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48화
45. 뱅크스(7)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터라 더욱 반갑다.
“저. 어…….”
비다 라바니가 다가오더니 우물거렸다.
아들리도 같이 온 다른 무슬림 아이들도 모두 눈치를 본다.
대체 얼마나 괴롭게 살았으면 저 나이에 주변 눈치를 볼까 싶어 가슴이 아프다.
“어서 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뿐이라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라바니가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과자 먹을 수 있다고 말했거든.”
“뭐, 어때. 사실이잖아.”
초콜릿과 과자는 어디까지나 같이 즐기기 위해 준비했다.
그림의 보수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아들리다!”
올리비에가 아들리를 발견하고는 손짓했다.
아들리도 내심 반가운지 잰걸음으로나마 올리비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간식 나누는 것 좀 도와줘.”
“응!”
비다 라바니가 밝게 답했다.
할아버지의 차로 가서 초콜릿과 타르트를 나눠주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더 모였다.
어제나 그제보다 훨씬 많이 모여서 일부는 할아버지와 그림을 그렸고, 또 일부는 블랑쉬를 감싸고 있다.
또 몇몇은 그리고 싶은 걸 마음대로 그렸고 다른 아이들은 그림보다는 친구들과 수다 떨며 간식을 먹었다.
“얘들아, 주스 마시면서 놀아.”
“우와!”
마실 것도 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 근처에서 카페를 하는 남자가 양손 가득 사과주스를 가지고 나왔다.
“자, 훈이도 받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고맙지. 우리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 건 오랜만에 봐.”
남자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밝게 웃는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빠를 쏙 빼닮아서 곱슬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귀엽다.
“아이고. 선생님. 고생하십니다.”
남자가 할아버지께도 주스를 권했다.
“뭘 이런 걸 다. 잘 마실게요.”
도중에 작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무슬림이고 프랑스인이고 한국인이고 이렇게 함께한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아주 작은 용기와 그림 그리고 초콜릿이 있다면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
* * *
-다음 뉴스입니다. 얼마 전 화가 고수열, 고훈이 달리다 광장에서 참여형 예술을 진행하여 화제가 되었지요. 현장을 취재해 보았습니다.
프랑스 최대 방송사 TF1의 저녁 뉴스에 고훈과 고수열이 소개되었다.
-여기는 달리다 광장에서 일명 분홍집으로 이어지는 언덕입니다. 화가 고수열, 고훈 조손은 지난주부터 이곳 주민과 함께 해바라기를 그려왔습니다. 약 100m에 달하는 오르막길은 이제 30m 정도만 남기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거리 그림 덕에 거리에 활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시 뉴스의 뤼카 피레스입니다.
TF1 20시 뉴스가 송출한 영상에는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의 아이들이 함께 웃고 노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반복된 테러, 증오 범죄 소식에 지쳤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전해진 훈훈한 이야기를 반겼다.
└좋네.
└뉴스 볼 때마다 누가 사기 쳤냬, 비리를 저질렀냬, 열받았기만 했는데 오랜만에 기분 좋은 뉴스다.
└애들 웃는 거 봐 ㅠㅠ 진짜 뭐라도 주고 싶다.
└근데 진짜 요즘 애들이 마음 놓고 놀 만한 장소가 없어.
└그러니까. 세상이 좀 무서워? 나가서 놀다가 무슨 일 당하면 어떡해. 저렇게 어른들 많은 장소면 몰라도.
└근데 간식이나 재료 같은 거 전부 고수열 사비로 하는 거임?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겠지.
└고수열이 아니라 고훈이 시작했다고 하던데.
└누가 후원계좌 좀 알려줘 봐.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네.
└저게 근데 예술임? 혼자 그리는 것도 아닌데?
└평론가들은 참여형 예술이라고 하던데.
└이 경우하고는 좀 다른데 현대 미술에서는 팀 꾸려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혼자 하기 버거운 작업량이니 아이디어만 제공하는 거지.
└아무튼 진짜 보기 좋다. 프랑스 살면서 진짜 별의별 일 다 겪었는데 저렇게라도 조금씩 바뀌면 좋겠다.
주민과 알렉스 우드, 블랑쉬 파브르 같은 인플루언서의 자발적 참여가 이어지는 가운데.
언론과 평론가까지 나섰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도 이를 반가워하니 몇몇 기업이 관심을 보였다.
삭막한 일상 가운데 단비 같은 이야기를 활용해 기업을 홍보하고자 함이었다.
고훈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은 선플라워의 방태호 대표는 이메일 함을 열어보곤 고개를 저었다.
“다 보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방태호는 목 근육을 풀고는 차가운 캔 커피를 꺼내 와 책상 앞에 앉았다.
“어디 보자.”
대부분 협찬 관련 내용이었다.
고훈과 아이들이 작업을 마칠 때까지 간식을 제공하겠다는 기업이 7곳 있었고, 특이하게도 아동복 브랜드에서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가로줄이 그려진 옷을 선물하고 싶다고 나섰다.
“이거 좀 귀여울 것 같은데.”
방태호는 해바라기 사이에서 꿀벌처럼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을 떠올리고는 다음 메일을 열었다.
“오.”
파리 시내 대형 쇼핑몰 뷰그레넬리에서 보내온 제안이었다.
제목: 뷰그레넬리 쇼핑몰 마케팅 1팀에서 연락드립니다.
내용:
안녕하십니까, 뷰그레넬리 쇼핑몰 마케팅 1팀장 지오바나 피아프입니다.
