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1화
46. 놀이터(3)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고는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았다.
벽과 길을 가득 채운 해바라기 덕분에 다소 삭막했던 거리가 밝아 보였다.
아이들이 웃고 뛰며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앙리 마르소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
즐겁다거나 행복, 웃음 같은 일은 그와 거리가 있었다.
앙리 마르소에게 미술은 전쟁이었다.
재능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던 긴 시간, 어떻게든 올라서고자 이를 갈았다.
결국 파리역 광고판을 모조리 사들여 이름은 알렸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평단은 자화상만 발표하는 앙리 마르소를 무시했고 언론조차 마르소 가문의 막대한 부를 상속받은 철부지로 여겼으며.
예술가들마저 새로움도, 철학도 없다며 그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원한다면 정치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앙리 마르소는 마르소 가문의 상속자로 남기를 거부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며, 세상 모두가 인정하지 않아도 자신을 지켜냈다.
그렇게 그린 자화상이 600여 점 정도 모이고 나서야 조금씩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현재와 같이 프랑스 회화의 마지막 천재, 영웅으로 인정받은 건 불과 4~5년 전의 일이었다.
정상에 올랐으니 조금 쉬어도 될 텐데.
그는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 예술계를 잠식했던 불온 세력을 몰아내고, 영국 미술 경매 시장을 장악한 카르텔을 상대하며 동시에 예술가와 학생들을 위한 법 제정에 힘쓰고 있었다.
그가 그 힘든 싸움을 계속 이어나간 이유는 단 하나.
기나긴 싸움에서 자신을 지지해 준 팬들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미술에 관련한 지식이 없어도, 유명하지 않아도, 힘이 없어도 평단과 언론이 조롱할 때도 기꺼이 앙리 마르소를 찾아주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본인처럼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조금이나마 용기를 낼 수 있길 바랐다.
투쟁을 거듭해 왕좌에 오른 남자에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장소는 낯설었다.
“마르소?”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불렀다.
상념에 잠겼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는 아르센이 준비한 간이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등을 잔뜩 기대었다.
“가서 놀아.”
이상한 날이었다.
* * *
[달리다 광장을 찾은 앙리 마르소]
26일 토요일 오늘, 화가 앙리 마르소가 달리다 광장을 찾았다.
달리다 광장은 현재 화가 고훈이 주축이 되어 파리 시민들이 함께하는 참여형 예술이 진행 중이다.
고훈은 한 언론을 통해 “인종과 출신 국가, 성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사회 비판 및 복지를 병행하는 예술가 뱅크스가 지지하며 여러 예술가가 참여한 가운데, 오늘 프랑스의 대표 예술가 앙리 마르소가 현장을 방문했다.
앙리 마르소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대신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부근에 자신의 구두를 그렸으며, 저녁에는 아이들을 위해 달리다 광장에 일일 뷔페를 차렸다.
달리다 광장 행사는 내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앙리 마르소가 현장을 방문했단 소식은 또 한 번 큰 화제가 되었다.
평소 공적인 장소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기에, 그의 사생활과 개벽 프로젝트 등을 취재하고자 한 언론이 달리다 광장에 모여든 덕이었다.
고훈이 언론 인터뷰를 되도록 피하며 다소 잠잠해졌던 달리다 광장 행사는 뱅크스와 앙리 마르소의 합류로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었다.
└꿀벌 옷 입지 않고 어깨에 두른 건 마지막 자존심인갘ㅋㅋㅋㅋㅋ
└애기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거 왤케 스윗하짘ㅋㅋㅋㅋ
└심지어 짜증 내고 있는데도 달라붙어 있엌ㅋㅋㅋㅋ
└어린애들도 잘생기고 예쁜 사람 좋아한대.
└누가 그래.
└너 차단.
└근데 구두는 무슨 뜻이지?
└다녀갔단 뜻인가?
└걸어 올라가겠단 뜻 아냐?
└두 발이 나란한 거 보니 서 있는 거 같은데.
└보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난 뭔가 지켜 보고 있단 뜻인 거 같아. 함께하진 않지만 뭔가 보호하는 느낌으로.
└ㅋㅋㅋㅋㅋㅋㅋ앙리가 그럴 리가 없음. 그냥 이몸께서 강림하셨다 같은 느낌일 거임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술 애호가들이 훈훈한 소식에 기뻐하고 있을 때.
고훈은 앙리 마르소와 열을 올리며 토론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감자도 싫다, 해바라기도 싫다, 놀이터도 싫다. 대체 뭐가 좋은데요?”
“M&G.”
“싫다고요. 그럼 이삭은 어때요?”
“이삭?”
앙리 마르소가 잠시 고민했다. 고훈이 제시한 말도 안 되는 이름 중에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종교적 이름이라 한 단체의 이름으로 쓰기에는 프랑스 사회에서 어울리지 않을 듯했다.
“토스트 먹고 싶어지네.”
방태호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토스트요?”
“아니야. 아무것도.”
방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공적인 자리에 사용하기 힘든 사명을 지어서 어쩌려고. M&G로 해.”
