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3화
46. 놀이터(5)
계약 주체가 될 사람이 고훈이 아니라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최대 주주로 있을 새 법인 사업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름이 독특했다.
쇼콜라티에라면 초콜릿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직업이었다.
“쇼콜라티에라면.”
피아프 팀장이 말을 흘리자 고훈이 웃었다.
“멋진 이름이죠?”
“네. 하지만.”
고훈을 유심히 지켜볼 정도로 미술계에 관심이 많았던 지오바나 피아프는 그것이 고훈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임을 알고 있었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행복을 만들어 주려는 뜻에서 만들었어요.”
“아.”
고훈이 쇼콜라티에란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자, 피아프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미술사는 조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진 바로크는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한 말로.
당시 비평가들이 기형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예술 풍조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다.
지금도 가장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인상주의 역시, 당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비평가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이라며 조롱한 단어였다.
이를 인상주의 화가들이 본인들의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인정받았다.
파블로 피카소와 쌍벽을 이루었던 대가, 앙리 마티스를 필두로 한 야수파 또한 마찬가지.
평론가가 색을 잘못 사용한다는 뜻으로 야수 같다고 평한 말이 유래가 되었다.
공통점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조롱받았던 단어가 지금에 와서는 전혀 그런 뜻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상적이다, 야수 같다는 말을 조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오바나 피아프는 이러한 인식 변화가 예술가의 승리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한 평론가가 고훈을 조롱하고자 사용했던 쇼콜라티에라는 단어도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지오바나 피아프는 작년, 저명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이 쓴 글을 떠올렸다.
그녀는 ‘달콤한 행복’ 전시회를 찾은 뒤 고훈의 작품을 아울러 쇼콜라티즘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오바나 피아프는 고훈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린 작가는 많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작가는 손에 꼽았다.
피아프는 고훈이 그런 작가라고 확신했다.
‘고훈과 계약하는 데 최대 450만 유로라면 싸게 먹힌 거야.’
그녀가 미소 지었다.
“네. 정말 멋진 이름이네요.”
* * *
방송을 켜자 5,000명이나 들어왔다.
아르누보 공모전 이후 영어, 프랑스어 자막을 달면서 뉴튜브 구독자가 크게 늘었는데, 생방송은 한국말로 해서 그런지 많이 늘지 않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온 건 처음이다.
└핑하!
└훈하!
└방송 열심히 한다고 했으면서 2주 만에 하냐 ㅠㅠ
└일은 잘 끝냈어요?
└제육덮밥 먹고 싶다
└교수님 오늘은 무슨 강의인가요?
└공지할 거 있다던데?
저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제육덮밥 타령이다.
“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알려드릴 게 있어서 켰어요. 달리다 광장이랑 이것저것 하느라 바빴어요. 미안해요.”
방송을 자주 못 한 것을 사과하자 달리다 시청자들이 광장 이야기를 꺼냈다.
“덕분에 잘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도 왔더라고요. 김치볶음밥에 치즈 넣어서 튀긴 거 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달리다 광장에서의 일을 전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그사이에 시청자도 늘어서 8,000명이나 들어왔다.
슬슬 들어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아서 본론을 꺼냈다.
“기사도 나서 아시는 분은 아실 텐데, 마르소하고 회사를 만들었어요. 이름은 쇼콜라티에.”
└쇼콜라티에??
└그거 이토 히로부미가 헛소리한 거 아닌가?
└이토 아니고 다나카 ㅋㅋㅋㅋ
└앙리 마르소랑 드디어 합치시네요!
└무슨 회산데?
마르소와 무슨 일 있었냐고 집착하듯 묻던 사람이 유독 좋아한다.
“좋더라고요. 이번에 아이들한테 초콜릿이나 과자 나눠주면서 느낀 건데 제 작품이 그런 식으로 다가가면 좋을 것 같았어요.”
