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49화 (20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9화

46. 놀이터(1)

뱅크스라면 비다 라바니가 사는 동네에 벽화를 그렸다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정체를 감추고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도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진 듯하다.

“이렇게 그리려면 하루 이틀 다녀간 게 아닌 것 같구나.”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다.

단순히 그리기만 하는 거라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를 한 명, 한 명 알아볼 수 있게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며칠 전부터 쭉 관찰해 왔으리라.

모든 사람에게 지지받진 못했지만,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어서 위안이 된다.

“어? 오늘은 초콜릿 없어요?”

“과자 먹고 싶은데.”

아이들이 자동차 주변으로 몰려들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없어. 있지. 간식은 이따가 먹고 아침 못 먹은 사람?”

할아버지가 묻자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그제 아침을 못 먹었단 말을 듣고 준비했는데, 빵과 우유를 사 오길 잘했다.

“저도 도울게요.”

비다 라바니가 나서서 할아버지를 도왔다.

“고맙구나. 조심하고.”

비다 라바니처럼 그나마 나이가 조금 있는 아이가 빵과 우유를 차에서 내렸고.

어느새 군기반장이 되어버린 블랑쉬 파브르가 줄을 세웠다.

“나! 나도!”

“차례대로 받아야지.”

“으으으응.”

“막 달려들다가 다치면 아프잖아.”

“안 다칠게.”

“친구가 다칠 수도 있잖아.”

묘하게 아이들을 잘 설득한다.

할아버지는 길 청소를 도와준 주민과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함께 자리를 지켜준 어른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주셨고.

나는 아침 먹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데, 노엘이 입을 쭉 내밀고 있다.

“왜? 더 먹고 싶어?”

노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거 다 그리면 이제 못 만나?”

노엘이 한 말을 들었는지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장난치면서 웃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그럴 리가. 여기 다 그리면 다른 데 가서 그리면 되지.”

“정말?”

노엘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디?”

“저기, 저기 풍차 있는데!”

“나 좋은 데 알아!”

“계단! 계단은?”

아이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장소를 말했다.

그만큼 이 시간이 소중하고, 끝나질 않길 바란다는 뜻이리라.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

“정해지면 말해줄게. 꼭.”

* * *

현대 미술계의 아이콘이자 정체불명의 화가 뱅크스가 본인의 트위스트 계정에 사진 한 장을 게시했다.

해바라기가 핀 프랑스 파리 달리다 광장이었다.

그는 ‘달콤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문구로 그곳에 아이들을 그린 사람이 본인임을 증명했고, 미술계는 또 한 번 들썩였다.

└뱅크스가 다른 작가랑 저랬던 적이 있었나?

└데미안 카터랑 이상한 유원지 만든 적 있었어.1)

└……?

└그 범죄자가 여기서 왜 나와?

└오해 ㄴㄴ 어디까지나 동업이었지. 데미안 카터랑 같이 일하면 전부 범법자임?

└나중에 자백한 거 읽어보면 본인도 죄책감에 이런저런 자선 사업에 동참했던 것 같음.

└아무리 그래도 난 용서 못 함. 진짜 한때는 우상이었는데.

└근데 둘이 아는 사인가?

└고수열하고는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둘 다 영국하고 관련 많잖아.

└고훈, 고수열, 뱅크스 합작이네.

└애들은 왜 빼냐.

└뱅크스 행동 보면 굳이 아는 사이 아니라도 했을 듯. 테러리스트 비판하고 난민들 보금자리 마련해 주는 사람이잖아.

└그러게. 훈이랑 하는 일이 비슷하네.

└ㅁㅊ 고수열, 뱅크스, 고훈이라고? 저걸 진짜 팔 수만 있으면 대체 얼마에 팔릴까?

└건물이나 땅을 사야 할 텐데, 애매하다. 저기 건물들이 엄청 오래됐는데 그림 때문에 재건축은 꿈에도 못 꿈ㅋㅋㅋㅋㅋ 그냥 한참 후에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함ㅋㅋㅋㅋ

└설마ㅋㅋㅋㅋ

└근데 고수열, 뱅크스가 참여한 작품이면 진짜 그럴 수도 있음. 워낙 대단한 예술가라.

