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52화 (20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2화

46. 놀이터(4)

“외롭잖아요.”

“외롭긴 누가 외로워?”

앙리 마르소는 부정했지만 고훈은 확신했다.

미술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을 혼자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스스로 만들어 온 길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며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문제도 답도 홀로 내야 하는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가 온전히 이해받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같이한다고 나아지진 않겠지만 가끔은 그리울 때가 있잖아요. 그때는 잠깐 짐을 내려두고 기대 봐요. 서로.”

폴 고갱과 함께한 경험 때문에 고훈은 처음부터 이상적인 공동체를 바라지 않았다.

서로에게 크게 관여하지 않고.

다만 위안을 줄 수 있는 관계가 적당했다.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고훈과 앙리 마르소의 대화를 의심스럽게 듣던 블랑쉬가 나섰다.

“나 그냥 빠질게.”

“왜?”

고훈이 깜짝 놀라 물었다.

블랑쉬 파브르는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번갈아 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두 사람 혹시.”

“혹시?”

“특별한 관계면 미리 말해줘. 눈치 없이 행동하고 싶지 않아.”

“컥.”

주스를 마시던 방태호가 사레 들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 고장 난 고훈이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앙리 마르소가 호통쳤다.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1)

“아니에요?”

“아니에요?”

앙리 마르소가 블랑쉬의 말을 반복하며 눈을 부라렸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블랑쉬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좋아한다느니.

외롭다느니.

서로 기대자느니.

평범한 관계에서 꺼낼 말이 아니었기에 혹시나 두 사람 사이에 껴서 훼방을 놓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넌 왜 가만있어!”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닦달했다.

너무나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던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마르소가 내게 특별하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빼!”

* * *

[일상으로 다가온 미술관]

고훈이 예술가의 거리로 유명한 몽마르트르구에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조부 고수열과 동료 앙리 마르소, 블랑쉬 파브르에 뱅크스까지 참여한 이번 작품은 달리다 광장 언덕길을 가득 채운 해바라기로 제목은 없다.

작품 활동을 마친 고훈은 르 피가로지를 통해, “여러 인종이 함께 사는 몽마르트르구에 행복하고 따뜻한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에 말대로 작업이 진행된 열흘간 달리다 광장은 프랑스인, 흑인, 무슬림, 동양인이 한데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이에 몽마르트르구 구청은 고훈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현대판 헨젤과 그레텔]

화가 고훈이 달리다 광장에 해바라기를 그리며, 아이들에게 초콜릿과 과자, 파이를 나눠준 일이 화제가 되었다.

몽마르트르구 주민으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은 고훈 덕분에 아침을 먹지 못한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놀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며 몇몇 기업이 기부 행사를 벌였고 고훈이 작업을 끝낸 뒤에도 후원을 지속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편 미술평론가 다나카 히로부미는 고훈이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매수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샀다.

앙리 마르소를 달래고.

블랑쉬 파브르의 오해를 푼 다음 날.

여태 마음에 드는 이름을 정하지 못한 고훈은 턱을 괸 채 인터넷 뉴스 기사를 뒤적이다가 다나카 히로부미와 관련한 기사를 발견했다.

“쯧.”

손자가 신문에 집중하기에 뭘 보나 싶었던 고수열이 다나카 히로부미의 억지를 확인하곤 혀를 찼다.

“그런 거 볼 필요 없다.”

“신기해서요.”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저한테 관심이 있나 봐요.”

고훈은 첫 개인 전시회에 찾아왔던 다나카 히로부미가 다시는 찾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어떻게든 자기 입지 높이려고 그런 게지. 그런 놈들은 무시해도 돼. 괜히 상처받을 거 없고.”

“상처 안 받아요. 그냥 꾸준히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신기했어요.”

고수열은 어린 손자가 걱정되었다.

아무 근거 없이 비난받으면 속상해할 만도 한데, 괜찮다고만 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본 화가들은 무슨 그림 그려요?”

“음. 한 나라를 묶는 건 힘들지.”

한국화의 대가면서도 한국화를 모른다고 말하고 다니는 조부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요시토모 작품이 좋더구나.”

“요시토모?”

“하라 요시토모. 가슴이 따뜻해지지.”2)

고훈이 할아버지가 추천한 이름을 따로 적어두곤 다나카 히로부미가 쓴 글을 찾아보았다.

아이들을 작품 활동에 끌어들였으면서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고 초콜릿이나 과자로 대체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원봉사를 한 고훈을 억지로 욕한다며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은 고훈은 예술과 디저트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화가라며, 다나카 히로부미와 설전을 나누고 있었다.

“아.”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정했어요.”

“뭘?”

“이름이요.”

고수열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쇼콜라티에.”

“음?”

다나카 히로부미가 조롱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였기에, 고수열은 손자가 무슨 의도로 쇼콜라티에라는 이름을 정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다나카가.”

“좋은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잖아요. 초콜릿처럼 행복한 미술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고훈이 할아버지에게 캐롤라인 스트릭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여주었다.