뷰그레넬리는 고훈 작가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휘트니 비엔날레, 아르누보 공모전, 영화 <기암성>과 최근 달리다 광장에서 보여준 달콤한 일화까지 모두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뷰그레넬리는 파리를 찾은 모든 이와 파리에 거주하는 다양한 사람이 여가를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가족, 연인, 친구와 즐길 수 있고 홀로 찾아와 휴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하며, 이에 고훈 작가가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파일로 전해드리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흠.”
메일을 모두 확인한 방태호가 차가운 커피를 쭉 들이켰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방태호는 고훈의 바람과 뷰그레넬리의 이해관계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뷰그레넬리라고 하면 파리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었다.
파리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들르는 곳이기도 했는데, 오랜 세월 최대 규모의 쇼핑몰이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어 신규 고객을 유치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이용할 만한 사람은 고객으로 확보해 두었기에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슬림과 동양인도 고객으로 확보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방태호가 뷰그레넬리와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명품 매장 직원, “흑인이 사기엔 너무 비싸요.”]
[무슬림 입장 금지 영화관]
[한국계 프랑스인에게 “손으로 밥 먹지 않냐”며 수저를 주지 않은 음식점]
“좀 심하네.”
뷰그레넬리 쇼핑몰 내 입점한 몇몇 업장에서 심각한 수준의 인종차별 문제가 발발하며, 뷰그레넬리는 이미지에 큰 상처를 받았었다.
조금 더 확인하니 뷰그레넬리 대표 이사가 직접 나서서 사과하고, 문제가 되었던 업장과의 계약을 파기, 재발 방지 교육을 시행한다고 밝힌 적 있었다.
인종차별이 잦은 쇼핑몰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사업 중 하나로 고훈의 이미지를 활용할 의도였다.
‘훈이한테 도움이 되려나.’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고훈이 이 일을 받아들여 작업한 후에 뷰그레넬리에서 또다시 인종차별 문제가 발발한다면 괜한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사람은 생길 테니,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뷰그레넬리 경영진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방태호가 전화기를 들었다.
발신음이 이어지다가 고훈이 전화를 받았다.
-네, 아저씨.
“오늘은 어땠어?”
-정신없었어요. 애들이 장난치느라 물감을 뒤집어써서 난리였어요.
수십 명의 아이가 한자리에 있으니 질서정연할 리 없었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하는 지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행복하게 들렸다.
-그런데 왜요?
“아, 일이 들어와서 상의해 보려고. 선생님 같이 계셔?”
-네. 같이 듣고 있어요.
“좋네. 혹시 뷰그레넬리 알아?”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저번에 가봤잖니. 쇼핑몰.
-아. 생각 나요.
“응. 거기서 벽화 작업을 맡기고 싶대. 달리다 광장에서 한 것처럼 아이들이랑 같이 그려도 좋다고.”
-좋아요.
“어?”
-좋다고요.
“음. 일단 좀 자세히 알아볼게. 실은.”
방태호가 과거 뷰그레넬리 입점 매장에서 있었던 몇몇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정말 개선할 의지가 있는지 좀 알아보려고.”
-그건 아저씨께 맡길게요.
방태호는 고훈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생각에 작게 웃었다.
-그런데 정말 필요하더라고요.
“뭐가?”
-애들이 놀 곳이요.
“아.”
-달리다 광장 작업 마치면 애들이 갈 곳이 없대요.
-공원 위생이 좋지 않아서 잘 안 보내고 싶다고 하더라.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쥐조차 보호해야 할 동물로 여기는 일부 프랑스인의 사고방식과 달리 타국에서 온 사람들은 생쥐가 들끓는 공원에 아이를 내보낼 수 없었다.
아이가 쥐에게 물리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 뷰그레넬리 쪽 일이 안 돼도 어디가 좋을지 알아볼게.”
-고마워요, 아저씨.
방태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또 연락할게. 선생님, 푹 쉬세요.”
-고맙네. 자네도 고생 많았어.
통화를 마친 방태호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람을 잘 봤어.’
철이 들 무렵부터 미술을 접했고 대한민국 최고의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방태호는 무엇인가가 변화하고 있음을 어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미술이 미술로 남기 위한 노력은 정말 많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일은 적었다.
방태호가 보기에 고훈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화가였다.
앙리 마르소가 새로운 기술과 막강한 재력으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면.
고훈은 사람들이 미술 작품에 다가갈 수 있도록,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용기를 전해주는 듯했으며.
그러한 생각은 방태호만의 것이 아니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제는 비가 내려서 하루 쉬었는데, 그새 누군가 다녀간 모양이다.
해바라기들 사이로 밝게 웃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신기하게도 올리비에, 아들리, 아망, 지미, 노엘 등 자주 찾아오는 아이들의 특징을 잘 잡아서 그려 넣었다.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니 블랑쉬와 라바니도, 나와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논 아이가 모두 그려져 있다.
“어! 이게 뭐야?”
“이거 너 아니야?”
아이들도 자기 얼굴, 친구 얼굴을 찾으며 신기해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글쎄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라비, 어제 누가 왔다 갔어요?”
할아버지가 음료수를 나눠준 카페 사장에게 물었다.
“아니요? 못 봤는데.”
이만한 그림을 그리는데 카페 주인장인 아라비가 못 봤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밤중에 그렸다는 말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음. 알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내 초상화를 보고선 고개를 끄덕이셨다.
“뭘요?”
“이거 보렴.”
할아버지가 초상화 옆에 누군가 적어 둔 글귀를 가리켰다.
빨간 풍선 안에 달콤한 영혼을 위해서란 문장을 적어 두었다.
“이게 뭔데요?”
“뱅크스가 보내는 메시지.”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