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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257화 (21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7화

47. 친하다(4)

“이대로 두고 어떻게 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일을 이렇게 벌여두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막 일이 손에 잡혀서 진도 나가는 중인데 여기서 그만둘 순 없는 법이다.

작업에 몰입했을 때 그만두면 다시 마음을 잡기까지 한세월인 걸 마르소가 모를 리 없다.

괜한 심술이다.

“샤워하고 자.”

“…….”

“자라고.”

“…….”

몇 번 무시하니 역시나 포기하곤 자기 일에 집중한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집 주변도 꾸미고 싶은데, 오늘 밤 안에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 *

모서리만 남은 상자 안에 공을 만드는 데 성공한 앙리 마르소가 허리를 폈다.

공은 바닥을 제외하고 8개의 모서리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겨우 바탕을 완성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식탁 위에 올라가 붓칠하는 고훈을 보았다.

마침내 강아지를 만든 고훈은 그 요령을 바탕으로 새와 아이를 만들고 있었다.

초콜릿 강아지가 실패한 원인이 무게와 크기에 있다는 걸 깨달은 고훈은 크기를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풍선 틀로는 부피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을 통해 쇼콜라티에나 초콜릿 공예사의 작품을 찾아보며 생각을 정리했고.

녹인 초콜릿을 비닐에 담아 모서리를 조금 잘라내 3D 프린터처럼 쌓아 올리는 방식을 채택했다.

3D 프린터가 작동하는 방식을 많이 접한 덕에 금방 요령을 이해했고 마침내 초콜릿 새와 강아지, 사람을 만들 수 있었다.

첫 의도와는 달랐지만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했던 목표에는 차근차근 다가가고 있었다.

‘…….’

앙리 마르소는 벌써 몇 시간째 집중하고 있는 고훈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일을 시작했을 때가 어제 점심 무렵이었으니 꼬박 14시간을 저러고 있었다.

본인의 유년 시절을 떠올린 앙리 마르소는 소년이 걱정스러웠다.

무엇에 빠지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잔병치레가 잦았다.

작업을 포기할 순 없어 그 외 시간에는 몸을 관리하는 데 힘썼지만,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꾸준히 관리받고 본인도 노력한 덕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나 조금만 방심해도 간과 신장 수치가 높아졌다.

“…….”

그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고훈이 규칙적으로 생활하길 바랐으나,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본인 또한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붓과 조각칼을 놓지 않았으니, 고훈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무엇에 미친 사람은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았다.

고훈은 초콜릿으로 기름종이 위에 나비를 그려 살짝 접었다.

두 날개가 붙지 않도록 하여 저대로 두면 날갯짓하는 것처럼 굳을 터였다.

걱정으로 가득했던 앙리 마르소의 가슴에 묘한 동질감이 피어올랐다.

붓과 조각칼을 든 순간만큼은 작품과 나만이 존재했다.

그 고독이 좋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상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그럴수록 요동치는 가슴이 좋았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해일처럼 밀려드는 만족감.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각자의 세계를 구현해나갔다.

고요한 가운데 초콜릿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만이 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날이 밝고.

“아이고.”

2층으로 내려온 고수열은 난장판이 된 부엌을 둘러보았다.

초콜릿 포장지와 기름종이, 조각칼, 쓰레받기에 가득 모인 초콜릿 조각, 과자 부스러기.

싱크대를 가득 채운 냄비와 그릇까지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은 밖에서 먹어야 할 듯싶었다.

“허.”

고수열의 시야에 두 작품이 눈에 들어 왔다.

차디찬 대리석 위에 놓인 작품 중 하나는 고훈이 만든 초콜릿 집이었다.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집처럼 숲속 한가운데에 있었다.

초콜릿 풀과 초콜릿 나무로 무성한 숲에는 강아지와 토끼, 나비가 돌 모양 초콜릿 길을 따라 정답게 놀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하루 사이에 만들었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다.

‘이건 어찌.’

고수열은 손자가 벽과 초목의 질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당장이라도 날개를 파닥일 것만 같은 나비는 어찌 만들었는지 살피다가 붓과 기름종이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처음 봤을 때도.

오일 파스텔과 수채 물감을 쓸 때도 고훈은 재료를 효과적으로 활용했었다.

이번에도 점도가 높고 빨리 굳는 성질을 잘 살린 듯했다.

한편 앙리 마르소의 작품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마르소는 구(球)를 파내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네 장면을 표현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단풍버즘나무 두 그루가 구면을 따라 서 있고, 나무 사이에 여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살피면 왼쪽에는 단풍버즘나무 한 그루가, 오른쪽에는 붓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90도를 돌면 붓꽃밭과 마르소 저택 사이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가운데 조각상은 한쪽을 여성, 다른 한쪽을 남성으로 조각해 두고 있었다.