└고훈은?

└고훈도 ㅇㅇ

└진짜 우리 훈이 못 소화하는 그림이 뭐지 ㅠㅠ 수묵화도 잘 그리고 유화는 말할 것도 없고 착시나 풍경화도 잘 그리고. ㅠㅠㅠ

└ㄹㅇ 난 밥만 소화 잘하는데 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에르 말로 글 올라왔다.

└뭐래?

└액자를 짜 주고 싶은데, 능력이 부족해서 못 한 적은 처음이래.

뱅크스가 직접적으로 응원하고 나서면서 달리다 광장은 미술계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다.

변화에 예민한 기업들이 후원 및 협찬, 광고를 제안한 데 이어 예술가들도 고훈의 뜻에 동참하고 나섰다.

화가와 미대생들도 현장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내일이나 모레면 마무리될 것 같아요.”

고훈은 그러한 사실을 앙리 마르소에게 전했다.

-근데.

“마르소도 와 달라고요.”

-내가 거길 왜.

전화기 너머로 전해진 차가운 목소리에 고훈은 싱긋 웃었다.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화가가 오면 사람들도 좋아할 거니까.”

-누가.

“맞다. 프랑스가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뭐라 하기 전에 말을 바꾸었다.

달리다 광장 일로 개벽 개발에 참여하는 시간이 줄었는데, 그 때문에 단단히 화난 그를 조금이라도 달랠 의도였다.

-아부하지 마. 아쉬울 때만 연락하는 놈이 뭐가 좋다고. 내가 우스워?

“그런 생각은 아닌데.”

고훈의 목소리가 다소 침울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같이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랬으면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거리화 그린다고 말했잖아요.”

-같이하자고는 안 했어.

“사람 많은 거 싫어하잖아요. 또 피해 줄까 봐 그랬죠. 사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내가 언제 너보고 그런 거 신경 쓰랬어?

“이것저것 하는 일 많은데 다른 걱정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럴 일도 없으니까 오랜만에 같이하고 싶었는데.”

고훈이 아쉬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흥. 다른 사람하고 해. 죽이 잘 맞더만.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SNS와 뉴튜브 채널을 언급했다.

뱅크스에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글과 영상을 남겼는데, 그가 직접 댓글을 달아 화제가 되었다.

달리다 광장 길거리 그림과 온라인을 통해 우정을 쌓으니 고훈의 팬과 뱅크스 팬들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른 사람이 다 와도 마르소가 안 오면 슬플 거예요.”

-…….

“마르소 팬들도 많이 기다리던데. 언제 오냐고.”

-…….

“피날레는 원래 가장 중요한 사람이 해야 하는데.”

-시끄러워!

전화가 뚝 하고 끊겼다.

진심으로 마르소가 함께해 주길 바랐던 고훈은 아쉬움에 문자 메시지를 열었다.

“잘 안 됐어?”

운전석에 앉은 방태호가 물었다.

“네. 화가 많이 났나 봐요.”

“화?”

“길거리 그림 그리면서 연락을 잘 못했거든요.”

방태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일주일 정도 연락을 못 한 것으로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앙리 마르소 002에 NFT를 적용했다고 하던데. 빨리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고수열이 껄껄 웃었다.

<앙리 마르소 002>라면 연못 가운데에 있었기에, 무엇을 더 알려준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거라면 집에 있잖아요.”

“원본 파일을 준다는 의미지.”

고훈은 할아버지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본 파일은 뭐고. NFT는 뭐예요?”2)

“Non Fungible Token이라고. 디지털 파일은 복사가 얼마든지 되잖니?”

“네.”

“개벽처럼 디지털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기술에는 뭐가 원본인지 증명할 필요가 있거든. 그걸 보증하는 기술이라고 보면 돼.”

“아.”

완전히 똑같이, 무한히 복사할 수 있는 디지털 파일에 단 하나의 원본을 특정할 수 있단 말이었다.

개벽으로 그린 작품이 복사되더라도 무엇이 진품인지 알 수 있다면 해킹 같은 위협에도 대응할 수 있을 듯했다.

부우웅-

“어.”

고훈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곤 웃었다.

