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50화
46. 놀이터(2)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과 함께 나온 직원이 서류를 내밀었다.
“최근 2년간의 외주 용역 계약을 정리한 자료입니다.”
방태호가 뷰그레넬리 측에서 제시한 자료를 확인했다.
벽화, 설치 미술을 포함한 인테리어 계약이 어느 정도 선에서 체결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몇몇 사례는 방태호도 기억할 정도로 알려진 내용이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했구나.’
100만 유로라는 큰 액수를 어떻게 제시했는지 파악하고 싶었던 방태호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정보를 정리했을 뿐이나, 내부 참고 자료까지 제시하는 것을 보니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랄 테고.’
공개된 정보가 오갔을 뿐이나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은 계약 의지를 확고히 보였고, 방태호 또한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방태호 대표가 입을 열었다.
“우선 좋은 조건으로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말씀하시죠.”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이 방태호를 응시하며 귀를 열었다.
재작년부터 여러 일화를 만들어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고히 한 고훈을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때문에 보수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제시했으며, 일정 부분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다만 기업으로서도 무작정 보수액을 높일 순 없으니, 뷰그레넬리와 고훈 모두가 만족할 적정선을 찾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고훈 작가가 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안전하고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죠.”
최대 120만 유로를 상정하던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제안이었다.
방태호가 계속해 고훈의 의사를 전달했다.
“파리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지낼 만한 공간이 많이 없습니다. 워낙 무서운 세상이니까요.”
위생 문제, 안전 문제, 범죄 등으로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공간이 부족했다.
“고훈 작가는 뷰그레넬리와의 일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이 일을 하는 한 달간은 몽마르트르구에 사는 아이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으니까요.”
협상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지오바나 피아프는 고훈이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히 파악했다.
“단발성 행사로 그치지 않길 바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그렇습니다.”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했으니 고훈이 직접 나설 차례였다.
“이번 일이 올해는 뷰그레넬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아이들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겠죠.”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이 긍정했다.
“하지만 다음 해나 그다음 해에도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저는 이 일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으면 해요. 그건 아마 뷰그레넬리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고훈의 말대로였다.
단기간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만이 성과는 아니었다.
뷰그레넬리 쇼핑몰은 파리 광역권에 거주하는 1,000만 명 모두의 쉼터, 놀이터가 되어야 했다.
그러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생겨날 수 없었다.
‘잘 알고 있어.’
지오바나 피아프는 고훈이 이번 일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양쪽이 바라는 일이 일치하니 더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작가님 뜻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다음 미팅 때는 좀 더 진행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 * *
이야기가 잘 진행되어 다행이다.
경영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협상 자리에 나온 지오바나 피아프는 나와 같은 미래를 보는 듯했다.
한 번에 큰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지금의 내겐 안정적인 수입원 확보가 더 중요하다.
새 사업체와 갤러리를 준비하고 있으니, 돈이 들어올 구멍을 여럿 준비해 둬야 한다.
놀 장소가 없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다.
다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뷰그레넬리 쇼핑몰이 몇 번 더 장소를 마련해 줄 순 있겠지만, 그곳에만 의지할 수 없다.
한화 10억 원 이상의 돈을 다달이 쓸 리도 없고, 예상치 못한 변수는 항상 존재하니까.
다른 기업이나 구청에서 일을 받는 것도 방법이 되겠지만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싶다.
“갤러리에 그런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어떤?”
방태호가 물었다.
“아이들하고 같이 그림 그리는 거요. 학교 끝나고 와서 놀 수 있게.”
“학원 같은 느낌이네.”
“뭔가를 가르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단 놀이터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음. 그러면 유지 비용도 생각해야겠네. 부모들에게 받긴 싫은 거지?”
“네.”
가정형편에 제약을 두고 싶지 않다.
“이번 일 같은 걸 꾸준히 받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금액으로 보면 충분하겠지. 근데 보통 일이 아니야. 지금은 부모들이 애들을 데려와서 같이 보고 있으니까 큰 문제 없지. 아이들만 모아서는 감당이 안 될걸?”
“그건 방 대표 말이 맞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를 좋아하고 힘도 좋으신데도 아이들의 체력에는 따라가기 힘드신 듯하다.
“그럼 부모도 같이 오게 해요.”
“응?”
“주말이라도요. 부모랑 자식이랑 같이 시간 보낼 기회가 없잖아요.”
“문화관광부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방태호의 말에 나도 할아버지도 웃었다.
“어제 보니 파브르하고 라바니를 잘 따르더구나. 이야기도 잘 통하는 또래 중에 나이가 많으니 그런 것 같아.”
할아버지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
‘감자들’에 회원이 많아지면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으니 이 일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할 거야?”
“내일 마르소 만나면 한 번 더 얘기해 볼게요. 파브르도 들어오고 싶다고 하니까 같이 얘기하면 답이 나올 것 같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달리다 광장 이야기, 뷰그레넬리 쇼핑몰 이야기, 화가 공동체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생각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지만 이렇게 보람찼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다음 날.
빵과 초콜릿, 과자를 잔뜩 싣고 달리다 광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광장에 푸드 트럭이 네 대나 서 있다.
생크림과 딸기를 가득 넣은 크레페도 있고, 소시지와 야채를 넣은 바게트도 있다.
설마 앙리 마르소가 보낸 건가.
“저게 뭐예요?”
“글쎄다. 방 대표?”
“따로 연락받은 내용은 없는데. 가서 물어볼게요.”
방태호가 한쪽 푸드 트럭에 가서 뭔가 이야기하더니 크게 웃으며 인사했다.
“뭐래요?”