시청자들이 응원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두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는 마음 맞는 화가들하고 함께 전시회를 열 거예요. 좋은 작품 만드는데 주목받지 못한 사람 위주로요. 지금은 마르소랑 파브르까지 세 명인데, 곧 몇 명 더 모을 거예요. 맞아요. 저번에 그렸던 포스터. 이렇게 크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계약이나 수익 분배, 세금 같은 거 생각하면 법인 만드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시청자들이 파브르가 누구냐고 해서 몇몇 작품을 소개해 줬다.
“그리고 놀이 공간을 만들 거예요. 주말에 아이들이 부모님하고 같이 와서 그림 그리며 놀 수 있게요. 놀이터란 이름으로 운영할 건데, 그 아이들하고 같이 작업도 할 거예요.”
└학원 같은 건가?
└훈이랑 앙리한테 배울 수 있으면 무조건 가지.
└나도 가고 싶다 ㅠㅠ
└제육덮밥 먹고 싶다
└진짜. 훈이랑 앙리가 가르치면 사람 엄청 몰릴 것 같은데. 우리 훈이 돈 번다!!
└근데 쟤 ai임? 방송할 때마다 들어와서 3~4시간 동안 제육덮밥 먹고 싶다는 채팅만 치네.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돈도 안 받을 거고요. 사람이 너무 많이 찾으면 추첨이나 조건 같은 것도 봐야 할 것 같아요. 우선은 가정형편 어려운 아이나 프랑스에 잘 적응하지 못한 아이 위주로 받고 싶어요.”
몇몇 시청자가 걱정해 주었다.
봉사할 시간에 자기 일 먼저 챙기라는 분도 계시고, 그래도 어느 정도 수익은 있어야 유지하지 않겠냐는 분도 있다.
이해 못 할 말도 올라온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이게 무슨 뜻이에요?”
처음 듣는 말이다.
└세상에. 이 드립을 모르는 세대가 있다니.
└둘리 몰라?
└ㅁㅊ 모른대
└ㅋㅋㅋㅋㅋㅋㅋ2022년생이 올해 초등학교 입학했음ㅋㅋㅋㅋ
선의를 베풀었는데 나중에는 당연하게 여기며 교만해진다는 뜻이란다.
그런 경우도 분명 있을 거다.
가난하고 약자라고 해서 선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 경우에는 태호 아저씨가 나서줄 거예요. 또 마르소가 그런 걸 두고 볼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시 회사 이야기를 물었다.
질문이 상당히 다양한데, 아무래도 앙리 마르소와 함께 회사를 차리는 게 신기한 듯하다.
“네. 저랑 마르소가 반반씩 출자했어요. 경영은 지금 매니지먼트 계약 맺고 있는 선플라워의 태호 아저씨가 맡아줄 거고요.”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는 말은 모르면서 출자니, 경영이니, 지분이니 하는 말은 잘 아네.
└ㅋㅋㅋㅋㅋㅋ조기교육
└그럼 이제 앙리 마르소하고 같이 사는 거예요?
└그래도 수입이 없으면 일방적으로 돈만 쓰는 걸 텐데.
“마냥 그렇진 않아요. 이번에 뷰그레넬리 쇼핑몰하고 일하게 됐어요. 달리다 광장에서 한 일 덕분에요. 아이들하고 같이 벽화 그릴 건데 기사가 있을 거예요.”
프랑스 언론에서는 꽤 여러 번 기사가 났는데, 한국 쪽에서 찾아보니 대한일보랑 예화에서만 내주었다.
알려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듯하다.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최대 450만 유로???
└학원비 벌라고 했더니 60억을 버넼ㅋㅋㅋㅋㅋ
└우리 훈이는 다 계획이 있다구!
└제육덮밥이 100만 그릇…….
└훈이 혹시 돈 복사하니? 누나도 좀 알려줄래?
└이게 뭔ㅋㅋㅋㅋㅋㅋㅋ 기암성 아트북도 그렇고 올해 대체 얼마를 버는 거얔ㅋㅋㅋㅋ
“맞아요. 제 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돈 많이 벌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당장 파리 시내에 마르소 갤러리와 같은 건물을 올릴 정도가 되었다.