아르센에게서 앙리 마르소가 내일 오후에 잠시 들른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온대요. 마르소.”

“그럼 샤르망에 연락해야겠네.”

방태호가 의상을 협찬해 준다던 의류업체를 언급했다.

“왜요?”

“마르소 씨 옷도 한 벌 필요할 테니까. 사이즈가 어떻게 되지.”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옷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대로 삐질 것 같았고, 준비하면 준비한 대로 성질을 낼 것 같았다.

“라지요. 그 정도 입는 것 같더라고요.”

없어서 서운해하면 가져다줄 수 없으니 하나 더 받는 게 좋을 듯싶었다.

“다 왔다.”

고훈이 창문 밖을 살폈다.

파리 최대 쇼핑몰 뷰그레넬리를 지나 근처 호텔에 차를 세웠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미팅 장소로 향했다.

뷰그레넬리 쇼핑몰 마케팅 팀장 지오바나 피아프와 팀원이 고훈과 고수열, 방태호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지오바나 피아프는 검은 머리를 목선에 맞춰 단정해 보였고, 잘 다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지적인 인상이지만 눈에 그늘이 져 다소 지쳐 보였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태호가 뷰그레넬리 쇼핑몰 측의 제안을 요약했다.

“장소는 지하 1층 광장이라고 말씀하셨고. 기간은 최대 한 달. 작업 중에 쇼핑몰 이용객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따로 길을 내고 싶지만 작업 환경 자체가 좋은 화젯거리가 되리라 판단했습니다. 안전 문제라면 보안요원을 배치할 예정인데, 고훈 작가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지오바나 피아프 팀장이 고훈을 보며 말했다.

방태호는 그녀가 계약의 주체를 고훈으로 여기는 점을 높이 샀다.

“좋아요. 구경하는 시민도 이 일의 일부로 생각해요.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안전선 같은 걸 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오바나 피아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은 문제없으시고요?”

“네. 그보다 정말 도안이 필요 없는지 확실히 하고 싶어요.”

고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언급했다.

장소와 시간, 보수도 중요했지만 기업과 일할 때는 제한되는 게 너무나 많았다.

여러 단계를 거쳐 확인 작업이 필요했고 디자인의 경우는 경영진 측의 변덕과 오판으로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뷰그레넬리는 고훈 작가에게 벽화를 의뢰할 뿐 어떤 방식으로든 요구할 의도가 없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도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지오바나 피아프가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웃었다.

“경영진에서도 이번 일에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뷰그레넬리가 언제든지, 누구든지 편하게 찾는 공간이 되길 바라니까요.”

그것이 곧 매출로 이어지기에 고훈 일행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몇몇 사건이 있더군요. 아마 이번 일도 그 때문에 마련하신 듯한데.”

방태호가 인종차별 논란을 우회해서 언급했다.

“만약 그런 사건이 반복되면 고훈 작가에게도 피해가 생깁니다. 그에 따른 보안 장치를 마련해 두고 싶은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지오바나 피아프가 방태호의 걱정을 단언해 부정했다.

“그러나 작가님으로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니, 다음 미팅 때 방지 방안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물론 사후 대책도요.”

방태호와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가 있는 업체이니만큼 피아프 팀장이라도 보상 방안을 독단해서 결정할 순 없었다.

방태호는 뷰그레넬리 측에서 처음 제시한 100만 유로를 보다가 입을 뗐다.

“보수는 어떻게 책정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 * *

1)뱅크스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뱅크시는 58명의 예술가와 함께 2015년, 현대 사회를 풍자한 디즈멀랜드를 만들었다.

이 58명의 예술가 중 데미안 허스트 또한 포함.

디즈멀랜드는 5주 동안 운영되었고 이후 해체되어, 프랑스 칼레, 난민 수용소의 자재로 사용되었다.

뱅크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도 무슬림을 포함한 난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을 보호하는 데 힘쓰고 있다.

2)NFT(Non Fungible Token)

대체 불가능 토큰.

암호화폐의 일종으로 디지털 파일에 대한 소유권을 블록체인상에 저장함으로써 위‧변조가 불가능하게 하여 영구 보존하는 방법.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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