”

금화 초콜릿이 맛있다는 소식에 아이들이 앞다투어 자기 그림을 자랑하고 다녔다.

할아버지와 방태호, 파브르 그리고 함께해 준 부모와 복지사들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금화 초콜릿을 나눠준다.

덕분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구경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생각대로 잘 된 듯하다.

이곳에 온 아이들이 본인과 소중한 사람들을 직접 그림으로써 이곳이 인종과 종교에 구분되지 않는 장소임을 잘 드러냈다.

사이사이에 녹색 피부를 가진 얼굴도, 파란 피부를 가진 얼굴도, 심지어는 로봇 같은 얼굴도 있지만.

이곳에 각자의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전달되리라 믿는다.

어른들이 만들어 둔 규칙과 규범, 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

그나저나 이 넓은 곳을 다 관리하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다.

오후 4시 정도 되니 통행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서 오늘은 마감재만 바르고 마무리해야겠다.

“아저씨.”

“응. 슬슬 마무리해야지.”

방태호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마감재인 바니시는 얇게 펴 발라야 얼룩이 지지 않아서 아이들이 하기엔 무리가 있다.

나와 할아버지, 방태호, 파브르가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그 주변에 적당히 바를 생각이다.

손이 아쉬운 만큼 비다 라바니도 도와주지만 아직은 서툴다.

마르소가 와 주었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

“앙리다!”

“왕벌이다!”

“앙리, 앙리, 이거 먹어 봤어? 진짜 맛있다?”

고개를 돌리니 노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채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마르소를 볼 수 있었다.

노란 바탕에 검은 선이 여럿 기울어져 들어간 특이한 넥타이다.

“이것들이 몇 번 봤다고 함부로 불러? 마르소 작가님이라고 해!”

“아항학핰! 작가님이래.”

“작가님이 뭐야?”

“몰라.”

“어려워!”

“앙리, 앙리는 키 왜 그렇게 커?”

“이거 뭐게?”

“초콜릿이잖아.”

“어떻게 알았어?”

인기가 좋다.

저렇게 화를 내는데도 사랑받는 것도 재주는 재주다.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살 게 있어서 들렀을 뿐이야.”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자 퉁명스럽게 답한다.

예술가가 공장에서 만든 기성품 따위를 입을 수 없다며 옷이며 신발이며 심지어 차까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걸 만들어 쓰는 인간이 쇼핑몰에 올 리 없다.

“잘됐다. 바니시 바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도와줘!”

아이들이 함께 외쳤다.

마르소는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꼬맹이들 낙서에 뭘 하라고?”

“우리 일이에요. 이것도 쇼콜라티에 이름으로 시작한 거잖아요.”

“초콜릿 만들어?”

“나 초콜릿 좋아해.”

“앙리, 훈이가 만든 집 봤어? 엄청 귀여워.”

“내가 만든 게 훨씬 멋있어.”

“정말?”

“당연하지.”

“보여줘!”

“……뭐?”

“보여줘! 보여줘!”

미셸과 등을 기대고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조성한 조각을 남에게 보여줄 리 없다.

“시끄러워! 너희들 보라고 만든 줄 알아?”

재촉하는 아이들 사이에 껴 난감해하는 걸 보니 조금 재밌다.

* * *

셰바송 씨몽 SNBA 협회장이 업무 도중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TV를 틀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예술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합작하여 설립한 쇼콜라티에가 오늘 파리의 한 쇼핑몰에서 공개 작업을 시작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웃음소리와 앙증맞은 벽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허.”

-쇼핑몰 관계자는 달리다 광장에서 보여주었던 화합의 장을 재현할 목적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셰바송 씨몽 협회장은 프랑스 예술계를 이끌어나갈 앙리 마르소의 행보에 흡족해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마련될 때까지 가만있지 않고 저렇게 솔선수범하여 나서니, 협회 내부는 물론 대다수 국민이 앙리 마르소를 지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잘하고 있어.”

나라가 부강해지고 개인이 발전을 이루려면 포용력 있는 사회를 이룩해야만 했다.

리더라면 소외된 이들이 없도록 가능한 팔을 넓게 벌려야 했고 앙리 마르소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었다.

TV 속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붓칠하는 마르소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확실히 변하긴 했어.’

셰바송 씨몽은 천방지축이었던 앙리 마르소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변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저 아이 덕이겠지.’

비슷한 가정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본인과 견줄 만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일까.

장미를 보호하는 가시처럼 날카롭던 앙리 마르소의 성정이 고훈을 만난 뒤로 조금씩 무뎌지는 듯했다.

상처 입은 고독한 영웅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니 그를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보다 기쁠 수 없었다.

‘둘이 팀으로 나서면 우승도 가능하겠지.’

TV를 끈 셰바송 씨몽은 아르누보 공모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전시회의 사업 계획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 *

1)영화 <어벤저스>의 패러디.

작중에서는 고훈의 부모가 콘셉트 아트 매니저로 참여했다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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