“나는?”
앙리가 마르소&고란 이름을 반복해 언급하자 블랑쉬 파브르가 나섰다.
“그래. 다른 사람도 들어올 텐데 그런 이름이면 누가 들어오고 싶겠어요.”
“너랑 나만 하면 되지.”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소와 이야기를 이어가봤자 진척이 없을 듯했다.
“근데 왜 고민이야?”
파브르가 나서서 물었다.
“법인 만들어야 하니까. 공동명의로 일할 때 쓰려고.”
“그거 말고. 이름. 정했잖아.”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반마르소파. 내가 회장이고 네가 부회장.”
“그건 또 뭔 소리야?”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썼지만 파브르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르누보 공모전 때 같이하기로 했잖아. 무찌르기로.”
“이것들이 무슨 작당을 하고 있었던 거야. 흰머리, 너 내 악플 달고 있어?”
“흰머리라고 부르지 마요. 자기는 곱슬머리면서.”
“뭐?”
“싸우지 마요. 그리고 저번에 소개했잖아요. 블랑쉬 파브르. 이름 두고 왜 흰머리라고 불러요. 이제 같이할 사람끼리.”
“난 같이할 생각 없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뷰그레넬리 쇼핑몰하고 계약하기 전에 법인 만들긴 해야 하니까, 싸우고 싶으면 이름부터 정하고 마저 해요.”
“그전에.”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말을 잘랐다.
“방이 대표를 맡는 건 넘어가지만 전시 관련 일은 플라티니 대표가 전권을 맡을 거야.”
고훈과 방태호가 눈을 깜빡거렸다.
법인이 멀쩡히 있는데, 외부인에게 일을 맡긴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에요?”
“내 작품을 다른 사람이 맡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미셸은 마르소 갤러리 맡고 있잖아요.”
“외주 처리하면 되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방태호가 나섰다.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습니다. 마르소 씨가 속한 법인에서 마르소 갤러리에게 일을 주게 되면 내부 거래로 인한 부당이익 취득으로 간주될 수 있어요.”
마르소가 눈매를 좁혔다.
본인의 작품을 미셸 플라티니 외에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원칙이 앞선 탓에 간과한 부분이었다.
그럴 의도는 없더라도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일감 몰아주기로 오해받을 여지를 남길 순 없었다.
“너, 그리고 당신. 내 회사로 들어와.”
앙리 마르소가 고훈과 방태호를 지목했다.
“싫어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쩌라고.”
고훈이 고민을 이어가다가 결심했다.
“따로 해요. 같이 일할 때는 따로 계약 맺고 하면 되잖아요.”
“같이하자며.”
“이름 정하는 것부터 뭐 하나 맞는 게 없는데 어떡해요.”
고훈은 앙리 마르소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가 평소와 달리 얌전하다는 걸 깨닫고 의아해했다.
한편 오늘 달리다 광장에서 생각에 변화가 있었던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길은 명확히 달랐다.
부정과 위선과 정면으로 싸우고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한 일은 모두 본인 세대에서 종결짓고 고훈과 꼬맹이들은 달리다 광장에서처럼 웃고 떠들고 즐기면 되었다.
“재밌냐.”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노려보며 물었다.
“뭐가요?”
“애들이랑 낙서하는 거.”
“당연하죠.”
앙리 마르소는 두 번, 세 번 더 생각한 다음 마음을 굳혔다.
“그래.”
어차피 데미안 카터, 제이 조플링과의 일은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 어떤 적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고훈과의 관계를 외부에 알려 위협을 넓히고 싶지 않았다.
고훈이 펼쳐낼 미래가 행복하고 달콤할 것을 알기에, 고작해야 10살 먹은 아이에게 그러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차마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그곳에 함께할 수 없었던, 그러나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같았다.
“그러니까 마르소도 같이하면 좋겠어요.”
고훈의 말에 앙리가 인상을 썼다.
“정했으면 바꾸지 마. 우유부단한 건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어떻게 그래요.”
고훈이 솔직하게 나섰다.
“애들도 마르소 좋아해요. 나도 좋아하고. 고작 이름이나 법 때문에 안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해요. 이름은 내가 정하고 대신 미셸을 데려와요. 미셸도 우리 회사에 취직하면 되잖아요. 법인 두 곳에 들어간다고 불법은 아니죠?”
“그렇지.”
고훈이 질문에 방태호가 시원하게 답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름이니,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길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난 너처럼 그렇게 할 생각 없어. 애들하고 놀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난 나대로 할 테니까.”
“싫으면 굳이 어울릴 필요 없어요.”
고훈이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그래도 좋아하잖아요.”
소년은 확신했다.
앙리 마르소가 달리다 광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다면, 찾아오지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자존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혹은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았다.
짜증을 내면서도 꿀벌 옷을 두르고 아이들에게 멋진 저녁을 준비해 준 그가 내심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기에, 고훈은 차마 그를 멀리할 수 없었다.
블랑쉬 파브르가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번갈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