“근처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인데 아이들한테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오셨대. 오늘이 마지막인 걸 아셨나 봐.”
“무료로 준다는 말인가?”
“네. 애들한테만요.”
고맙긴 한데, 당황스럽기도 해서 고개를 돌리니 웃으며 손을 흔든다.
최근 못된 인간을 자주 만났는데,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을 줄은 몰랐다.
“크레페 먹고 싶어?”
크레페 트럭 사장이 멀뚤멀뚱 바라만 보던 올리비에와 아들리에게 물었다.
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금세 두 개를 만들어 주었다.
“정말 먹어도 돼요?”
“…….”
“저랑 얘 돈 없는데.”
올리비에가 아들리를 대신해서 이것저것 묻는다.
“하핳하! 그럼. 너희 레뱅하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
“어? 레뱅네 아빠예요? 레뱅은 왜 안 왔어요?”
“학교 갔으니까. 점심 먹고 올 거야.”
인제 보니 이곳에서 놀던 아이의 부모인 듯하다.
“얘들아, 이것도 먹어 봐.”
한 여성이 뭔가를 준다고 해서 다가가니 김치볶음밥 냄새가 났다. 키가 작아서 트럭 위를 볼 수 없는데, 여성이 한국말을 꺼냈다.
“어서 와.”
“한국 분이세요?”
“응. 하나 줄까?”
“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김치볶음밥을 많이 먹었다.
다른 요리는 할아버지처럼 잘 못하셨지만 김치볶음밥만큼은 정말 맛있게 해서 어머니도, 나도 좋아했었다.
할아버지도 가끔 해주시고, 분식집에서도 몇 번 시켜 먹었지만 아버지가 해주셨던 그 맛이 안 나서 아쉬운데.
아마 이분이 해주시는 것도 그 맛은 안 날 거다.
“여기.”
“……?”
푸드 트럭 사장님이 둥근 튀김 8개를 종이 상자에 담아 주었다.
“김치볶음밥 아니에요?”
“맞아. 튀긴 거야.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김치볶음밥을 둥글게 뭉쳐서 튀긴 모양이다.
“잘 먹겠습니다.”
뜨겁다고 하니까 후후 불어 식히고 입에 넣었다.
바삭한 튀김옷 아래 김치볶음밥의 시큼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지고 그 안에 치즈가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맛있어요.”
“그치? 많이 먹어.”
“할아버지! 아저씨!”
짐을 내리고 있는 할아버지와 방태호에게 다가가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뭔가 하던 두 사람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김치볶음밥이네?”
“맛있죠?”
“그러게.”
튀김과 밥, 치즈의 식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볶은 김치의 향미를 극대화한다.
“멸치 들어간 게 좋은데?”
“멸치? 치즈가 아니고요?”
“멸친데?”
“할아버지가 먹은 건 참치가 들었구나.”
안에 들어 있는 재료까지 다르다니, 이런 건 널리 알려야만 한다.
“형, 뭐 먹어?”
아이들이 다가와서 관심을 보인다.
“김치볶음밥.”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지만, 하나씩 입에 넣어주니 좋아한다.
“매워!”
“이거 뭐야? 맛있어.”
“헤헤헤헥.”
매워서 혀를 내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좋아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김치는 입맛에 안 맞을지 몰라도 볶음김치라면 말이 달라진다.
“나 물.”
“어디서 먹어?”
“냄새 이상해.”
“우와! 애기 물고기 들어 있어.”
“난 치즈였는데?”
“형, 이거 어디서 먹냐구.”
“더 먹고 싶다.”
반응이 제각각이라 귀엽다.
* * *
달리다 광장을 찾은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꿀벌 옷을 입은 꼬맹이 수십 명이 여기저기서 뛰거나 먹거나 붓을 휘둘렀다.
“앙리다!”
한 아이가 앙리 마르소를 발견하곤 소리치자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프랑스 예술계의 영웅으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는 어린아이들에게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크다아!”
“콧구멍 보인다! 히히힣!”
“아저씨! 아저씨도 그림 그리려고 왔어?”
“이거 먹을래요?”
어린 팬들의 지나친 관심에 앙리 마르소가 드물게 당황했다.
“저리 안 가? 꼬맹인 어딨어?”
“아항항하. 저리 가래.”
“꼬맹이가 누구야?”
“우리가 꼬맹이야.”
“아닌데? 난 형안데?”
“앙리는 이거 안 입어? 이거 다 입으라고 했어.”
한 아이가 자기가 입은 꿀벌 무늬 티를 가리켰다.
“나보고 그딴 걸 왜 입으라고? 너, 앙리라고 하지 말고 마르소 작가님이라고 해.”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이자 아이들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이거 안 예뻐?”
“예쁜데.”
“……우리 엄마가 귀엽다고 했는데.”
“앙리도 이거 입으면 예쁠 텐데.”
아이들이 울먹이자 달리다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왔어요?”
그때 꿀벌 옷을 입은 고훈이 다가왔다.
“너, 얘들 좀 어떻게 해봐. 울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왜 애들 좋아하는 걸 나쁘게 말해요. 얘들은 다 마르소 좋아하는데. 그렇지?”
“응.”
“근데 앙리는 싫대.”
“아저씨는 우리 싫대.”
“이상하다고 했어.”
“못생겼대.”
수십 명의 아이가 저마다 한마디씩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언제 이상하고 못생겼다고 했어! 옷이 싫다고! 너 자꾸 내 이름 함부로 말할래!”
아이들이 또다시 움찔하자 고훈이 옷을 내밀었다.
“기왕 온 김에 재밌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