다시 한번 발을 떼자 마르소 저택과 단풍버즘나무 사이에 연인이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초콜릿으로 만든 스노우볼 같았다.

이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루 만에 진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고수열은 두 작품을 보다가 헛웃음을 짓고는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잠든 앙리 마르소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길게 누운 고훈을 볼 수 있었다.

* * *

이틀 후.

연인을 찾은 미셸이 깜짝 놀랐다.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하고 며칠 연락이 안 되어 걱정하던 차에, 눈앞에 거대한 초콜릿 조각상을 두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구체형 조각상은 겉면이 나무와 저택, 꽃이 조각되어 있었고 바닥은 붓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가운데 앙리와 미셸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어?”

로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연인이 하트 모양 초콜릿이라도 만들면 기특하게 여길 생각이었던 미셸이 조각과 연인을 번갈아 보았다.

앙리 마르소가 구체의 맨 윗부분을 달군 칼로 날라냈다.

그 위에 채를 두고 화이트초콜릿 파우더를 털어내자 붓꽃밭에 눈이 내렸다.

주변의 시선을 피하느라 저택에서만 시간을 보냈던 두 사람에게는 마르소 저택과 그 부지가 추억의 공간이었다.

붓꽃이 피는 여름과 단풍버즘나무 잎이 붉어지는 가을, 눈 내린 날에는 유독 고요한 마르소 저택까지.

“앙리.”

미셸이 연인을 불렀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애정으로 가득했다. 이따금 비치는 순수함에 매번 속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

안타깝게 입술을 떼고,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입을 맞추길 반복한 뒤에 앙리 마르소가 그녀를 떼어놓았다.

“먹어.”

“……이걸?”

“만들어 달라며.”

미셸이 초콜릿 조각을 살폈다.

앙리 마르소가 3일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었다.

본인과의 추억을 형상화한 둘만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이걸 어떻게 먹어.”

앙리 마르소가 눈을 찌푸렸다.

“기껏 만들었더니.”

“그래도.”

미셸이 망설이자 앙리가 칼을 들었다. 단풍버즘나무 한 그루를 베려고 하자 미셸이 소리 질렀다.

“잠깐! 잠깐만!”

“왜?”

“그러지 마. 어?”

“놔두면 상해.”

“조금만 더.”

“피곤해. 잘 거야.”

3일 밤낮을 지새웠던 앙리 마르소가 피로를 호소했다.

한시라도 빨리 미셸에게 초콜릿을 먹이고 편히 잠들고 싶었다.

“자, 잠깐. 사진. 사진 좀 찍고. 야, 이 멍청아!”

앙리가 기어이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내자 미셸이 그의 등을 냅다 때렸다.

한편.

고수열과 방태호도 고훈이 선물한 초콜릿 집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키가 50㎝는 될 것 같은 초콜릿 펭귄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펭귄이에요.”

아이들에게 선물할 <헨젤과 그레텔> 외에도 할아버지와 방태호를 위해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한 고훈은 두 사람의 반응에 다소 실망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아니다.”

“마음에 안 들긴.”

고훈이 묻자 고수열과 방태호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풍선으로 복잡한 형태는 만들기 힘들더라고요. 강아지라든가. 근데 서 있는 펭귄은 단순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어, 어.”

방태호가 말끝을 흐렸다.

<펭귄>은 배와 머리가 초콜릿 시럽과 무스, 견과, 누가, 각종 과자로 가득 차 있었다.

“숟가락으로 퍼서 드시면 돼요.”

고훈이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며 웃었다.

“다 드세요.”

“이걸 다?”

고수열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놔두면 상해요.”

“그야 그렇겠지만. 어이구. 할아버지는 이거 다 먹으면 당 올라서 안 돼.”

“당?”

“당뇨.”

“그래. 이거 어휴. 돈 벌더니 초콜릿으로 다 쓰는구나.”

고수열이 혀를 내둘렀다.

없던 당뇨도 생길 것만 같은 외관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고훈이 시선을 돌려 방태호를 보았다.

“서울이랑 파리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하셨잖아요. 그 보답이니까 마음껏 드세요.”

“어…….”

“커흠. 흠.”

방태호가 고수열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지만 고수열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오늘 아무래도 혈관이 야근할 것 같은데.”

“혼자 다 먹는 건 힘드니까 냉장고에 두고 내일도 먹으면 돼요.”

“……이거 내일 쇼핑몰 작업하러 갈 때 가져가면 더 좋지 않을까?”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마음은 진짜 너무 고맙지. 엄청 기쁘지. 날 위해 만들어 줬다는데.”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애들 나눠줄 건 따로 있어요. 아저씨 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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