“저게 조건이 붙었어요. 그랜드 아트 투어라고 아세요?”
아는 사람이 꽤 있다.
“맞아요.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아트 바젤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해를 그랜드 아트 투어 해라고 하는데, 내년이거든요. 거기서 모두 입상해야 한대요. 이건 좀 힘들 것 같아요.”
└?
└뷰그레넬리 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
└돈 덜 주고 싶어서 안달 났네.
└왜 힘들어. 해.
└아닠ㅋㅋㅋㅋㅋㅋ 그게 뭔 소리얔ㅋㅋㅋㅋ 어떻게 그랰ㅋㅋㅋㅋ
└아니. 조건이 좀 이상한데? 입상 기준이 없는 행사도 있잖아.
└그러게? 딴 건 그렇다 쳐도 카셀 도큐멘타는 좀 에반데? 그쪽은 원래 2년 전에 미리 이야기 나누고 일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감독이 훈이 안 부르면 끝이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도 말이 안 돼 ㅋㅋㅋㅋㅋ 훈이 일단 화가잖앜ㅋㅋㅋ
└아트 바젤은 기준이 뭐야? 그냥 갤러리 모여서 파는 곳 아님?
└난 잘 모르는데 채팅 보니까 이 조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정도는 알겠음.
└ㅋㅋㅋㅋㅋㅋㅋ그보다 다들 베니스 비엔날레는 입상할 걸 전제하고 말하는 게 웃기지 않냨ㅋㅋㅋㅋ
└그러겤ㅋㅋㅋㅋ 훈이한테 베니스 비엔날레 따위는 거저라는 건갘ㅋㅋ
└진짴ㅋㅋㅋ 명색에 세계 3대 비엔날레인데.
시청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말이 안 되는 조건이다.
사실 실패하더라도 300만 유로나 받을 수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방태호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래서 일단 다음 달에는 뷰그레넬리 쇼핑몰 지하 1층에 벽화 그릴 거고요. 그다음에는 내년 공모전 준비로 바쁠 것 같아요.”
주어진 시간은 1년 정도.
예전에는 하루에 한 점씩 그리기도 했지만, 각 행사에 어울리는 작품을 네 점이나 준비할 수 있을까 싶다.
“알려드릴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채팅창에 물음표가 반복해 올라왔다. 벌써 방송을 끝내냐는 뜻이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8시밖에 안 됐다.
방송을 2주나 못 해서 근황 이야기나 하려고 했는데, 뭔가를 더 해야겠다.
“그럼 오랜만에 미술 이야기해 볼게요. 누구 이야기가 좋겠어요?”
여러 사람이 언급된다.
할아버지, 마르소, 호크니, 바스키아, 브레송, 피카소, 마티스, 폴록, 워홀, 키르히너 등등 가지각색이라 누굴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말씀하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굴 꼽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동시대 미술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조금씩 느끼는 바가 있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볼 겸, 시청자들의 생각은 어떤지 들어볼 생각이다.
“여러분은 동시대 미술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점 하나, 선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
그들만의 리그.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말이 많이 올라오고, 몇몇은 동시대 미술의 장점을 진지하게 써 주었다.
“말하기 전에 우선 이건 제 생각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할게요.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여러분 자유고 여러분의 감상이니까 틀린 것도 옳은 것도 없어요.”
└네 교수님
└빨리 받아적으래
└ㅋㅋㅋㅋㅋ그러지 말라고 하잖앜ㅋㅋ
내 방송 시청자만 그런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그런지 장난을 좋아한다.
“일단 이해가 안 된다는 점에서는 아마 동시대 미술 하시는 분들도, 평론가들도 일정 부분 인정할 거예요. 그분들도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느낀 바다.
“그런데 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미술은 이해보단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이해는 그런 게 아니겠죠. 사실 그런 느낌 때문에 요즘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은 잘 안 나와요. 언급하신 점 하나 찍어놓은 작품이라든가.”
사람들이 또다시 물음표를 마구 올렸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해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이해할 순 없어도 다가갈 수 있거든요.”
인터넷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찾아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