[달콤 쌉싸름한 화가 고훈]

아르누보 공모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화가 고훈이 최근 달리다 광장에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소외된 아이들을 모아 함께 그림을 그리며 간식도 나눠준다는 소식은 여러 언론을 통해 잘 알려졌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장을 찾았고, 오르막길을 가득 채운 눈부신 해바라기와 꿀벌들 그리고 그들 손에 들린 초콜릿을 본 순간 나는 그의 첫 번째 초대전 ‘달콤한 행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여러 작품을 발표한 고훈은 조금씩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서리 밀밭>, <여름 너울>과 같이 그리움과 강인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나 고훈의 작품 세계는 행복을 바탕에 두고 있다.

‘달콤한 행복’에서 간식을 그리며 추억을 상기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공감대를 형성한 바 있다.

그런 고훈이 이번에는 미술관을 벗어나 거리에서 그림과 간식을 공유했다.

그림과 간식을 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이며, <79㎏>과 <34㎏>을 남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연상케 한다.

고훈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영향력을 미칠지 모르나, 가장 개인적인 예술 행위가 타인과의 교류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흠.”

고수열이 태블릿을 내려놓자 고훈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다가간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고훈은 실로 그리 생각했다.

건강한 몸만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었다.

부모님, 할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걷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지만, 적어도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찾아온 비극과 절망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완성한 그림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한 번 더 일어설 용기가 되었으면 했다.

울적할 때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초콜릿처럼.

* * *

뷰그레넬리 쇼핑몰과의 두 번째 미팅에서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이 뜻하지 않은 문서를 보여주었다.

“저번에 말씀하신 방지책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종차별 사건을 방지할 방법과 사후 대책을 요구했는데 벌써 준비해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입점한 업체를 상대로 한 달에 한 번 교육을 진행하고, 업장에서 관련 문제가 발생할 시 계약 파기 및 금전적 배상을 요구할 예정입니다.”

특별한 방법은 아니지만 뷰그레넬리 측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거다.

“만에 하나 이 일로 작가님께 피해가 가게 된다면 보수액의 세 배를 배상해 드릴 테고요.”

방태호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 여부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실지 확실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기준이 없으면 면책 조항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증오범죄가 사실로 인정되었을 때로 수정하면 만족하실까요?”

“네. 충분합니다.”

세부적인 계약에 관련한 일은 방태호가 나서주어서 다행이다.

“또.”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이 함께온 직원에게 서류를 넘겨받았다.

“지속적인 교류를 원하셨는데, 작가님과 방태호 대표님께서도 인테리어 작업을 계속해 이어갈 순 없는 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3년 계약에 연 1회. 작업 기간과 보수는 기존과 같은 조건으로 어떠신가요.”

방태호가 깍지를 꼈다.

고민하는 듯한데, 아마 내 몸값이 오를 것을 염두에 둔 듯하다.

3년 뒤에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는데 굳이 현재를 기준으로 잡을 필요가 있을까 계산해 보는 거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눠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으니 이런 점은 편리하다.

“어떻게 생각해?”

방태호가 내 생각을 물었다.

“제가 바란 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서 다행이지만 사실 3년을 같은 금액으로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어. 내후년에 개봉할 영화도 있으니까. 그 사이에 전시회도 열 테고.”

100만 유로라면 다른 화가들과 비교해도 충분히 많은 보수라서 만족하지만.

방태호는 <기암성>의 후속작이 또 한 번 흥행하고, 내 전시회가 성공하리라 확신한 것이다.

좀 더 욕심을 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저씨한테 맡길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거다.

적절한 보수를 받으며 행사가 지속되길 바라는 의도는 충분히 반영되었으니 다른 문제는 방태호를 믿고 맡기고 싶다.

“그래.”

방태호가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을 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말씀하시죠.”

“고훈 작가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랜드 아트 투어가 가능한 내년은 물론이고 내후년에는 기암성의 후속작이 개봉할 예정입니다.”3)

지오바나 피아프의 얼굴은 조금의 동요도 없다.

이미 상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 동의합니다. 다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수에 적용할 순 없습니다.”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의 말이 옳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로 현재 더 큰 돈을 지불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훈이가 내년, 4대 전시회에 모두에 작품을 전시한다면 어떨까요.”

그랜드 아트 투어라면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조각은 하지 않는다.

방태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150만 유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오바나 피아프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4대 전시회에서 모두 입상하는 조건은 어떠신가요.”

말없이 서로를 살피던 중.

방태호가 빙그레 웃었다.

“좋습니다.”

일단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정확히 어떤 행사인지도 모르는데, 저런 조건을 걸어도 되나 싶다.

100만 유로씩 3회분, 300만 유로 계약으로도 만족하지만 방태호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럼 여기에.”

“네.”

방태호가 계약서에 쇼콜라티에라고 적자 피아프 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 * *

1)빈센트 반 고흐는 폴 고갱과의 관계로 오해를 받았다.

2)모티프는 나라 요시토모.

3)Grand Art Tour.

10년마다 유럽 4대 전시회를 같은 해에 볼 수 있는 기회.

가장 최근에는 2017년이 그랜드 아트 투어의 해였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2010, 2020, 2030년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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